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극복은 미완의 개혁, 모두가 빨리 잊으려 대강 덮었다"
이제는 한국 경제 구조적 문제 짚고 해법 찾을 때
위기 빨리 벗어나는데만 주력..시스템 구축 미흡
외환위기를 'IMF 위기'라 불러..책임 떠넘겨
책임 강조하니 공무원 복지부동..위기반복돼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영역 분명히 해아
올해 3% 성장한다지만..고용의 양과 질 나빠져
혁신성장한다면서 기업가 정신 키울 해법 없어
소득주도 성장 정책 지속가능성 고민해야
Q :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됐다. A : “중앙일보와 함께한 ‘위기를 쏘다’ 연재는 외환위기 당시 발생한 상황을 중심으로 담았다. 한국 경제의 질적ㆍ구조적 문제에 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웠다. 이제 20년이 됐으니 언급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위기는 본래 일상의 일탈이다. 요즘은 위기 자체가 일상화됐다. 그러면 위기관리 전략도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대응법의 변화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Q :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도 있다. A : “위기 극복으로 국민이 자신감과 자부심을 얻었나? 오히려 절망감과 정부ㆍ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그러면서 위기를 외면하고, 위기 가능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위기 극복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하고 잘못된 걸 시정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년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번지고 있지만, 시스템에 따른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Q : 시스템에 따른 대응이 부재한 이유는 무엇인가. A :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는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 사회가 된다. 무책임 사회가 되면 사람들은 위기 발생 전까지 손을 놓는다. 위기 발생 뒤에 대응하면 문제가 덜 생긴다. 숭례문 화재가 그 예다. 문화재 훼손을 우려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사전에 준비하다 잘못되면 책임 소지에 휘말린다. 그래서 무책임 사회가 되면 위기가 반복ㆍ증폭된다.”
Q : 무책임 사회는 어떤 부작용을 낳는가. A : “무책임 사회로 생긴 위기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일반 서민들이다.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즉 부수적 피해자가 생긴다. 전쟁은 군인끼리 싸우지만, 민간 사상자가 많다. 정책당국의 부적절한 대응과 기업의 과욕으로 외환위기가 일어났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일반 국민이다. 이런 위기 재발에 대비한 사전 대응체계가 필요하다. ”
Q : ‘미완의 개혁’을 어떻게 완성해야 하나. A : “외환위기를 변곡점으로 우리 경제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정부 관리 체제에서 시장 주도 체제로 바뀌는 과정을 정부가 주도했다. 그래서 관치라고 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됐는지 이제 짚어야 한다.”
Q : 일상화된 위기에 대응하는 국가시스템은 어떻게 만드나. A : “의사결정 시스템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일이 터지면 당국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이제는 유한책임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무적인 책임을 질지,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할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그래야 한계와 책임을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다. 책임을 지고 집행하는 과정은 모두 사람이 한다. 사람의 능력과 질을 높여야 한다. 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이념과 개인적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경 문제에 있어서 환경 근본주의자는 환경적 측면만 강조한다. 또 다른 편은 경제적 편익만 본다. 이러면 객관성이 떨어지고 문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없다.”
Q : 최근 원전을 둘러싼 공론화 방식이 객관적인 관찰, 현실을 직시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나. A : “부분적으로나마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 다만 첫 시도이다 보니 완벽하지 못했다. 미진한 감을 남겼다. 조금 더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Q : 국회라는 논의의 장도 있다. A : “한국에는 싫든 좋든 국회라는 대의 체제가 있다.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의견을 내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으면 제거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일을 잘하는지 따지기 전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압력을 가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가 직접 결정에 나서면 정부 일방주의가 된다. 시민단체가 한다고 나서면, 좋게 말하면 직접ㆍ숙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의견의 객관성과 미래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과정을 누가 만들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정부가 할지, 의회가 할지 정하기 어렵다. 한정된 자원에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면 그걸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Q : 제대로 된 의사결정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지적이 있다. A : “의사결정 구조, 즉 거버넌스 체계가 모든 분야에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위기는 상시화했다. 위기에 대한 국가 관리 시스템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다. 위기가 반복해 나타날 때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종의 불안감을 느낀다. 국가와 정부 내지는 지도층에 대한 불신감이 생긴다. 그러면 스스로 해결하려는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 무책임 사회가 각자도생의 사회를 낳는다. 그러면 공동체로서의 응집력이 생길 수 없다.”
