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 스타 디자이너, 달항아리와 단색화에 빠지다

채민기 기자 2017. 11.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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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에베'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
서울서 열린 컬렉션 발표장에 한국 순백의 달항아리 함께 전시
"수백년 세월 빚은 순수함에 매료"

'명품'은 시대를 뛰어넘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고급 수입품을 뜻하는 그 명품이 아니다. 이를테면 조선 달항아리.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는 일제시대 한국을 찾았다가 달항아리에 반해 귀국길에 구입해 갔다. 2차대전 때 런던이 공습을 받자 항아리를 제자 도예가 루시 리(1902~1995)의 교외 집으로 옮겼다. 루시 리는 1989년 일본에서 연 첫 개인전 도록에 이 달항아리 옆에서 찍은 자기 사진을 실었다. 사진가 구본창은 이 사진에서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자 시리즈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최근 서울 성수동에서 열린 로에베의 2018년 봄·여름 컬렉션 전시장에서 만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 인도·모로코 등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의상 사이사이에 한국 달항아리를 함께 전시했다. /로에베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패션 디자이너로 꼽히는 북아일랜드 출신 조너선 앤더슨(33)도 이 사진을 이야기했다. 스페인 패션 브랜드 로에베(Loewe)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앤더슨은 지난 14일 서울 성수동 문화공간 레이어57에서 열린 내년 봄·여름시즌 로에베 컬렉션 발표회장에 달항아리를 함께 전시했다. 앤더슨은 "달항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루시 리의 그 사진에는 마법처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며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만들어왔다는 데서 순수함을 느꼈다"고 했다. 전시장에선 순백의 달항아리들, 파스텔톤의 로에베 의상들이 낡은 공장을 리모델링한 실내 분위기와 불협화음을 이뤘다. 그는 "이 행사를 만약 고급 호텔에서 열었다면 어딘가 가짜(fake)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앤더슨은 공예와 미술에 관심이 많다. 처음 한국에 온 그는 일정을 쪼개 한국의 갤러리와 공방(工房)들을 찾았다. 앤더슨은 "금속공예, 목공예, 도자기까지 두루 둘러봤고 특히 다반(茶盤)이 인상적이었다"며 "한국의 전통 공예에는 민속적이면서도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한국 단색화 1세대인 윤형근(1928 ~2007)의 발견도 방한의 수확으로 꼽았다. "리움미술관에서 윤형근의 작품을 보고 사진을 찍어뒀는데, 다른 갤러리에 가니 그의 다른 작품이 또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주 작은 사이즈였는데도 즉흥적인 생동감이 충만했습니다."

스물네 살 때인 2008년 런던패션위크에 데뷔했다. 본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 'JW앤더슨'을 이끌면서 남성복과 여성복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2015년 영국패션협회가 주관하는 브리티시패션어워드에서 올해의 남성복·여성복 디자이너 부문을 처음으로 동시에 수상했고, 올해 6월엔 세계 최대 남성복 박람회인 이탈리아 피티워모의 게스트 디자이너가 됐다. 한국에서도 9월 유니클로와 협업한 컬렉션이 출시 직후 매진되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2014년부터는 로에베의 디렉터를 맡았다. 역사 100년이 넘은 로에베는 가죽 제품을 중심으로 전통과 장인 정신을 강조해왔지만, 앤더슨의 지휘 아래 한층 젊은 감각으로 거듭나고 있다. 좌우 비대칭의 의상 재단, 안감 없이 뒤집어 사용할 수 있는 가방 디자인 등을 도입하며 로에베를 종합 패션 브랜드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는 "역사와 전통에만 매달리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앤더슨은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그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나의 디자인이 어떻게 다른지는 내가 평가할 수 없다"면서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한 번 내린 결정은 바꾸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패션계에선 그를 천재(genius)라고 평가하지만 앤더슨은 손사래를 쳤다. "저는 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일을 아주 많이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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