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검술보다 스펙터클했던 영조의 반란 진압술

김종성 입력 2017. 11. 2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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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으로 역사읽기] 영화 <역모: 반란의 시대> 와 실제의 역사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역모: 반란의 시대>.
ⓒ (주)스톰픽쳐스코리아
23일 개봉한 영화 <역모: 반란의 시대>는 영조 임금의 집권 4주년을 배경으로 한다. 1728년 발생한 이인좌 반란(이른바 '이인좌의 난')을 모티브로 상상력을 '듬뿍' 발휘한 영화다.

영조는 서인당의 분파인 노론당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됐다. 서인당의 또 다른 분파인 소론당의 지원을 받는 경종(장희빈 아들)이 집권 4년 만에 죽자, 이복동생 영조가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인좌는 동인당의 분파인 남인당에 속했다. 그는 남인당과 소론당의 지지를 배경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소론당은 서인당의 분파라는 면에서는 노론당과 같은 편이지만, 정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론당과 원수지간이 됐다. 그래서 남인당과 합세해 영조 정권에 맞섰던 것이다. 영조는 즉위 초부터 사색당파의 탕평을 추구했지만, 이렇게 집권 4년 만에 두 당파가 이인좌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이인좌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는 소문을 이용해 반군을 조직한 뒤 청주성을 점령했다. 반란은 충청도뿐 아니라 전라·경상도에서도 호응을 얻었다. 경상도에서는 반군이 합천을 포함한 4개 지역을 점령했다. 전라도에서는 실제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반군이 형성되는 단계까지는 나아갔다.

이인좌는 청주성 점령을 발판으로 한양 쪽으로 북상했다. 하지만 경기도 안성과 죽산에서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도주한 이인좌는 죽산에서 주민들한테 붙잡혀 토벌군에 인계된 뒤, 한양에서 영조의 친국(직접 심문)을 받고 처형됐다.

영화 <역모>는 상상력을 활용해 실제 역사에 변화를 가했다. 의금부 감옥에 수감돼 있던 이인좌(김지훈 분)가 어영청 부대에 속한 5인방 무사집단의 도움으로 탈옥한 뒤 대궐에 침투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게 이 영화의 설정이다.

영화 속의 영조는 의금부에 수감된 이인좌의 음모를 사전에 감지한다. 그래서 내금위(경호실) 경호원인 김호(정해인 분)을 일부러 의금부 포졸로 좌천시킨 뒤, 김호를 앞세워 이인좌와 어영청 5인방의 도발을 막아낸다.

영화에서는 김호와 어영청 5인방의 무술 대결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토벌군과 반군의 전투로 기억되는 이인좌 반란의 이미지를 김호와 5인방의 무술 대결로 바꾼 것이다.

실제의 이인좌 반란에서는 영화 같은 화려한 검술은 없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것이 있었다. 영조의 반란 진압 방식이다. 영조의 반란 '진압술'은 영화 속의 검술·무술 못지않게 화려했다. 그만큼 '스펙터클'했다. 위험하고 대담했다.

 영조의 무덤인 원릉.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에 있다.
ⓒ 김종성
영조가 즉위할 당시의 상황은 문재인 대통령이 금년 5월 10일 직무를 개시할 때와 비슷했다. 문 대통령이 영조와 비슷한 인물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취임 당시 상황이 비슷했다는 의미다. 

소론당과 함께 정국을 운영하던 경종이 병사한 뒤에 임금이 됐으므로, 즉위 일자인 1724년 10월 16일(음력 8월 30일)의 영조는 소론당 '장차관'들 틈에서 직무를 개시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당 '국무위원들' 속에서 회의를 주재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영조가 그 상황을 벗어난 것은 1725년 봄이었다. 영조의 지지기반인 노론당이 이때 정권을 획득했다. 노론당의 집권은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경종시대 청산작업 속에 이루어졌다. 경종은 영조 못지않게 훌륭한 군주였지만, 경종 시대에는 소론당과 노론당의 정쟁이 매우 격렬했다.

이로 인해 노론당 인사들이 숙청되는 신축옥사·임인옥사 같은 사건이 있었다.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합쳐 신임옥사 혹은 신임사화라 부른다. 신임옥사에 한을 품은 노론당이 영조 즉위 뒤에 복수를 추진한 끝에 1725년 봄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1725년 그 해부터 반란의 움직임이 꿈틀했다. 1728년에 이인좌 반란에 가담할 세력이 이때부터 정권전복 음모에 착수한 것이다. 그런데 돌발 사건이 발생했다. 1727년에 정미환국이란 정권교체가 돌출한 것이다.

노론당의 과도한 정치보복에 제동을 걸고자 영조가 소론당 중심으로 정권을 꾸린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소론당 강경파가 남인당과 함께 은밀하게 반란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영조가 소론당 온건파와 함께 새로운 정권을 출범시킨 것이다. 1728년의 이인좌는 이처럼 애매한 상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소론당이 남인당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니, 웬만한 군주라면 소론당을 신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영조는 과감한 결단을 보여주었다.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당 인사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표시한 것이다.

영조는 이광좌를 내세워 수도 한성을 방위하도록 하는 한편, 반란세력과 연루된 인물들을 색출·체포하도록 했다. 동시에 소론당 출신인 오명항을 토벌대 사령관에 임명하고 이인좌와 직접 맞붙도록 했다.

 영화 <역모 : 반란의 시대>의 한 장면
ⓒ (주)스톰픽쳐스코리아
정권을 소론당에 넘긴 상태에서 반란이 발생했으므로, 소론당과 함께 대책본부를 꾸리는 것은 부득이했다. 그런 처지를 감안하더라도, 소론당에 대한 무한신뢰를 표시한 영조의 태도는 대단하다. 언제라도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노론당 쪽에 눈길을 돌릴 만도 했지만, 그는 소론당 정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인좌 처치를 맡겼다.

이로 인해 이인좌 반란은, 소론당 강경파와 남인당이 소론당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대해 소론당 정권이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는 형국으로 진행됐다. 이인좌의 입장만 모호해진 것이다. 결국 이인좌는 같은 당파인 오명항이 이끄는 부대에 패배해 영조 앞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영조는 소론당이 반기를 든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소론당 정권에 신임을 보내는 결단을 보였고, 이것은 청주성을 함락할 정도의 막강한 기세를 보인 이인좌 반군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역모> 속의 영조가 의금부에 갇힌 이인좌의 역모를 의금부 포졸을 이용해 좌절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대담한 방법으로 영조는 반란세력을 와해시켰다.

이인좌 반란은 노론당의 지지로 등극한 영조를 소론당이 지지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노론당 이외의 당파들도 영조를 신뢰하고 탕평정치에 가담할 수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영조는 한국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탕평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역모>의 부제는 '반란의 시대'다. 영조는 이인좌 역모를 계기로 조선을 '반란의 시대'가 아닌 '탕평의 시대'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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