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메르켈의 만남, 오래된 약속을 되살리다

이병한 역사학자 2017. 11. 2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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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기독교 민주주의 : 오래된 정원

[이병한 역사학자]

 

1. 예루살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기원을 그리스에서만 구하는 것도 적폐다. 고정관념이다. 20세기에 주조된 '발명된 전통'이다. 문화냉전의 소산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시민 전제'에 그쳤다. 얼추 인구의 10%, 참여하는 시민들이 전횡하는 체제였다. 중산층 민주주의는 당대의 현자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충격에 휩싸인 수제자 플라톤은 지중해세계를 배회했다. 돌아와 세운 것이 학당(아카데미)이다. 입만 나불대는 시민들을 철저하게 가르치려 했다. 소인(소피스트)들을 군자로 만들려고 했다. 만인을 철인(哲人)으로 만들고자 했다. 철인이 되고자 분발하는 성심이 없다면 시민민주는 거듭 독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인이 철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폴리스라면 추첨을 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즉 선거냐 추첨이냐는 사후적 방편이다. 민주주의를 자꾸 껍데기 차원에서 이해한다. 물론 제도개혁 백번 중요하다. 그러나 천 번 만 번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타는 목마름'이다. 그 갈증과 갈애의 원천이다. 민주주의의 육체만큼이나 영혼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혼이 담겨야 한다. 혼신을 다해야 한다. 정신이 나가면 육신은 즉각 작동을 멈춘다. 금방 썩는다. 그 민주의 영혼은 아테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지중해 마주 편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였다. '다른 민주주의'가 기독교로부터 발원하였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지상천국에 대한 염원이 민주의 진혼을 뒤흔든 것이다. 기독교는 서구의 민주주의 전통에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흔적을 남겼다. 천주를 닮은 민주, 그 원형적 기독교 공동체야말로 민주주의의 발원지였다. 너나를 가르지 않고 상하를 나누지 않고 빈부에 개의치 않고 남녀를 불문하면서 내외를 망라하여 만인과 만물이 하나님의 자녀로 우주의 뿌리를 공유하는 지상의 낙원이었다. 


주님이 주권자이시다. 유권자는 그 주권자의 뜻을 받드는 사도들이다.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계약을 말씀하신 바 없다. 하나님과 사람 간에, 신과 인간 사이 성-속 계약을 맺으셨다. 오래된 계약 구약도, 새로운 약조 신약도 사피엔스가 독점하는 사회계약이 아니었다. 인물과 동물과 식물과 광물, 제물(齊物)을 아우른 우주계약이었다. 만인과 만물, 모든 피조물의 행복과 안녕을 꾀하는 영원한 약속이었다. 그 하늘의 섭리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요, 사람의 길이었다. 하여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오만방자하다. 예수는 당시 인간 사회의 온갖 부정과 타락에 대하여 '신의 이름'(正名)으로 도전한 사람이다. 정명을 전파하는 메신저, 메시아였다. 선민의식에 빠져 민족의 이로움(利)만 따지는 이스라엘 왕을 호통 치며 오로지 주님의 의로움(義)만이 있을 뿐이라고 '신의 지배'(天命)를 역설하신 것이다. 고로 이상적인 왕은 안으로는 하나님, 밖으로는 임금님(內聖外王)이어야 했다. 안으로는 구도자여야 했으며, 밖으로는 구세군이어야 했다. 구도와 구세가 합작하야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래야 비로소 천리(天理)를 따르는 하느님의 아들, 천자(天子)를 자부할 수 있었다.

