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증오로는 좋은 세상 못 만들어, 보수·진보 남 탓 그만해야
국토 망가진 뒤 통일되면 무슨 소용
이념의 낡은 틀 벗어나 새 생명 운동
밤에 가로등 켜지 않는 까닭
들깨, 불빛 너무 받으면 기름 대신 물
사람과 자연 함께 건강하자는 뜻
운동권 반세기 '쓴소리' 별명
누구도 당대에 새 세상 못 만들어
상대 이해해야 대화도 협상도 가능
━ 정성헌 DMZ 평화생명동산 이사장
그를 만나기 전 선입견이 약간 있었다. 지난 50여 년을 사회민주화 운동에 몸담아 왔고, 요즘에도 평화·생명·통일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래서 ‘운동권의 대부’ ‘운동권의 큰 어른’으로 불리기에 매우 딱딱하고 까다로울 줄 알았다. 정성헌(71)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다. 하지만 역시 선입견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 생활에서 우러난 쉬운 언어, 웃음 가득한 얼굴에 긴장했던 마음이 이내 풀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를 찾아간 날 마침 김장을 하고 있었다. 갓 버무린 배추김치에 윤기 흐르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늘 내세우는 게 밥과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중 기본이죠. 좋은 밥을 정성껏 대접하고, 말 제대로 하는 사람을 키우자고 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하죠.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거짓말은 그만하자는 겁니다.”
정 이사장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산다. 2008년부터 DMZ 아랫마을에서 생명과 통일을 향한 시민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12만㎡ 땅에 번듯한 교육관·식당을 차렸고, 태양광 발전 시설에 자체 농장도 갖췄다. 해마다 6500여 명이 찾는다. 107개국 외국인도 다녀갔다. 금강산 내금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곳에서 자동차로 3~4분만 가며 바로 민간인 통제선이다.
Q : 1998년 처음 구상하셨죠. A : “내년이면 만 20년이 됩니다. 터를 잡고, 집을 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교육시설 벽은 황토로 올렸고, 지붕에는 잔디를 덮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건강하자는 뜻입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생명 운동을 펼쳐야 할 때입니다.”
Q : 생명과 통일, 어떻게 연결되나요. A : “국토가 망가진 다음에 통일이 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2030년이 되면 충북 이북 지역이 준(準)사막으로 변한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생명운동은 우리 자신이 잘 살려고 하는 겁니다. 별난 게 아니지요. 솔직히 우리가 언제 나무나 동물을 생각하며 살았습니까.”
Q : DMZ 지척에 자리를 잡은 이유입니까. A : “이곳은 남북한 식물이 만나는 점이지대입니다. 종 다양성이 풍부하죠. 2000년에 이미 민통선 안에 100만㎡(30만 평) 지뢰생태공원과 30만㎡(9만 평) 연구실 부지를 잡아놓았습니다. 북한에도 같은 제안을 했는데, 여태껏 거절은 안 했으니 일단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웃음)
Q : 만화책 『2030 생명의 길』도 냈습니다. A : “지금까지의 제 경험을 모두 담았습니다. 물과 밥상이 살고, 우리 자식과 지렁이가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꿈입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안을 실었습니다.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둘째 권도 준비 중입니다. 농담이지만 생명평화당(가칭)을 만들어 공생경제와 교육개벽 공약을 제시할 겁니다.”
Q : 늘 절약, 절약을 강조합니다. A : “원전은 반대하면서 자기 집 전기를 흥청망청 쓰면 되겠습니까. 전국민이 20%만 절약해도 대략 1500만㎾를 줄일 수 있어요. 신고리 원전 5·6호기(각각 140만㎾) 10개보다 많은 양입니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국민 숙의를 거쳐 공사가 재개됐지만 전기 절약부터 꺼내야 했습니다. 탈원전만 강조하니 운동권 지도자 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Q : 대학 1학년부터 운동권 아니었나요. A : “1964년 한·일 정상회담에 반대하다 구속된 게 시작이었죠. 알려진 대로 이후 가톨릭 농민운동을 했고요. 어느덧 운동권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80년대 이후 생명에 눈을 떴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좌절이었죠.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공해 문제도 본격화했고요. 민주화·산업화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죽어가는 현실을, 현대문명의 반생명성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Q : 진영논리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데요. A : “요즘 적폐청산, 정치보복 논란이 거셉니다. 문 대통령이 민주화항쟁이 일어난 87년이면 87년, 국제통화위기가 발생한 97년이면 97년, 그렇게 적폐의 기점과 내용을 당당히 밝히고 미래 전망을 내놓았다면 더 큰 공감대를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러지 못하니 정치적 대립이 격화됐습니다.”
Q : ‘운동권 쓴소리’ 별명이 떠오릅니다. A : “누구도 당대에 새 세상을 만들지 못합니다. 기반을 닦을 뿐이죠. 예컨대 대자본의 횡포를 미워할지라도 자본가는 미워하면 안 됩니다. 증오로는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없어요.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해야 대화도, 협상도 가능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그런 훈련이 부족하니 화가 쌓이고 상대를 배척하게 됩니다. 젊은이들도 자기만 알게 됐고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육이 필수적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Q : 운동권 50여 년, 지치지 않았습니까. A : “거짓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거든요. 큰 일은 못 하더라고 작은 일은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교사로 42년3개월 재직한 아내에게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큰 수술 네 번, 구속 두 번, 벌금형 두 번, 수배 네 번, 순탄치 못했던 저를 지켜봤으니까요. 시간 나면 다시 놀러 오세요. 맛있는 밥은 언제나 줄 수 있습니다.”(웃음)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 [S BOX] 집에선 TV 안 켜고, 10년간 세탁기 한 번이나 썼는지 몰라요
정 이사장은 평소 얼마나 아끼며 살까. 그는 “지난 10년간 세탁기를 한 번이나 썼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든 걸 손빨래로 해결한다. 설거지할 때도 물을 조금 받아 한꺼번에 헹군다. 쓰지 않는 전기 스위치를 내리는 건 기본, 2008년 평화생명동산에 들어오며 장만한 TV 포장지는 아직도 뜯지 않았다. 꼭 시청할 게 있으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본다. 올여름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보내준 선풍기도 상자째 거실에 놓여 있다. 음식물 쓰레기도 없다. 먹고 남은 것은 100% 밭으로 들어간다.
“어려울 게 없습니다. 미래는 다가오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죠. 독일인과 2주 정도 함께 산 적이 있는데 ‘딱 우리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우리가 많이 쓰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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