Q : 최근 경제 상황은 어떻게 보는가? 올해 3%대 성장이 유력하고, 수출도 호조를 보이며 경기가 괜찮다는 시각이 있다. A : “착시현상을 무시하면 안 된다. 외환위기도 착시현상에서 비롯됐다. 수출이 잘 되고, 펀더멘탈도 좋다고 했는데 왜곡된 부분이 있었다. 지금도 착시현상이 있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국민경제라는 단위가 존재하려면 구성원에게 경제 활동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그 채널이 고용이다. 그런데 고용의 양과 질이 좋지 않다.”
Q : 중국의 추격, 저출산ㆍ고령화 등 고질적인 문제도 산적해 있다. A : “중국이 추격한다고 얘기한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중국은 갈 길을 간다. 우리는 우리 길을 못 가고 허겁지겁한다. 인구절벽에 대한 우려가 크다. 그런데 현재 노동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여성, 노인 인력 활용도 제대로 안 된다.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선 지식 노동자의 부가가치를 늘려야 한다. 이런 분야에 투자하지 않는다. 하드웨어와 인프라에만 관심을 가진다. 소프트파워에 대한 투자는 미흡하다. 미래 잠재 성장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당장 우리가 가진 잠재 인력도 제대로 가용 못 하고 있다.”
Q : 가계부채 증가도 한국 경제에 큰 위험요소다. A : “가계부채가 국민소득에 대비해 많다. 그런데 그 요인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 은행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때문인지, 고용 구조에 문제가 있는지, 주택이나 교육 구조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다면 소득을 높여야 하는데 그런 시도도 없었다. 부채에 대한 수요를 줄이려는 노력도 없었다.”
Q :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으로 한국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혁신성장도 함께 내세웠다. A :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건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혁신성장도 마찬가지다. 결국 성과가 나와야 한다. 지금은 거시적 담론만 있다. 구체적 방안이 없다. 과거 정부도 마찬가지다. 모두 국민 생활을 안정시키고, 성장을 위한 기업가 정신을 키우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는 ‘슘페터식 혁신’을 내세운다. 그런데 창조와 혁신으로 기업가 정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대답이 없다.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Q :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위해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A : “지속가능성이 문제다. 지속 가능하지 않으면 경제 주체의 의존성만 키운다. 최저임금을 근로장려금(EITC)과 연계할 수도 있다. 최저임금에서 모자란 부분은 EITC를 통해 보충할 수 있다. 같은 방법이라도 이런 방법이 좀 더 시장 친화적이고 자생적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정규직 전환 등 일자리를 늘리고 고용 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책이 오히려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 그렇지않아도 줄고 있는 취업기 회를 없애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Q : 현 정부가 공무원 증원을 추진하는데. A : “한번 공무원 수를 늘리면 되돌리기 어렵다. 특히 AI(인공지능) 발전이 본격화하면 상당수 공무원은 잉여 노동력이 될 수 있다. 공무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최종목적지가 공무원이라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
Q : 그러면 경제 성장을 위해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A : “정부가 일일이 답을 정해줄 필요가 없다. 국가가 주도해서 하나하나 방향을 잡아주고, 밀어주면 의존성이 생긴다. 사람 중심 경제를 이끌고 혁신경제를 이끌려면 자원의 제약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원을 조절한다는 건 재정 지출을 조절한다는 얘기다. 이건 기득권의 재분배다. 기왕에 나갔던 것을 끊고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터야 한다.”
Q : 노동 문제도 한국 사회의 오랜 숙제다. A : “노동의 유연성, 안전성은 개념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일률적인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산업시대의 노동형태와 과도기적 노동형태, 미래의 노동형태가 다르다. 과거의 노동형태를 전제로 유연성과 안전성을 따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개인의 입장에서 예전의 평생직장 개념이 다(多) 직업으로 변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양한 수요를 하나의 제도로 다 흡수해 해결할 수는 없다”
Q : 한국을 둘러싼 정세가 복잡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A : “국가 관계는 다층 구조로 다양하게 이뤄져야 한다. 서로가 필요를 느끼게 해야 한다. 중국 경제에 크게 의존하다가 정치적 문제가 잘못되면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외환위기 때 두 가지 현상이 있었다. 위기 전에는 일본과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IMF와 협정을 맺자마자 해외 금융기관이 한국의 돈을 다 빼갔다. 이에 대비한 내부시스템 구축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다층적 외교 관계가 필요하다.”