의로움과 이로움이 물과 기름이 아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모두의 이로움이 바로 의로움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일, 요즘말로 윈윈(Win-Win)이다. 그 의로운 하나님을 본받고자 하는 공동체에게 수여되는 신의 선물을 샬롬(太平)이라 일컬었다. 따라서 예수가 전도하신 자유와 해방은 근대적 자유주의의 그 얄팍한 수준을 훌쩍 넘어선다. 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신으로의 자유이다. 소유와 자유를 혼동해서는 아니 된다. 고로 자유 또한 고작 200년 자유주의의 소산이 아니다. 2000년을 능히 넘는다. 뿌리가 깊다. 거대하다. 심대하다. 예수 이래 사도들도 줄곧 자유를 추구해왔다.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와 일선을 긋는 태고의 자유주의이다. 그 이론적 완성자로 아우구스티누스를 꼽을 수 있다. '자유의지'라는 말을 가장 먼저 구사한 인물이다. 인성에 내재한 신성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였다. 자유의지의 궁극적인 발현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내 마음 가는 대로 해도 하늘의 이치, 신의 뜻과 어긋나지 않는 경지였다. 욕심을 부려도 양심에 부합하는 성화(聖化)에 이르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거룩한 마음이 바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시적인 마음이자 신적인 마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갈고 닦지 않는 사람들의 민주주의는 이판사판 아수라장이 된다. 연옥이 펼쳐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람을 신의 자리에 올린 근대적 자유주의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원죄를 망각하고 염치를 몰각한다. 계몽에 취했다. 이성에 홀렸다. 진보에 빠졌다. 깨어나야 한다. 각성해야 한다. 인간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의 악령을 추방해야 한다. 사람다운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딴 사람으로 진화해가는 것(天人合一)이 기독교적 "진보"이다.

그 담대한 이상과 원대한 포부를 밝힘으로써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리스의 우매한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에 독배를 내린데 이어, 이스라엘의 아둔한 민주주의가 예수를 속죄의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는 부활과 재림이라는 영생을 얻는다.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주열사가 된 것이다. 서구에서 '다른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예언자적 전통이 형성된 것이다. 이 메시아적 전통에 신비주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예언이 예언인 것은 보편적 진리의 설파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합당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태초의 말씀이자 최후의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예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고 하셨다. 삼위가 일체노라 하셨다. 내 안의 성령을 자각해야 한다. 내 안의 하늘님(人乃天)을 성성하게 모셔야 한다. 이 예언자적 비전이 시대를 거듭하며 다양한 혁명으로 분출한 것이다. 서구의 민주적 변혁을 추동했던 원동력이다. 가슴을 달구고 심장을 뛰게 하는 태고의 민주주의이다. 오래된 전통이자 끝없는 전통이다. 영생의 전통이다. 서구판 상고(尙古)주의이다. 20세기에도 변주되었다. (동)베를린은 2000년 전 베들레헴으로부터 변혁과 혁명의 영감을 얻었다. 예루살렘에서 구현되었던 야훼의 영광을 동독에서 다시금 구현하겠다는 자유의지가 '기독교 민주주의'를 촉발시킨 것이다. 금서였던 <성서>야말로 민주주의의 교본, 정본이었다.

▲ 베들레헴.ⓒ이병한



2. (동)베를린 : 성자들의 행진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것이 아니다. 동독의 혁명이 독일을 하나 되게 하였다. 혁명의 보루는 교회였다. 의회보다는 교회가, 정당보다는 성당이 민주주의의 산파였다. 1989년 민주화 운동에도 목사들이 전위에 섰다. 목자들이 지도자였다. 교회에서 예배부터 올리고 거리로 나섰다. 구도자가 구세군이 된 것이다. 역사의 반복이었다. 반세기 전 히틀러에 맞서 떨쳐 일어났던 '교회투쟁'의 연장선이었다. 나치독일이 패망한 1945년 동독 주민의 9할이 루터교 신자였다. 1948년 동/서독 루터파 교인들을 아우르는 '연방교회'가 설립되었다. 연방의회 이전에 연방교회부터 먼저 생겨난 것이다. 동독의 공산당 지도부는 연방교회가 탐탁지 않았다. 동독을 부정하고 독일 통일을 추구하는 이적단체로 간주했다. 즉 분단체제 극복의 최일선에 선 단체 또한 연방교회였다. 1961년 베를린에서 연방교회 대회가 열린다. 동/서를 막론하고 베를린의 신도들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동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기회가 되었다. 소련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음에 분노했다. 무신교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이천년 기독교 전통과 반천년 루터교 정통이 사라져 감에 분통을 터뜨렸다. 동독 지도부도 더 이상은 보고 둘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에 들어선 것이 바로 베를린 장벽이다. 즉 베를린 장벽은 동/서 이념 분단만의 소산이 아니었다. 성/속의 분단체제, 고/금의 분단체제를 상징했다. 과학과 신학의 분단이었으며, 이성과 영성의 분단이었다.


