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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Weekend Interview] 연기자로 54년…한국드라마의 산 증인 김용림

허연 기자
입력 : 
2017-11-24 15:43:22
수정 : 
2017-11-24 17: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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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늙으려 발버둥치는 그런 배우들 보기 안좋아…인기 연연하면 무너져요
"엄마가 주제인 토크쇼 안 나가…말하다 펑펑 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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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저녁상을 물리고 볼 수 있는 가족드라마가 사라진 게 아쉬워요". 54년 차 TV 연기자로 외길을 걸어온 김용림 씨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근린공원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재훈 기자]
"이 나이에도 석양이 지면 어머니 생각이 나." 인터뷰 장소였던 강남구 압구정동 카페 창으로 노을이 내리자 탤런트 김용림(77)은 눈물을 글썽였다. 일찍 혼자돼서 자신을 키운 어머니, 더 나아가 이 세상 모든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로서 한 생을 살아온 자기 자신의 모성에게 바치는 연민이었다.

그렇다. 그는 국민 어머니였다. 긴 세월 동안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우리를 안아주었던 국민 어머니였다.

김용림의 연기생활은 그 자체로 한국 TV 드라마의 역사다. 그는 1964년 한운사 원작 TBC 드라마 '눈이 내리는데'서 여사무원 역할을 맡아 드라마에 데뷔했다. 이 드라마는 한국 최초 일일드라마였다. 그 후로 54년. 그는 연기자로서 외길을 걸었다. 단 한 순간도 드라마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힘주어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서 사는 삶을 선택할 것"이라고.

그를 실제로 만난 순간 깜짝 놀랐다. 도저히 나이가 믿겨지지 않았다. 큰 키에 반듯한 자세, 반짝이는 총기, 단 한마디도 허투로 버리지 않는 말솜씨까지 그는 청춘의 한복판에 있는 듯 보였다.

―처음에 어떤 계기로 방송인이 되셨나. ▷배화여고 재학시절 연극반이었다. 당시 배화여고 연극반은 연극경연대회에 나가면 늘 상을 타는 실력파들이 많았다. 연극반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쪽일에 관심이 생겼다. 졸업 후 1961년 KBS 성우 공채 4기로 입사했다. 경쟁률이 몇 천 대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는 TV가 없던 시절이니 성우가 곧 연기자였다.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오빠들이 집안의 어른이었는데 우리 가문에 돌연변이 나왔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내가 고집을 부리니 할 수 없이 허락을 했다.

―집안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신다면.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궁정동 명륜동 돈암동 등에서 살았다. 6남매의 막내딸이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14살 때 돌아가셨다. 오빠들은 모두 엘리트들이었다.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내 우상이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아버지는 중절모에 캐시미어 망토를 입고, 카이저 수염을 기르고 다니셨다. 타고난 예인이셨다. 내가 아버지의 끼를 물려받은 것 같다. 키가 큰 것도 아버지를 닮아서다.

―본격적으로 TV드라마를 하신 건 언제부터였나. ▷성우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다가 TV가 개국을 했다. 한국에서 일일드라마가 처음 시작된 게 1964년이었는데 '눈이 내리는데'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으로 TV 데뷔를 했다. 당시에는 방송인 한 명이 여러 가지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 명이 성우, 탤런트는 물론이고 연극배우와 외화 더빙까지 했다. 외화 '아이러브 루시'의 여주인공 더빙도 내가 했다.

TV 드라마에만 전념한 건 1960년대 후반 TBC가 운현궁 스튜디오를 만들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후 1970년대 초반 '장희빈'에 출연하면서 MBC로 옮겨갔다. 그 이후 죽 MBC에서 활동하다 1991년 SBS가 개국하면서 옮겼다. 그러다 프리랜서가 됐다.

―한국 드라마 1세대셨네요. 드라마 총 몇 편에 출연하셨는지. ▷정통 텔레비전 연기자로서 나보다 선배는 없었다. 황정순 정애란 선배가 있으셨는데 영화가 본업인 분들이었다. 드라마를 같이 시작한 동료들은 대부분 남자였고 여자는 거의 없었다. 드라마 편수는 50년 넘게 하다보니 셀 수가 없다. 대략 계산해보면 최소 100편은 될 것 같다. 1년에 평균 2편씩 쉬지 않고 했으니. 지금은 MBN '동치미'만 하면서 드라마는 8개월째 쉬고 있다. 처음이다 온전히 나를 위해 휴식을 하는 건.

