러시아 도핑 스캔들을 밝혀낸 두 남자의 기막힌 이야기

2017. 12. 7. 16: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과 러시아 과학자는 어떻게 스캔들을 고발했나

[한겨레]

약물을 주사한 후 러시아로 반입해 소변을 검사하기 전에 날짜별로 살펴보고 있는 롯첸코프와 포겔. 사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감독 브라이언 포겔은 몇년 전까지 그저 자전거를 잘 타고 싶었던 아마추어 사이클링 선수였다. 삼각형의 조그만 의자에 앉아 허벅지를 고문하기를 즐기는 대부분의 사이클리스트처럼, 암을 이겨내고 정상의 자리를 다시 차지한 랜스 암스트롱이 그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그의 영웅은 2013년에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2010년을 전후해 세계 사이클링계는 도핑 폭로의 폭풍에 휩싸였다. 암스트롱의 주변 동료였던 플로이드 랜디스 등이 암스트롱의 약물 복용 혐의를 폭로하면서부터다. 암스트롱은 완강하게 혐의를 부인했지만, 2012년 미국 반도핑기구(U.S. Anti-Doping Agency)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7번이나 우승한 암스트롱의 도핑 사실을 적발해 발표했다. 그동안 공식적인 자리에서 혐의를 지속해서 부인하던 암스트롱은 201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인정했다. 이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던 브라이언 포겔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랜스 암스트롱이 그동안 500번이 넘는 약물 검사에서 걸리지 않았다면 , 이건 시스템에 결함이 있다 .”

■ 다큐멘터리 감독이 러시아의 과학자를 섭외하다

포겔은 이후 자신의 몸을 이용해 이 시스템의 결함을 직접 증명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과학자의 가이드에 따라 자신의 몸에 약물을 주입하고 프랑스 알프스를 넘는 세계 최고 난도의 아마추어 사이클링 대회 〈오트 루트〉에서 높은 성적을 올려 이를 증명하기로 한다. 포겔은 이를 위해 먼저 2014년 〈오트 루트〉 알프스 대회에 약물을 주입하지 않은 상태로 출전해 14위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UCLA 올림픽연구소의 창립자인 돈 캐틀린에게 ‘약물 검사에 걸리지 않는 도핑 프로그램’의 설계를 부탁한다. 포겔은 이 과정을 모두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돈 캐틀린은 “몇 년간 쌓아온 내 명성을 해칠 수 있다”며 “참여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통보한다. 제안을 거절한 캐틀린은 대신 “자신의 오랜 친구”라며 모스크바 올림픽연구소의 소장인 그리고리 롯첸코프를 소개한다. 러시아를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몰아낸 주역 롯첸코프와 그 조연인 포겔 감독의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이다.

■ 러시아 도핑 스캔들의 서막이 오르다

포겔은 미국 현지 의사의 협조를 얻어 롯첸코프가 모스크바에서 스카이프(인터넷 화상통화)를 통해 지시한 ‘프로그램’에 맞추어 착실하게 성장 호르몬과 테스토스테론을 자신의 허벅지에 주사하기 시작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겔은 “소치올림픽에서 선수들의 약물 검사를 담당했던 세계반도핑기구(WADA) 인증 모스크바연구소의 소장이 왜 이걸 수락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엔 약물 남용을 막아야 할 방패가 자신의 제안에 응한 게 이상했을 터였다.

그러나 롯첸코프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라 도핑 검사를 뚫는 세계 최고의 ‘창’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이 정답게 ‘랜스 암스트롱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 하며 테스토스테론을 주사하는 동안 독일의 지역 공영방송 컨소시엄인 ARD 방송국에서 러시아의 내부 고발자들을 취재원으로 롯첸코프의 주도 하에 러시아의 육상선수 대부분이 도핑 테스트에 걸리지 않도록 약물을 복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의 본격적인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스카이프를 통해 화상으로 통화하고 있는 브라이언 포겔과 그리고리 롯첸코프. 사진 넷플릭스 갈무리.

올림픽 등을 위시한 세계 스포츠의 비리 방지 기구, 그중에서도 도핑 방지 시스템에 대해서 조금 알 필요가 있다. 세계 각국은 자국에 세계반도핑기구(WADA, World Anti Doping Agency)의 인증을 받은 도핑방지 연구소 등을 세우고 유지한다. 한국에는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가 있고 러시아에는 러시아반도핑기구(RUSADA)가 있다. 롯첸코프는 이 기구 산하 모스크바연구소의 소장이어서 세계반도핑기구에서 롯첸코프의 비리를 인정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의혹이 터졌을 때 당시 세계반도핑기구의 위원장인 크레이그 리디(Craig Reedie)가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방어적 태도를 보인 이유 중 하나다.

러시아 도핑 스캔들이 터지고 나자 포겔과 롯첸코프 두 사람이 진행하던 실험은 물론 세계 스포츠의 운명도 바뀌기 시작했다. 테스토스테론을 맞고 아마추어 사이클링 대회에 ‘합법적’으로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근육의 힘을 측정하고 소변 검사를 진행하던 이 둘의 ‘작은 실험’은 점차 차선으로 밀렸다. 포겔이 첫해에 약물을 복용하지 않고 14위를 차지했던 〈오트 루트〉에서 오히려 한참 떨어진 순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중요한 게 아니게 됐다.

