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이재용 구치소 미담' 기사가 가린 진실
‘총수구속→경제위기’ 프레임 안 먹히자 ‘인격 있는 총수’ 프레임으로 여론 호소 10년 간 삼성반도체 직업병 논란에 무시와 무보도로 일관했던 이들에게 ‘인격’이란
‘서울구치소 독방 이웃이 전한 이재용 부회장 인격…“아무도 안볼 때 보니”’. 27일자 조선일보 단독보도의 첫 문장은 이랬다. “옆방에 이웃이 왔네요. 얘기 들었어요. 제 동생도 그렇게 갔는데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같아요. 힘내세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 독방에 지내던 A씨에게 건넨 위로의 말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보도는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A씨가 지난달 18일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그의 사정을 알고 이 부회장이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은 “최근 출소한 A씨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바로 옆 독방에서 생활했던 이재용 부회장의 구치소 생활을 들었다”며 “이 부회장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까지 하면서 주변 사람 아픔을 위로하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A씨 발언을 전했다.
이 신문은 “이 부회장은 이후에도 변호사 접견 등을 위해 독방을 나설 때 A씨에게 ‘힘내시라’고 하면서, 배식구로 음료수나 감 등을 넣어줬다고 한다. 감은 껍질이 깎여 있었는데, A씨는 이 부회장이 식빵 자를 때 쓰는 칼로 직접 깎은 것 같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실제로 감 껍질을 깎았는지, 위로의 말을 건넨 게 사실인지, 진위여부보다 관심 가는 대목은 해당 보도의 의도와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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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의도의 보도는 최근 또 있었다. 더팩트는 지난 23일 “이재용 부회장이 수개월 간 수감생활 동안 교도관들에게 예의를 갖춰 말과 행동을 해 교도관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는 “이재용 부회장 같은 신사는 처음 봤다”, “이미 알려진 인사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가 삼성 총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전혀 재벌 티를 내지 않는다”는 익명의 관계자 코멘트를 전했다.
앞서 월간중앙 4월호에선 한 수사관이 이 부회장에게 탕수육을 시켜주겠다고 권하자 이 부회장이 “수감 생활에 익숙해져야 하니 자장면을 먹겠다”고 거절했다는 내용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모두 이 부회장의 ‘인간미’를 강조하는 보도다. 언론은 지금껏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선견지명’과 이건희 회장의 소위 ‘은둔형 리더십’을 수없이 찬양해왔다. 최대 광고주에 대한 ‘예의’다. 이재용 부회장 미담 기사는 연장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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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경제가 망할 것 같은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된 지난 2월17일 189만원 대였던 삼성전자 주가는 11월28일 기준 264만원을 기록했다. 국제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이 부회장에 대한 유죄 판결이 삼성전자의 신용등급(AA-·안정적)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올해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냈고 80억 달러 규모의 하만 인수도 마무리했다.
총수구속→한국경제 위기란 거짓주술이 들통 나자 언론은 재판부를 겨냥했다. 이재용 부회장이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자 조선일보는 지난 8월26일자 사설에서 “재판부 논리대로라면 이 부회장은 승마 지원을 강요한 대통령 요구를 거절했어야 유죄가 아니라는 것”이라며 “그랬다면 이 부회장은 ‘경제정책에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으로부터 보복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의 사람에게 5년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법적 정의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여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언론은 방향을 선회해 대중의 인정에 호소하는 식으로 2심 판결에 영향을 주려하고 있다. 이 같은 기사는 앞으로 계속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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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주간지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미국서 반도체칩 제작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유산과 기형아 출산이 뒤따르자 IBM은 1995년까지 모든 작업장에서 반도체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 이후 반도체 생산라인은 한국으로 넘어왔다. IBM은 삼성·SK하이닉스와 반도체 대량 구입 계약을 맺었고 2015년 두 회사는 반도체시장 점유율 74%를 기록했다. 반도체 노동자들이 우주복 같은 방호복을 입고 일하는 이유는 제품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들은 수많은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됐고 그것들을 직접 만지기도 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 속에 한국의 이름 없는 노동자가, 그리고 그 노동자의 부모와 아이들이 대가를 치렀다. 백혈병을 비롯해 각종 희귀 암이 그들을 덮쳤다. 이건희 회장이 1995년 당시 그들에게 닥칠 위험을 과연 몰랐을까. 구치소에서 원격 경영을 하고 있다는 이 부회장이 과연 모를까. 무노조경영으로 작업장 내 산업재해를 철저하게 은폐하며 셀 수 없는 노동자들의 몸속에 암세포를 심었던 기업의 총수가 과연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기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협력업체 노동자 중 백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사례가 처음으로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7일 삼성전자 화성·기흥공장 협력업체 관리소장으로 일했던 고 손아무개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대상으로 청구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해당 업체는 반도체 제조 설비에 대한 유지보수 업무를 맡은 회사로, 손씨는 상시적으로 주당 2~3시간 클린룸을 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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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던 황유미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삼성전자 직업병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난 10월에도 삼성전자에 근무했던 이혜정씨가 세상을 떠났다. 희귀병인 전신성 경화증이 원인이었다. 반도체 노동자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삼성직업병피해 제보자는 지난 9월22일 기준 320명이었고 이 중 118명이 사망했다. 삼성반도체·LCD에서만 80명이 세상을 떠났다.
삼성 직업병 사태에 무보도로 일관하고 있는 조선일보는 지난 16일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IT제조 대기업들이 지난 1년간 국내에서 새롭게 늘린 일자리가 1만개”라고 보도했으며 27일 “삼성은 올해 인텔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로 등극했다”며 “이건희 회장을 빼놓고는 삼성의 성공 신화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맞다. 이 회장이 셀 수 없는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세우며 세계 최고가 됐다. 새롭게 늘어났다는 일자리에서는 노동자의 건강권이 보장될까. 정작 우리사회에 ‘인격’이 꼭 필요한 지점에선 인격이 실종되는 재벌 총수와 일등신문의 모습이 ‘구치소 미담’ 기사가 가리고 있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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