▲ 베를린의 루터파 교회.ⓒ이병한


동/서유럽 분단의 최전선에 자리한 동독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가장 철저하게 관철된 국가였다. 영성을 억누르고 전통을 말소시키고자 했다. 이성과 과학으로 중무장한 유물론 왕국을 건설코자 했다. 민중의 아편에 불과한 종교 따위는 불과 한 세대 만에 박멸될 것이라고 자신이 만만했다. 예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다. 루터가 죽어야 국가가 선다고 했다. 그 결과 지배층과 민중 간 아득한 거리가 생겨났다. 국가와 국민 사이, 공산당과 노동자 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의회와 교회 사이에 적대적 긴장이 시종 흘렀다. 과연 분단 이후 최초로 불거진 1953년 노동자 대봉기 또한 계급투쟁이 아니었다. 종교내전이었다. 성/속 갈등, 고/금 투쟁이었다. 소련군이 투입되어서야 간신히 진압되었다.

서독과 연계가 끊어진 동독의 8개 연방교회가 별도의 교회연맹을 결성한 것이 1969년이다. 서독에서 세속화의 극단으로 내달렸던 68혁명이 전개되고 있을 때, 동독에서는 교회가 주도하는 '다른 68혁명'이 가동된 것이다.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소련의 핵무기를 동독에 배치하는 결정을 내리자 반핵운동과 평화운동을 견인한 것 또한 교회연맹이었다. 동/서독을 공히 핵 기지로 만들고 있는 바르샤바조약기구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모두 비판하며 평화를 소망하는 철야 기도회도 1987년 이래 계속되었다. 나치시절을 연상시키는 재군국화, 동독의 재무장화에 결연히 반대한 것이다. 동독 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동독-소련 군사동맹을 철폐할 것을 요구한 것 또한 교회연맹이었다. 사회주의 국가 안의 교회라는 고난의 행군, 수난의 세월 끝에 기어코 동독 혁명을 완수해낸 것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을 허물고 서독으로 향하는 동독인들의 모습은 흡사 <성서>의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성자들의 행렬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세속주의자들의 눈에는 동/서 대결에서 서방이 승리한 '역사의 종언'이었다. 그러나 혁명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성/속과 고/금 대결에서 오래된 영성이 승리한 '역사의 귀환'이었다. 폭력에 대한 비폭력의 승리이자, 유물론에 대한 영성의 승리였으며, 과학에 대한 사랑의 승리였다. 즉 동독이 체제경쟁에 패배해서, 살림살이가 고단해져서 무너진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인식이야말로 동구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다. 개돼지 취급하는 것이다. 먹고 살만해도 공산당 치하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타는 목마름'은 굶주림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1990년 최초의 통일독일 총선에서 구동독 지역은 21명의 목사가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교회다운 교회와 의회다운 의회, 나라다운 나라가 공진화했다.

동독의 경험이 서독도 갱신시켰다. 68이래 서독의 신사회운동은 세속적 NGO들이 주도했다. 교회는 보수적이었다. 기독교민주당 또한 보수당이었다. 기득권의 보루였다. 구동독에서 생명력 넘치는 싱싱한 기운이 전파됨으로써 기독교 민주주의는 부활의 계기를 맞이한다. 수난과 고난을 돌파해낸 동독 교인들과 조우함으로써 기독교민주연합은 회춘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가 주도했던 동독 판 68혁명의 주역 가운데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도 있었다. 즉 메르켈은 공산국가에서 가학(家學)으로 '예루살렘 민주주의'를 계승했던 셈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만큼이나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을 열독한 여학생이었다. 그 루터파 목사의 딸이 독일의 수장이 되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식을 이끌었다. 기념사에서 유달리 추도한 20세기의 신학자가 한 명 있었다.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이다.