Q : 기업구조조정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있다. A : “‘구조조정이 미진해 나라에 활력이 없고 미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그런데 구조조정 측면에서 더 답답한 건 은행이고, 해당 회사의 경영자와 근로자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도록 노력할 것이다. 구조조정의 조건이 국가의 환경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금융 기관이 알아서 하는 거다.”
Q : 기업구조조정은 어떻게 해야 하나. A : “정부 정책에서 구조조정이란 단어 자체가 없어야 한다. 구조조정은 은행이 알아서 하는 거다. 시장에서 해결해야 한다. 시장에서 해결하기에 사회적 영향이 너무 크다면, 그때도 금융 당국이 아니라 사회 당국이 나서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GM을 처리한 사례에서 정부가 나서야 할 시기를 볼 수 있다. 그냥 놔두면 파산이었다. 그러면 디트로이트의 경제는 물론 기업 연금제도가 다 망가질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정부가 나설 테니, 연금 개혁을 하고 은행도 부채를 탕감하라. 그러면 정부가 돈을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뉴 GM을 만들었다. ”
Q : 기업 거버넌스(지배구조)도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A : “거버넌스는 정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결국은 시장의 평가가 중요하다. 국민이 국회의원을 평가하고 정부를 평가하듯, 시장이 기업의 브랜드 가치나 물건의 구매 등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왜곡될 수 있다. 시장의 평가 자체가 모럴해저드 가능성이 있다. 주주 입장에서 ‘불법행위를 하더라도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규율할지가 화두다.”
Q : 창의적인 인재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 A : “최근 포항에 지진이 났을 때 포항 지역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고, 이것이 전국으로 퍼졌다. 그런데 동일한 날짜, 동일한 시간에 전국에 걸쳐 똑같은 시험을 치르는 게 20년 가까이 진행됐다. 여기에 대한 개선이 전혀 없다. 획일적인 시험 아래에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대학 교육을 국가가 관리하는 건 의미가 없다.”
Q :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됐지만, 아직도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새로운 위기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 수 있나? A : “제일 무서운 위기는 인공지능(AI)이다. AI로 사회가 굉장히 흔들릴 거다. 두 번째 위기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올 거다.”
Q : AI가 어떤 위기를 초래하나. A : “AI는 그렇지않아도 어려운 일자리 상황을 점점 더 어렵게 할 거다. AI를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게 있다. 롯데와 신세계가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안 된다. 롯데와 신세계는 AI와 경쟁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생산이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해 줄 수 있다.”
Q : 중국과의 관계는 무엇이 문제인가. A : “최근 몇십년간 중국은 마지못해 한국에 의지했다. 우리도 필요했다. 그러면서 마치 짝사랑하듯 중국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 그러면 실망감도 크다. 그런데 (한ㆍ중간 갈등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한국과 중국의 주력 산업은 불가피하게 경쟁해야 한다. 자동차, 철강, 화학 등 여러 분야에서 마찰이 일어나면 중국은 자국 우선주의로 갈 거다. 중국을 극복할 수 있는 더 뛰어난 기술이나 원자재가 우리에게 없다.”
Q : 어떻게 해야 하나. A : “우리의 5000년 역사에서 중국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은 없다. 그런데 국가와 기업의 중국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다. 기대가 큰 만큼 우리가 당하면 고통이 커질 거다. ‘중국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남겠다’라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이 전 부총리는 지난달 'IMF 외환위기 20주년,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다'란 제목으로 뉴미디어 '퍼블리'의 독자 20명과 만났다. 제현주 공공그라운드 대표와 박지웅 패스트트랙아시아 대표가 함께 이날의 대화는 이달 중 퍼블리 홈페이지(www.publy.co)에서 멤버십 고객을 대상으로 전문이 공개된다.
◆이헌재 누구인가 -1944년 출생 -경기고, 서울대 법대 졸업 -1968년 6회 행정고시 합격 -1985년 한국신용평가 사장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 -2004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2016년 여시재 이사장
김원배ㆍ임미진ㆍ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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