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사람 풍경] 증오로는 좋은 세상 못 만들어, 보수·진보 남 탓 그만해야

박정호 2017. 11. 2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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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서 생명교육 10년
국토 망가진 뒤 통일되면 무슨 소용
이념의 낡은 틀 벗어나 새 생명 운동
밤에 가로등 켜지 않는 까닭
들깨, 불빛 너무 받으면 기름 대신 물
사람과 자연 함께 건강하자는 뜻
운동권 반세기 '쓴소리' 별명
누구도 당대에 새 세상 못 만들어
상대 이해해야 대화도 협상도 가능

━ 정성헌 DMZ 평화생명동산 이사장

정성헌 이사장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했다.’국내 3만6000여 마을 가운데 제대로 된 회의록을 쓰는 곳이 1%도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 사람 운동은 잘하는데 인간성은 틀려먹었다고 하면 결국 다 실패한 겁니다. 무엇보다 자신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자기변화와 사회변화가 함께 가도록 노력해야 해요. 그래야 좋은 운동이 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 선입견이 약간 있었다. 지난 50여 년을 사회민주화 운동에 몸담아 왔고, 요즘에도 평화·생명·통일운동을 펼치고 있는, 그래서 ‘운동권의 대부’ ‘운동권의 큰 어른’으로 불리기에 매우 딱딱하고 까다로울 줄 알았다. 정성헌(71)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다. 하지만 역시 선입견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말투, 생활에서 우러난 쉬운 언어, 웃음 가득한 얼굴에 긴장했던 마음이 이내 풀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를 찾아간 날 마침 김장을 하고 있었다. 갓 버무린 배추김치에 윤기 흐르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늘 내세우는 게 밥과 말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중 기본이죠. 좋은 밥을 정성껏 대접하고, 말 제대로 하는 사람을 키우자고 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단순하죠.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거짓말은 그만하자는 겁니다.”

정 이사장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에 산다. 2008년부터 DMZ 아랫마을에서 생명과 통일을 향한 시민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12만㎡ 땅에 번듯한 교육관·식당을 차렸고, 태양광 발전 시설에 자체 농장도 갖췄다. 해마다 6500여 명이 찾는다. 107개국 외국인도 다녀갔다. 금강산 내금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곳에서 자동차로 3~4분만 가며 바로 민간인 통제선이다.

Q : 1998년 처음 구상하셨죠. A : “내년이면 만 20년이 됩니다. 터를 잡고, 집을 짓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교육시설 벽은 황토로 올렸고, 지붕에는 잔디를 덮었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건강하자는 뜻입니다. 보수와 진보라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새생명 운동을 펼쳐야 할 때입니다.”

Q : 생명, 매우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A : “아닙니다. 너무나 실질적입니다. 생명에 이롭게 하자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곳엔 가로등을 거의 켜지 않습니다. 풀과 벌레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거든요. 제가 농사를 지어봐서 압니다. 환한 가로등 아래 들깨를 심으면 기름 대신 물만 나옵니다.”
강원도 인제군 서하면에 자리한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정경. 정성헌 이사장과 건축가 승효상씨가 ‘단절과 소통’을 주제로 설계했다. 교육시설·풍류마당·농장 등을 갖췄다.

Q : 생명과 통일, 어떻게 연결되나요. A : “국토가 망가진 다음에 통일이 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2030년이 되면 충북 이북 지역이 준(準)사막으로 변한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생명운동은 우리 자신이 잘 살려고 하는 겁니다. 별난 게 아니지요. 솔직히 우리가 언제 나무나 동물을 생각하며 살았습니까.”

Q : DMZ 지척에 자리를 잡은 이유입니까. A : “이곳은 남북한 식물이 만나는 점이지대입니다. 종 다양성이 풍부하죠. 2000년에 이미 민통선 안에 100만㎡(30만 평) 지뢰생태공원과 30만㎡(9만 평) 연구실 부지를 잡아놓았습니다. 북한에도 같은 제안을 했는데, 여태껏 거절은 안 했으니 일단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웃음)

Q : DMZ가 생명의 보고라고 합니다. A : “그 말부터 거짓입니다. 남북한 군대가 생태계를 많이 파괴했어요. 생태계 특이지대이지 보고는 아닙니다. DMZ를 명예퇴직시켜야 한다고 말해 온 배경입니다. 민통선 지역은 상대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합니다. 군인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죠. 제대로 된 조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동산 안에 있는 탱크 설치물. 주변 12사단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되는 염원을 담았다.

Q : 만화책 『2030 생명의 길』도 냈습니다. A : “지금까지의 제 경험을 모두 담았습니다. 물과 밥상이 살고, 우리 자식과 지렁이가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꿈입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방안을 실었습니다. 내년 지방선거에 맞춰 둘째 권도 준비 중입니다. 농담이지만 생명평화당(가칭)을 만들어 공생경제와 교육개벽 공약을 제시할 겁니다.”