▲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wikipedia



3. 거대한 파국 : 뜻으로 본 역사

지난 세기말 독일을 배낭여행하며 읽은 책은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였다. 좌파 모던보이, 사민주의를 천착했다. 2017년 다시 찾은 독일 견문에서 손에 놓지 않은 책이 바로 트뢸취의 저작들이었다. 고금합작파, 기민주의에 심취했다. 1865년에 들어오셔서 1923년에 돌아가셨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 시대를 오롯이 살아간 분이다. 부국강병, 약육강식의 전성기였다. 18세기 이래 세속국가가 대약진했다. 반면으로 기독교 문화는 점진적으로 해체되었다. 트뢸취는 교조적 계몽주의자들이 선도하는 세속화 근본주의를 근심했다. '신은 죽었다.', 니체에 수긍하지도 않았다. 신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불사의 존재이다. 인간이 신에서 멀어졌을 뿐이다. 이를 '거대한 파국'이라 갈파했다. 기독교의 쇠퇴에서 '서구의 몰락'을 간파했다. 중심의 상실, 실체의 소멸, 가치의 진공상태, 언어의 의미부재를 걱정했다. 혼이 없는 인간들, 넋이 나간 사람들, 얼빠진 근대인을 우려했다. 구도자의 자세로 근대사회를 연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신학자라고 했다. 다른 쪽에서는 사학자라고도 했다. 동시대 랑케와 자웅을 다투었지만, 정통 역사학자로서 인정받지는 못했다. 역사를 이성의 발전으로 해석하는 제도권 진보사학에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녕 세속화=근대화로 말미암아 힘과 뜻이 분기하는 사태를 날카롭게 직시했다. 힘으로 쓴 역사보다는, 뜻으로 본 역사를 선호했다. '유사 역사학자'로 치부되어 백년이나 고독하신 것이다. 이제야 재발굴되고 재평가되고 있다. 부활하고 있다. 재림하고 있다. 기독교의 중흥과 유럽의 재생을 기획한 빛나는 선구자로서 족적을 기리고 있다. 


종교개혁을 되새겼다. 종교개혁의 본뜻이 종교의 약화에 있지 않았다. 세속화를 추진한 것이 아니건만, 종교에서 벗어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로 치닫고 말았다. 종교의 혁신이 아니라 종교로부터 이탈하고 만 것이다. 그럼으로써 종교개혁 또한 미완으로 그치고, 사회개혁 또한 균형이 깨지고 말았다. 무릇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다. 과도한 세속화가 현대사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했다. 성/속이 분화하고 힘/뜻이 갈라짐으로써 뜻 없는 힘이 횡행하게 된 것이다. 무신론이 만연하는 반면으로 물신주의가 팽배해진다. 개인과 국가와 상품을 물신화한다. 탈주술화가 주물 숭배로 귀결된 것이다. 신이 부재한 시대, 개인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신성의 부정은 곧 인성의 오해도 유발했다. 인성을 갈고 닦아 신성에 이르는 오래된 과업을 방기시켰다. 인격 도야를 망각한 채 인권 보장만 추앙하게 되었다. 인간의 신격화가 인권 만능주의이다. 자기 억제와 절제, 수련과 수양의 미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는다. 수도(修道)를 하지 않는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도 않으면서 권리만 챙기려 든다. 민주주의가 만개했다는 바이마르 공화국, 교회 없는 의회의 질주를 일찍이 경고하셨다. 복음 없는 복지도 근심하셨다. 복지국가와 복음국가가 더불어 가야 한다고 하셨다. 영적 서비스가 부재하면 물적 서비스를 탐닉한다. 양심 수련 없는 욕심 추구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성적 적자 끝에 국가 파산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예상하셨다. 독일의 임박한 파국도 예감했다. 기독교를 방기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가 독일정신의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 예언하셨다. 트뢸취가 눈 감은 지 9년 후에 히틀러가 집권(1933)한다. 유럽과 세계의 천하대란, 천벌이 내렸다.

4. 유럽연합 : 천주위공(天主爲公)

▲ 프랑스 메스의 성 쿠엔틴 성당에 안장된 슈만의 묘지와 EU 깃발. ⓒ이병한

신학자만 갈파했던 것이 아니다. 실학자도 일갈하셨다. 유럽통합의 아버지로 거론되는 로베르 슈만(1886~1963)이다. 프랑스 총리와 외무장관, 주미대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무엇보다 EU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이루어 EU의 항산을 다졌다. 