―긴 세월인데 슬럼프는 없었는지. ▷슬럼프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일만 했다. 운이 좋았다. 늘 나를 찾아주는 감독과 작가가 있었고 역할이 있었다. 작품이 끊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능력이 있다 해도 배역이 안 주어지는 배우는 불행하다. 그러니 난 얼마나 행복한가.

―일만 했다니 가족들은 싫어했을 수도 있겠네요.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다. 언젠가 아들(배우 남성진)이 쇼프로에 나와서 "어렸을 때 학교 앞 문방구 아주머니가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젊었을 때는 그걸 몰랐다. 소풍이나 운동회 한 번 따라간 적이 없었다. 남편(남일우)도 배우니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이 떼어놓고 울면서 방송국에 간 적도 많았다. 요즘이야 엄마가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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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나온 김에 남편(남일우)은 어떻게 만나셨는지. ▷성우시절 KBS 바로 윗기수 선배였다. 유난히 눈에 띄었다. 패셔너블하고 예쁘장한 사람이 늘 과묵했다. 남산 KBS 등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호감이 갔다. 처음엔 나하고는 말도 안하길래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양산이나 뜨개질 가방 같은 내 소지품이 종종 없어졌는데 남일우 씨가 감춰놓고 장난을 친 거였다. 그러면서 친해졌는데 만날 때마다 남산에서 돈암동 집까지 날 데려다줬다. 그때 내가 다리에 마비가 와서 거의 1년을 침을 맞으러 다녔는데 그때도 늘 함께 가줬다.

어느날 뜬금없이 "달을 보면서 용림씨와 같은 공간에서 달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라고 했다. 아마 그게 프로포즈였던것 같다.

―배우하고 결혼한다고 하니 집에서 또 반대했을 것 같은데. ▷당연히 반대했다. 남일우 씨는 당시 장위동에 살았는데 논두렁길이 있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아마 어머니가 몰래 그 집에 가보셨던 것 같다. 가난하고 안정되지 못한 직업인데다 외아들이라고 반대하셨다. 그래도 둘이 벌어서 잘 살겠다고 맹세를 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남편과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면 불편했을텐데. ▷난 30살에도 어머니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남일우 씨는 앳되고 젊은 역할을 많이 했다. 결혼하고 나서 2년쯤 지나서 KBS '세종대왕'을 했는데. 남일우 씨가 세종이었고 내가 어머니 원경왕후였다. 처음에는 안한다고 했는데 이은성 작가가 무조건 내가 원경왕후를 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했다. 남편이 나를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장면이 많았는데 스태프들이 그때마다 웃어서 엔지(NG)가 나기도 했다.

―사극을 많이 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사극이 매력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사극 분야에 좋은 작가들이 참 많았다. 이은성 신봉승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었다. 사극은 일단 대사가 어렵다. 지금 안 쓰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장이나 의상도 무겁고 힘들다. 난 다행히 최소 중전 이상 역할을 많이 해서 덜 힘들었다. 주로 앉아서 연기하는 시간이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도 기억에 남고, 1985년 내게 상이란 상을 다 가져다 준 '억새풀'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사랑과 야망' '청춘의 덫' '신부일기'가 생각난다. '인생은 아름다워'도 잊지 못할 드라마다. 사투리 써가면서 제주도 아주머니 역할을 했다. 현대극은 역시 김수현 씨 작품이 기억이 많이 난다.

―작가 김수현의 매력은 뭔가요. ▷나는 김수현을 국보라고 생각한다. 우선 어려운 말을 안 쓴다. 그냥 일상어를 쓰는데 언어의 마술사라 그런지 그게 방송에만 나오면 특별해진다. 어려운 주제도 아니고 우리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쓴다. 그런데 김수현을 거치면 마당을 쓰는 장면도 특별해진다. 실제로 연기를 하면서 순간순간 감동할 수밖에 없다. 늙지 말고 영원히 글 쓰셨으면 좋겠다.

―동료 연기자 중 최고 배우는. ▷박근형 씨가 참 좋은 배우다. 상대에게서 눈동자를 떼지 않는다. 상대 배우와 호흡을 정말 잘 맞추는 배우다. 눈을 봐야 감정을 읽을 수 있고 그 다음 연기가 나오는 법인데 그걸 잘 한다. 그런 좋은 배우가 TV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건 불행한 일이다.

