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체' 열풍? "어, 인정"

고희진 기자 입력 2017. 11. 26. 22:56 수정 2017. 11. 2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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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급식 먹는 10대들의 은어, 대중문화·광고 분야까지 파고들어
ㆍ이 정도 알면 나도…‘젊은 어른’ 되고픈 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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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중심으로 젊은층에서 유행하던 급식체가 사회 전반의 유행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식이다.

“인정? 어 인정 좌로 인정 우로 인정 앞구르기 인정 팩트 체크 들어가면 샘 오취리도 놀라서 에취하는 각이고요 오지고요 지리고요 고요한 밤이고요 인정 안 해서 후회한다면 후회할 시간을 후회하는 각이고요 인정하지 않는 사람 에바참치 넙치 꽁치 가문의 수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예각 둔각 사각 삼각 오각 이거레알 반박불가 빼박캔트 버벌진트 버켄스탁인 부분 쿵쿵따리 쿵쿵따 인정따리 인정따 동휘? 어~ 보검.”

단어 각각이 뜻을 갖는 게 아니라 어, 각, 치 같은 어미가 들어가는 말을 나열하면서 느낌을 강조하는 것이다. 긴 예문은 그냥 인정한다는 뜻이다.

급식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고 자막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예수는 오지신 분 (오지구요) 예수는 진리신 분 (진리구요) 그의 능력친 만랩’이라는 가사를 실은 CCM(현대교회음악) ‘오진 예수’도 발매됐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업들은 대중문화에 파고든 급식체를 활용해 젊은 소비자와 소통한다.

청소년을 비하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급식’ 명칭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기성세대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기도 했다. 수많은 대외 무대에서 웃는 모습을 포착하기 힘든 멜라니아에게서 환한 웃음을 이끌어낼 만큼 환호를 보낸 학생들을 지칭해 ‘급식 외교’가 통했다는 재치 있는 평가가 나왔다.

온라인상의 은어였던 급식체는 어떻게 기성세대와 주류문화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텔레비전 방송 시청률이 5%를 넘기 힘든 시대다. 젊은층의 관심에서 멀어진 매스미디어는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자의 역할보다 태동한 어떤 것을 키우고 전파하는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1인 방송의 인기 콘텐츠였던 먹방, 팟캐스트 인기 프로그램이던 <김생민의 영수증> 등이 지상파 방송으로 이동한 것이 단적인 예다. 급식체 역시 같은 흐름을 탔다. 소재 고갈을 겪던 케이블 채널 tvN <SNL 코리아 9>는 ‘급식체 특강’으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이제 다수의 케이블 방송은 자막과 출연진의 대화 속에서 급식체를 녹여내고 일부 지상파 방송에서도 급식체 표현이 종종 사용된다.

LG그룹은 최근 자사 페이스북에 ‘ㅇㅈ? 엘지? 어 엘지’라는 문구를 사용해 관심을 얻었다. 그룹 홍보담당자는 “고객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소셜미디어가 젊은층에 소구하는 채널이다보니 이 같은 문구를 사용하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 멤버스 커뮤니티에선 급식체를 활용해 질문한 고객에게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거문고 아리랑 고개를 넘는 제안사항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라는 급식체 답변으로 대응해 화제가 됐다.

■ ‘영포티’에서 ‘급여체’까지…젊어지고 싶은 어른들

최근 유행한 ‘영포티’라는 단어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현재의 40대, 즉 1970년대에 태어나 대중문화 융성기였던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비록 영포티 담론이 여성을 소외한다는 지적이 일며 논란이 되긴 했지만, 영포티가 주목하는 지점은 지금의 40대가 가진 젊은 혹은 젊어지고 싶은 감성에 있다. 급식체는 이 같은 감성을 자극했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보면 기성세대의 ‘급식체를 사용해 딸 혹은 조카와 대화를 했다’는 인증글이나, ‘나도 이 정도 급식체는 안다’는 식의 자랑글이 넘쳐난다. 급식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최근에는 급식체에 대응해 회사원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급여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성세대가 1020세대의 온라인 문화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사례다. 정지은 문화평론가는 “이는 청소년 문화를 이해하자는 접근이라기보다는 재미있으니 따라한다는 동조의 시선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급식체는 동의를 구하거나 놀람을 표현하기 위해 의미와 상관없는 다양한 말들을 리듬감을 살려 무한 반복하는 특징을 지닌다. ‘당근’ ‘헐’ ‘간지’처럼 하나의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인터넷 은어의 총합이라 정형화된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분, 각, ㅇㅈ(인정)’처럼 예전부터 유행하던 말을 넣어도 되고 ‘버벌진트, 샘오취리, 쿵쿵따’ 등 생각나는 말을 재미있게 엮어도 상관없다. 이런 확장성이 급식체를 즐기는 이들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했고, 누가 좀 더 긴 급식체를 유려하게 구사하느냐는 경쟁의 유희를 만들어냈다.

■ 재미와 의미 사이…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김교석 문화평론가는 “문화가 전파되는 방향이 바뀌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대중과 친근감을 형성할 수단을 찾는 콘텐츠 제작자들의 욕구와 이 같은 흐름이 맞물리면서 확산되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문제도 있다. 현재의 급식체 범주에는 일부 혐오표현이나 무분별한 욕설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앙 기모띠’다. 1인 방송 진행자가 사용해 유명해진 이 단어는 일본 포르노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뜻과 관계없이 어감이 주는 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빠르게 유통되고는 있지만, 연상되는 불쾌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비속어인 ‘씹’이라는 말도 상급이라는 뜻의 ‘ㅅㅌㅊ’(상타취), 하급이라는 뜻의 ‘ㅎㅌㅊ’(하타취) 등의 앞에 주로 붙어 ‘ㅆㅅㅌㅊ’ ‘ㅆㅎㅌㅊ’라는 식으로 사용된다. 이때 반복과 리듬이 주는 재미 때문에 단어가 가진 저속한 뜻은 쉽게 잊힌다. 이 때문에 급식체의 전방위 확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정태 칼럼니스트는 “온라인이나, 젊은 세대가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나름의 문화를 만드는 일은 당연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와 기성의 매체는 이런 상황과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사람이 자라면서 어릴 때 쓰던 말투를 버리고 어릴 때 놀던 것과는 다른 세계를 알아가야 하는데, 지금의 미디어에서 재연하는 사회 모습은 이에 역행하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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