그러나 일국주의에 빠지기 십상인 민주주의만으로는 항심이 충분치 않다고 보았다. 유럽 문명의 근간인 기독교 정신이 반드시 유럽통합의 이념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물질개벽에 정신개벽도 수반되기 때문이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유럽통합은 공든 탑 마냥 무너질 것을 염려하셨다.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을 목도하며 묵상하고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몸소 정당을 창설하여 새 정치를 실험해보았다. 당명이 인상적이다. '가톨릭인민공화당'이었다. 공화당과 사회당이 보수/진보로 나뉘어 승자가 독식하는 세속주의 양당제를 돌파하는 성/속 합작의 원조였던 것이다. 그래야 퍽퍽하고 뻑뻑한 무기질 연합체가 아니라 맨들맨들하고 보들보들한 윤기가 흐르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의 영성을 재주입함으로써 말랑말랑하고 살랑살랑한 유기적 문명의 재활성화를 꾀한 것이다.


▲ 로베르 슈만 생가에 자리한 EU 창설의 아버지들의 동상.ⓒ이병한


그러나 탈냉전 이후에도 EU는 세속주의 일방으로 더욱 기울었다. 이익결사체에 머물 뿐 도덕공동체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각국 선거가 열릴 때마다 EU는 몸살을 앓는다. 결국 손해다 싶으면 탈퇴까지 감행한다. 내상이 깊다. 내부적으로 와해되고 있다. 여전히 사익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개인과 국민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천주위공(天主爲公)을 집합적 사표로 삼는 대장부들을 배양하지 못한 것이다. 유사(fake)대장부도 있다. 브뤼셀의 유로파 관료들과 금융자본가 등, 단일통화와 시장통합으로 이익을 극대화시킨 10% 상층 세력들이다. 이들은 오로지 경제적 합리화를 위한 법과 제도의 개선 등 기술적 측면에만 역점을 준다. '아테네 민주주의'만 숭상할 뿐, '예루살렘 민주주의'는 기각시킨다. 철학이 빈곤하다. 영성이 고갈되었다.


▲ 교황과 EU 국가 수장 회동. ⓒosservatoreromano.va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구세를 위해 친히 나셨다. 천명을 받들어 정명을 요청한다. 올해는 마침 로마조약 체결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EU 정상들과의 회동에서 따끔한 훈시를 내렸다. 이로움(민족주의, 포퓰리즘)만 따지지 말고 의로움에 충성하라 호통 치셨다.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없으면 EU는 죽고 말 것이라는 경고도 마다치 않았다. 오늘의 유럽은 가치의 공백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육체가 방향 감각을 잃고 앞을 볼 수 없으면 퇴행을 경험하고 사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틀리지 않은 말씀 같다. 지당하고 자명한 말씀이다. 어느새 성/속의 위상이 뒤바뀐 것도 같다. 2017년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는 총리와 대통령이 아니라 교황이다. 유권자들이 직접 뽑은 국가의 수장보다 주권자 주님의 뜻을 전파하는 교황의 메시지를 더욱 경청한다. 고로 <가디언>과 <르몽드>, <슈피겔>만 읽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바티칸이 발행하는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l'osservatore romano="">&gt;를 함께 읽으며 유럽을 다층적으로 살피는 편이 훨씬 이롭다. 좋은 기사와 논평이 참으로 많았다. 삐딱하고 뾰족해지기 쉬운 이성을 부드럽고 포근한 영성으로 매만지고 매조지는 기분 또한 그럴싸했다.