―한때 드라마를 풍미했던 대배우들을 요즘 보기 힘든 이유는 뭔가요. ▷요즘 드라마는 일단 대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로 구성된 가족이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나이든 대배우들 역할이 없다. 요즘에는 이상하게 드라마에 결손가정이 많이 나온다. 또 이야기 흐름도 젊은 사람들 중심이다. 시대흐름이 가장 큰 원인이겠고 제작비, 시청률 등도 원인이겠지만 가족 드라마가 사라진 건 심각한 문제다. 가족들이 저녁상 물리고 함께 볼 드라마가 없는 건 기형적이다.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봐도 부끄럽지 않은 드라마가 필요하다. 일반 시청자들, 특히 나이가 좀 있는 시청자들이 볼 드라마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들을 위로하는 이야기도 없는 것이다. 드라마 한 편이 서민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는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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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어머니 연기를 해온 김용림 씨는 "지금도 석양을 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재훈 기자]
―요즘 배우들 연기를 어떻게 보시는지. ▷예전에는 무대연극에서 기본기를 다진 배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드물다. 시스템이 달라졌다. 모든 게 아이돌 중심으로 흘러간다. 오로지 신인을 키우는 데만 주력하다 보니 작품이 점점 뒤로 밀려난다. 작품 중심이 아니라 주연배우 중심으로 모든 게 흘러간다. 요즘엔 탤런트 공채도 하지 않는다. 제작사에서 미는 배우가 주연이 되고, 작품은 그 배우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드라마가 퇴보하고 있다. 답보도 아니고 퇴보다. 배우들의 문화도 많이 달라졌다. 선배들에게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각자도생이다. 요즘엔 드라마도 영화 찍듯이 파트별로 찍기 때문에 자기 나오는 장면만 찍고 그냥 사라진다. 협업이라는 느낌이 안 든다. 편한 후배라고 생각되는 배우는 최명길·고두심 세대까지다. 그 밑으로는 아무래도 어렵다.

―연기철학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이들이 도대체 작품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내면연기가 잘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요즘 배우들은 너무 다 비슷하다. 나도 구별을 못 할 때가 많다. 성형 때문인지는 몰라도 개성과 성격이 다 사라졌다. 드라마에서 필요로 하는 건 연기지 예쁜 얼굴이 아니다. 배우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인공적인 팽팽한 얼굴보다 배우의 주름이 더욱 멋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요즘 MBN '동치미'에 출연 중이신데 드라마와는 어떻게 다른지. ▷색다른 재미가 있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출연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하는 것이다. 토크쇼는 내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 너무 진지한 이야기만 하다 나올 것 같아서 사양했는데, 막상 해보니 내 역할이 있었다. 한 방송 장르를 대표하는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서 늘 보람이 있다.

―배우로서 인생이 가장 의미 있을 때는. ▷역시 시청자들이 반가워해 줄 때다. 길을 가는데 팔을 붙잡고 연기 잘 보고 있다고 할 때 문득문득 고맙다. 그럴 때면 내가 인생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에 남는 팬은. ▷어머니 역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남자들이 날 많이 좋아했다. 그리고 같은 엄마들도 좋아한다. 날 괴롭힌 팬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1977년 '후회합니다'라는 드라마를 했다. 김혜자·박근형이 부부로 나오고 내가 엄한 시어머니 역을 했다. 엄청난 인기 드라마였는데 내가 목소리를 착 가라앉혀서 '가회동입니다'고 전화를 받으면 장안이 조용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때 처음으로 브리샤 승용차를 샀는데 어떤 시청자가 차에 돌팔매질해서 차가 부서졌다. 며느리를 괴롭히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그때 난 오히려 기뻤다. 내가 얼마나 연기를 잘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보내는 팬도 물론 고맙지만 그런 팬들도 고마웠다.

―좋은 어머니는 어떤 어머니인가요. ▷어머니에 정답은 없다. 엄마라는 단어는 그것만으로도 좋지 않나. 듣는 것만으로도 콧등이 시큰한 이름. 희생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 엄마다. 지금 내가 내일 모레 80세인데도 석양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내가 43세 때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세실극장에서 연극 '홍당무'를 할 때였다. 펑펑 울다가 무대에 올라가서는 웃어야 했다. 방송국에서 엄마 관련 토크 프로그램을 하자는 제안을 몇 번 받았는데 안 한다고 했다. 눈물이 나서 못 할 것 같았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나요. ▷배우는 나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일단 연출자나 작가가 선택해줘야 하고, 다른 배우와 호흡도 맞아야 한다. 팀워크가 뜻대로 안 되고 역할에 녹아들지 못할 때 힘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배우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 낮았다. 그런 편견과 싸우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은 자식이 연예인을 한다면 밀어주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참 좋은 세상이다. 하지만 한스럽지는 않다. 과거가 있으니 지금이 있는 거 아닌가. 그때의 아픔이 지금의 자양분이 된 거다.

