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김광석의 <일어나>-20년 전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온 나라와 사회의 목을 움츠리게 한 ‘구조조정’의 칼바람과 함께 1997년이 저물어가던 무렵, 공식 송년회는 폐지됐지만 팀별로 갹출하여 마련한 조촐한 송년회가 열렸다. 소주 몇 잔 기울인 뒤 그래도 기분은 내야 하지 않겠냐며 찾은 노래방. 얼마간 놀다가 화장실에 가려는데 범상치 않은 풍경이 눈에 띄었다.
한 중년 신사가 복도 소파에 퍼질러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울음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흡사 소처럼 울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허억허억거리면서. “아, 명퇴됐구나.” 내 가슴이 다 내려앉을 듯한 슬픈 무너짐 앞에서 나는 잠시 못박혀 서 있었다. 그런데 근처 방문이 왈칵 열리며 한 취객이 그 앞으로 휘청거리며 달려왔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그는 중년 신사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명퇴당하는 중년의 부하직원인 듯했다. 살아남은 자로서 미안함과 떠나야 하는 이에게 위로를 전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30대 취객이 버럭 내지른 소리에 나는 또 한 번 머리가 ‘띵’해지고 말았다.
“부장님이 왜 울어요. 부장님 죄 없어요. 부장님이 자른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자 중년의 신사는 부하직원을 부둥켜안고 다시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미안해’를 연방 토해내면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중년의 신사는 해고된 것이 서러워서 운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던 부하직원, 그것도 아이가 유치원이나 다닐 정도일까 하는 막막한 연배의 후배를 잘라야 했던 쓰라림을 못이긴 것이었다. 혀가 꼬부라진 “미안해”와 “부장님 잘못 아니잖아요”가 예닐곱 번 반복된 후 둘은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유리창을 뚫고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던 노래가 있었다.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노래 가사는 마치 그날을 묘사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 부장님을 모시러 나왔던 30대 직원의 목소리였다. 여기에 중년 신사의 목소리가 가세하고 후렴구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귀가 아프도록 우렁찬 그들의 합창을 들으며 콧날이 시큰해지고 말았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년이 흘렀다. 당시 부하직원을 자르고 통곡했던 부장님과 부장님을 되레 위로하던 구조조정 대상자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할까. 무던히도 바쁘고 험난한 세월을 보냈을 테지만 서로를 눈물로 포옹하고 위로하던 날, 취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내질렀던 노래만큼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그들이 그날의 <일어나>를 지울 수 있겠는가.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들의 노래가 귀에 쟁쟁거리는데. 그들 앞을 스치며 지난 내가 오늘날까지도 그 감전(感電) 같은 감동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터다.
<김형민 방송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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