Q : 늘 절약, 절약을 강조합니다. A : “원전은 반대하면서 자기 집 전기를 흥청망청 쓰면 되겠습니까. 전국민이 20%만 절약해도 대략 1500만㎾를 줄일 수 있어요. 신고리 원전 5·6호기(각각 140만㎾) 10개보다 많은 양입니다. 이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도 있다고 봅니다. 국민 숙의를 거쳐 공사가 재개됐지만 전기 절약부터 꺼내야 했습니다. 탈원전만 강조하니 운동권 지도자 같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Q : 대학 1학년부터 운동권 아니었나요. A : “1964년 한·일 정상회담에 반대하다 구속된 게 시작이었죠. 알려진 대로 이후 가톨릭 농민운동을 했고요. 어느덧 운동권 반세기가 지났습니다. 80년대 이후 생명에 눈을 떴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엄청난 충격과 좌절이었죠.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공해 문제도 본격화했고요. 민주화·산업화도 중요하지만 생명이 죽어가는 현실을, 현대문명의 반생명성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Q : 주변의 비판도 컸을 것 같습니다. A : “운동권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말해 왔으니까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남 탓을 하며 살아야겠습니까. 아직도 극우는 북한 탓만, 극좌는 미국 탓만, 보통 사람은 정치 탓만 하고 있잖아요. 못난 사람들이죠.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겠다’ ‘함께 살아보자’ ‘생태공동체에 도움이 되자’, 그런 큰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동산 안에 있는 탱크 설치물. 주변 12사단에서 기증받은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되는 염원을 담았다.

Q : 진영논리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데요. A : “요즘 적폐청산, 정치보복 논란이 거셉니다. 문 대통령이 민주화항쟁이 일어난 87년이면 87년, 국제통화위기가 발생한 97년이면 97년, 그렇게 적폐의 기점과 내용을 당당히 밝히고 미래 전망을 내놓았다면 더 큰 공감대를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러지 못하니 정치적 대립이 격화됐습니다.”

Q : ‘운동권 쓴소리’ 별명이 떠오릅니다. A : “누구도 당대에 새 세상을 만들지 못합니다. 기반을 닦을 뿐이죠. 예컨대 대자본의 횡포를 미워할지라도 자본가는 미워하면 안 됩니다. 증오로는 세상을 좋게 바꿀 수 없어요.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해야 대화도, 협상도 가능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그런 훈련이 부족하니 화가 쌓이고 상대를 배척하게 됩니다. 젊은이들도 자기만 알게 됐고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교육이 필수적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Q : 운동권 50여 년, 지치지 않았습니까. A : “거짓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만두고 싶은 때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거든요. 큰 일은 못 하더라고 작은 일은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교사로 42년3개월 재직한 아내에게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큰 수술 네 번, 구속 두 번, 벌금형 두 번, 수배 네 번, 순탄치 못했던 저를 지켜봤으니까요. 시간 나면 다시 놀러 오세요. 맛있는 밥은 언제나 줄 수 있습니다.”(웃음)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 [S BOX] 집에선 TV 안 켜고, 10년간 세탁기 한 번이나 썼는지 몰라요

생명의 길
정성헌 이사장은 『2030 생명의 길』에서 “나 자신부터 열을 낮추자”고 말한다. 온난화로 신음하는 지구를 되살리는 길을 안내한다. 쉽게 말해 “불을 줄여 온실가스를 낮추고, 물을 아껴 어려운 때를 대비하자”고 권한다. 지난해 한국 성인은 평균 커피 413잔을 마셨는데, 생산부터 소비까지 이만 한 커피를 즐기려면 1인당 5만6944L의 물이 필요하다는 통계치도 꺼내 든다.

정 이사장은 평소 얼마나 아끼며 살까. 그는 “지난 10년간 세탁기를 한 번이나 썼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든 걸 손빨래로 해결한다. 설거지할 때도 물을 조금 받아 한꺼번에 헹군다. 쓰지 않는 전기 스위치를 내리는 건 기본, 2008년 평화생명동산에 들어오며 장만한 TV 포장지는 아직도 뜯지 않았다. 꼭 시청할 게 있으면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본다. 올여름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보내준 선풍기도 상자째 거실에 놓여 있다. 음식물 쓰레기도 없다. 먹고 남은 것은 100% 밭으로 들어간다.

“어려울 게 없습니다. 미래는 다가오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죠. 독일인과 2주 정도 함께 산 적이 있는데 ‘딱 우리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그만큼 우리가 많이 쓰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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