</l'osservatore>

<l'osservatore romano="">탈주술화가 재주술화로 역전된다는 말이 아니다. 탈세속화가 곧 신정의 복귀를 뜻하지도 않는다. 성이 속을 지배했던 중세도, 속이 성을 억눌렀던 근대도 균형이 상실된 시대였다. 부디 모 아니면 도의 사고를 버리자. 중용의 지혜를 취하자. 이성과 영성이 공진화할 수 있다. 이성이 내 밖의 세계를 향하는 시선이라면, 영성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눈길이다. 더 정확히 말하여 나의 안과 밖을 관통하는 총체적 시선이 영성이다. 지극한 이성이야말로 영성이라 할 것이다. 궁극의 합리가 곧 진리, 천리일 것이다. 브뤼셀과 바티칸이 성속합작에 의기투합하는 편이 구도와 구세를 위한 첩경일 것이다. 계몽과 계시가 대연정함으로써 기독교 민주주의, 그 오래된 약조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고로 프란치스코 교황과 메르켈 총리가 함께 있는 모습은 여러모로 상징적이었다. 신교와 구교의 연합이자 성/속의 결합을 담지 한다. 석 달 서유럽 견문, 줄곧 노트북의 바탕화면으로 삼았던 까닭이다.&nbsp;</l'osserva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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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과 메르켈 총리. ⓒosservatoreroma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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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servatore romano="">기독교 민주주의의 시각에서도 20세기는 '극단의 시대', 난세였다. 이 세계는 오로지 하나님의 공동체일 뿐이다. 그런 마음다짐과 몸가짐을 가져야 사익과 국익보다 공익을 우선한다. 천주위공의 태도를 배우고 익혀야 구원을 받고 은총을 입는다. 아테네만큼이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원기를 회복하고 근기를 다져야 한다. 뿌리를 상실함으로써, 모체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써 EU는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성, 그 타는 목마름을 되찾아야 한다. '천주 없는 민주'가 '천민 민주'로 급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금 기독교 민주주의는 길 잃은 어린 양 유럽의 탈출로, 출애굽이 되어줄 수 있다. 불가피한 과제라고 본다. 불가결한 과업이다. 모름지기 천지인은 불가분이 아닐 수 없다. 지하자원을 지상으로 끌어다 쓰는 구제의 길만큼이나, 천상자원과 지상을 연결시켜주었던 구원의 길에도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영구혁명, 영원한 혁명, 영생한 혁명, 유럽의 천명이다.

5. 에덴의 동쪽

아담과 이브 전에 에덴동산이 있었다. 하늘 천, 땅 지. 집 우, 집 주. 사람보다 먼저 천지와 우주가 자리했다. 오래된 정원이다. 그 태곳적 동산을 이상향으로 삼았던 문명이 서로마세계만도 아니다. 즉 기독교는 서로마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로마에는 또 다른 기독교 전통이 면면했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정통이라는 자부가 대단했다. 그래서 '정교'(正敎)라고 일컬었다. 정통 기독교(Orthodox Church)를 자처한 것이다. 그리스의 적통이자 그리스도의 후예를 자임한 것이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집약시킨 성/속 합작의 혁신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구축했다. </l'osserva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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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방정교세계를 체현했던 천년 제국 비잔티움을 계승한 것이 바로 러시아이다. 서로마와 동로마를 잇는 북로마라고도 하겠다. 공교롭게도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에 러시아를 견문하게 되었다. 여태껏 우파적 교조로 공산혁명을 폄하는 독법이나, 좌파적 도그마로 러시아 혁명을 떠받드는 해석 또한 누습이고 적폐이다. 러시아문명의 거대한 뿌리, 천년의 동방정교에 바탕하지 않는 백년의 혁명사는 가짜 역사이다. 모스크바는 비단 혁명도시로 그치지 않는다. 제2의 콘스탄티노플이자 제3의 로마이며 북방의 예루살렘, 성도(聖都)이다. '예루살렘 민주주의'의 맥락을 간과하면 20세기의 소련도 온전히 해명할 수가 없다. 이미 레닌 또한 더 이상 계급혁명을 완수한 공산주의 지도자로 기리지 않는다. 예수의 정신을 20세기에 실천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 성인(聖人)으로 섬긴다. 2017년 러시아 견문의 필독 가이드북 역시 <무엇을 할 것인가>(Что делать?)만큼이나 <성경>(Библия)이었다. 기왕이면 키릴문자로 새겨진 러시아어 성서를 장만하는 편이 좋겠다. 에덴의 동쪽으로 간다. 모스크바로 이동한다.</l'osserva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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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의 성경.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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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역사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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