대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5년 9월, 독일 ARD의 탐사 보도에서 제기된 혐의에 대하여 수사에 착수했던 세계반도핑기구가 위임한 독립위원회 조사 결과, 롯첸코프가 있는 모스크바연구소 내에서 샘플이 폐기되고 도핑 검사 은폐를 위한 자금 지원의 흔적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독립위원회는 첫 조사 발표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모스크바연구소장이 폐기한 1400개의 샘플”이라며 “그의 직위를 해제하고 러시아의 출전을 금지하기를 권고한다”며 롯첸코프를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 러시아 정부가 꼬리를 자르려 하다

2015년 9월이면 2016년 리우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있던 상황. 러시아 정부와 당시 러시아 체육장관이던 비탈리 뭇코(현 부총리)는 조직적인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며 꼬리 자르기에 좋은 방향으로 상황을 몰아간다. 나중에 확인된 포겔의 다큐멘터리에서 궁지에 몰린 롯첸코프는 이 당시 자신의 목에 손을 긋는 제스처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숙청당하면 러시아는 올림픽에 출전할 거예요 .”

롯첸코프에게 있어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흘렀다. 국제육상경기연맹은 2015년 11월 “리우올림픽을 비롯한 모든 국제 육상경기에 러시아 육상연맹의 출전을 금지한다”고 발표한다. 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내부적인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며 “잘못을 저지른 개인에게 확실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부총리인 비탈리 뭇코 당시 체육장관 역시 수뇌부가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강하게 부정했다. “잘못을 저지른 개인”과 ‘수뇌부 연루 부정’. 여러 정황상 러시아 정부가 롯첸코프라는 꼬리를 잘라서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모습이 뚜렷했다. 포겔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 이때 롯첸코프는 자신과 당시 가장 친한 미국인 친구 포겔에게 말한다.

“여기서 탈출해야겠어요 .”

독일 ARD 방송의 보도 이후 세계반도핑위원회 소속 독립위원회의 조사 내용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진 넷플릭스 갈무리.

2016년 5월 12일 <뉴욕타임스>는 ‘국가가 주도한 도핑이 러시아 금메달의 원천이었다고 내부자는 말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공개한다.

뉴욕타임스가 말한 ‘내부자’는 물론 롯첸코프였다. 해당 기사에서 그는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때 금지약물 3가지를 섞은 칵테일 등을 최소 15명의 메달리스트를 포함한 선수들에게 제공했으며, 도핑 검사를 통과하도록 채취한 이들의 소변을 깨끗한 소변으로 바꾸는 데 관여했다고 밝혔다. 또, 그는 소변 샘플을 바꾸는데 러시아의 정보기구인 러시아연방보안국(FSB, 과거 ‘KGB’) 요원이 관여했으며, 자신이 약물 검사를 피하도록 도와준 15명 가운데 소치올림픽 봅슬레이에서 두 개의 메달을 딴 알렉산드르 줍코프,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알렉산드르 렉코프, 스켈레톤에서 금메달을 딴 알렉산드르 트레치야코프가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기사에서 그는 흡수도를 높이고 검출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남성 선수에겐 시바스 위스키에 타서, 여성 선수에겐 마티니 베르무스에 타서 제공했다며 자세한 방법까지 밝혔다. < 보도를 보면, 이 기사에 언급된 선수들은 러시아의 TV 방송에서 “말도 안 된다”며 “모략이다”라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혹은 적어도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이제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롯첸코프가 “자신이 살기 위해 폭로한 비윤리적 가담자”라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러나 IOC와 미국 측은 그가 가담자이긴 하지만 ‘내부 고발자’이며 그가 밝힌 대부분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매우 중요한 증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꼬리가 미국으로 망명하다

롯첸코프의 폭로 뒤에는 포겔이 있었다, 그는 롯첸코프의 망명 과정을 주도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그가 국무부와 협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존재를 공개해 안전을 확보하는 일에 협조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 남겼는데, 최초의 기획대로라면 랜스 암스트롱의 시나리오대로 약물을 주사한 아마추어 사이클링 선수의 약물 체험기 정도로 끝났을 다큐멘터리 〈이카로스〉는 이제는 러시아의 도핑 스캔들을 파헤친 가장 심도 있는 작품 중 하나가 됐다. 2017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영화 〈이카로스〉는 특별상인 ‘오웰 어워드’와 첫 관객상을 받으며 넷플릭스에 500만 달러(약 50억원)에 팔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7개월 동안 해당 사안을 조사해 지난 12월 2일 이사회 보고서를 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5일 스위스 로잔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러시아 선수단의 평창 올림픽 출전을 금지하는 징계를 확정 발표했다. 그리고리 롯첸코프는 모스크바 바스마니 법원이 2016년 1월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조정 기간을 거쳐 현재는 미국 법무부의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은신 중이다.

그는 은신 중인 지난달에도 <뉴욕타임스>를 통해 비탈리 뭇코 부총리와의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적은 자신의 일기를 발표한 바 있다. IOC가 러시아의 출장 금지를 발표한 날 롯첸코프는 자신의 변호인 짐 월든을 통해 “(롯첸코프가) 푸틴 정부가 자신과 가족들에 대해 보복을 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는 심경을 밝힌 바 있다.

아래는 넷플릭스의 〈이카로스〉 예고편 영상.

박세회 기자 sehoi.park@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