―롤모델이 있었나요. ▷잉그리드 버그먼을 좋아했다. 가식이 없어서 좋았다. 연기를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이 그냥 연기가 되는 배우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예쁘게 하려고 애를 쓰는 게 보인다. 하지만 버그먼은 그냥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도 깊이가 느껴졌다.

―라이벌은 있으신지. ▷난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 배우에게 한 사람의 라이벌은 없다. 모든 다른 배우가 라이벌인 것이다. 좋은 의미의 라이벌이다. 개인적인 라이벌이 있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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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배우 김주혁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아버지 김무생과 동갑이고 너무 친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모든 직업이 스트레스가 있겠지만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가 있다. 늘 선택돼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있다. 작품에 녹아들지 못하면 그 또한 엄청난 스트레스다. 죽고 싶을 때도 있을 정도다. 그러다 보면 정신적·육체적으로 과로하고 몸을 못 돌볼 때가 있다.

―종교가 있으신지. ▷불교가 내 모태신앙이다. 난 인과응보를 믿는다. 내가 지은 업은 내가 꼭 받고 간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나 자신을 공부하는 종교라 좋다. 나도 부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좋다.

―인기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인기는 허망한 물거품 같은 거다. 나는 주로 조연을 했기 때문에 일찍 알았다. 연기자가 인기를 먹고 살기 시작하면 망한다. 인기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난 조연을 했기 때문에 30대나 지금이나 인기가 똑같다. 그러나 주연의 인기는 잠깐이다. 그러다 보니 초초해진다. 얼굴을 고치고 늙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그 압박감 때문이다. 그냥 예쁘게 늙으면 될 사람들이 인기가 사라질까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보기 안타깝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 ▷배우는 우선 건강해야 한다. 첫 번째 덕목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나는 늘 신체단련을 했다. 헬스 수영 골프 등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했다. 엄마 역을 주로 하면서 무슨 운동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튼튼한 몸은 연기의 기본이다. 좋은 연기자가 되기 위해 운동을 했던 것 같다.

―아들(남성진)도 연기자가 됐는데 반대 안 하셨는지. ▷아들이 연극영화과에 간다고 했을 때는 처음에 반대했다. 과묵하고 손재주가 있어서 공대를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연영과를 간다고 했다. 내가 하도 반대하니까. 엄마 뜻대로 공대를 갈 수는 있지만, 그래도 연기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길래. 그래 그 정도 각오라면 연영과를 가라고 했다. 사실 배우가 너무 힘든 직업이라 시키고 싶지 않았다. 딸은 가족 전부가 배우인 게 싫다고 연기를 안 하겠다고 했다.

―며느리(김지영)도 연기자인데. 처음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렸다고 한다. 너무 엄한 시어머니일 것 같다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이 그랬으니까.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웃음)

배우는 배우끼리 결혼하는 게 좋다.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밤샘하고 집에 못 들어가고, 지방촬영이 많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 입에도 자주 오르내려야 한다. 타 직종 사람들은 배우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배우들은 보기와 달리 금전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에 결혼을 허황되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배우라는 직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하게 되고 실패할 확률도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배우들에게 되도록 같은 계통의 배우자를 만나라고 한다. 물론 나도 그런 걸 알아서 배우랑 결혼한 것은 아니다. 살아보고 깨달은 거다.(웃음)

아들이 연기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너무 좋다고 했다. 둘이 사는 모습이 참 예쁘다. 서로 이해하고 모니터하면서.

―돈은 많이 버셨는지. ▷지금이야 좀 달라졌지만 우리가 젊을 때는 배우가 출연료 이외의 돈을 번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검소하게 살았다. 부부가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서 아이들 원하는 만큼 공부시킬 수 있었다. 난 지금에 만족한다.

―시청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배우를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젊은 배우들이 악플에 무너져갈 때 너무 안타깝다. 연예인의 한 사람으로 시청자분들에게 정말 부탁하고 싶다.

김용림은…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화여고 연극반원으로 이름을 날리며 학창시절을 보내고 1961년 KBS 성우 공채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다. 1964년 TV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드라마에 데뷔해 53년째 연기 생활을 하고 있다. 동아연극상, MBC 방송연기대상, 백상예술대상 등을 수상하면서 한국 드라마 역사를 대표하는 배우로 살았다. 남편 남일우를 비롯해 아들 남성진, 며느리 김지영 등도 연기자로 살고 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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