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슬픈 18번째 생일날" 제주 현장실습 고등학생 추모제

최충일 2017. 11. 23.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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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군 아버지, 아들 생일 맞아 작년 생일 생각하며 눈시울 붉혀
입짧던 아들, 평소 좋아하던 감자칩 종류별로 빈소에 올려
23일 오후 7시 제주시청광장에서는 이군 위한 추모제 열려
추운 날씨에도 시민들 나와 촛불들고 제도개선 한목소리
23일 18번째 생일 을 맞은 이민호군의 빈소에 올려진 케익. 최충일 기자
“지난해 생일이라고 사준 트레이닝복이 녀석 방에 그대로 걸려 있는데….” 지난 23일은 사상 최초로 수능이 연기돼 치러진 날이었다. 이날은 수능을 치르는 이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이 있는 제주도의 한 가족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23일 18번째 생일 을 맞은 이민호군의 빈소. 최충일 기자
제주도의 한 음료 공장에서 다친 후 지난 19일 숨진 제주도 서귀포시 모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었던 고 이민호군의 18번째 생일이기 때문이다. 고인의 빈소에는 생일케이크와 함께 평소 그가 즐겨 먹던 프링글스 감자 칩이 종류별로 5개가 놓였다.
23일 18번째 생일 을 맞은 이민호군의 빈소에 평소 그가 좋아하던 감자칩이 올라가 있다. 최충일 기자
입이 짧은 아들이 평소 가장 좋아했던 간식이기 때문이다. 생일상에는 생전 좋아하던 음료수인 사이다 몇병도 함께 올랐다.
23일 18번째 생일 을 맞은 이민호군의 빈소를 바라보는 이군의 아버지. 최충일 기자
이군의 아버지 이모(54)씨는 “생일 전날(11월 22일)만 되면 아들은 생일선물 타령을 했죠.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 항상 ‘오늘은 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인데 뭐 해줄래’ 하며 웃어넘겼어요. 올해부터는 뭘 사주고 싶어도 못 사주게 됐네요. 작년에는 그나마 몇해 만에 그렇게 노래 부르던 등산브랜드 트레이닝복을 사줬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지 꿈에도 몰랐어요. 엄마가 끓여줬던 소고기미역국도 참 좋아했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23일 18번째 생일 을 맞은 이민호군의 빈소에 키익과 감자칩 등이 올라있다. 최충일 기자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최충일 기자
이런 이군을 기리기 위한 추모문화제도 이군의 생일인 23일 오후 6시 제주시청 조형물 앞에서 열렸다.

민주노총 제주본부와 전교조 제주지부, 참교육제주학부모회 등 제주지역 24개 단체로 구성된 ‘현장실습 고등학생 사망에 따른 제주지역공동대책위원회’가 마련한 이번 추모문화제는 ‘THE SADDEST BIRTHDAY’(가장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다. 70여 명의 시민은 촛불을 들기도 했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최충일 기자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에 참가한 고정민씨 가족. 최충일 기자
고정민(40·제주시 조천읍)씨는 “SNS 를 통해 오늘 추모제가 열리는 것을 알고 7살 딸과 함께 나왔다”며 “뉴스를 보니 해당 업체의 안전관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 불합리한 점이 많아 하루빨리 현장실습 제도가 보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 쪽지. 최충일 기자
사전행사로 오후 5시부터 문화제 장소에서 현장실습 제도의 폐해를 비판하는 손팻말 시위와 추모 리본 달기 등의 행사가 열렸다. 리본에는 ‘민호야 미안해, 좀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노력할게’, ‘목숨페이로 일해야 하는 파견 실습의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등의 의견이 가득 달렸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최충일 기자
현장에서 만난 특성화고 출신의 김지희(24·여·제주시 노형동)씨는 “내가 학교를 다니던 5~6년 전에도 현장실습에 나갔던 급우들이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며 “가슴 아프지만, 이번 일이 계기가 돼서 제도가 성숙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추모하고 있다. 최충일 기자
회사와 교육 당국의 무책임에 대한 규탄 발언과 추모공연과 학생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추모의 글 낭독과 참가자들이 추모문화제 펼침막에 추모의 글과 국화 남기기 행사도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마지막에 추모 노래로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참가자들이 추모 쪽지를 달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시내 특성화 고등학교 재학생 김채리(17·제주 중앙고1)양은 “같은 지역의 특성화고등학교 선배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고 너무 무섭고 슬프다”며 “나도 2년 후에는 현장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아직 부족한 우리를 위해 어른들이 이번에 불합리한 제도를 꼭 개선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23일 저녁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고 이민호군 추모제 참가자들이 추모 쪽지를 쓰고 있다. 최충일 기자
공대위는 “이번 행사가 지난 9일 한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크게 다쳐 열흘 만에 숨진 이민호군을 추모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마음으로 열게 됐다. 더 이상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모였다”며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제주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관계 기관에 재발 방지 대책을 철저히 촉구하겠다” 밝혔다.

앞선 21일 오후 7시 서울시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든 학생들이 모였다. 서울에서 모인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소속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페이스북에 ‘제주 19살 실습생을 추모합니다’라는 페이지를 개설했다. 연합회 소속 학생들은 “매일 오후 7시 30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이군을 추모하는 촛불을 들고자 한다”며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전국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모두 함께 추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군의 사망사고는 23일 국회에서도 의제로 다뤄졌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 군이 현장실습 과정에서 숨진 제주지역 사업체의 사건 은폐 의혹을 조사하고 있다고 이날 밝혔다.

김 장관은 “이전부터 대부분의 아이가 일과 학습의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조기 취업 형식의 현장에서 급여도 못 받는 문제가 있었다”고 진단하며 “현재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합동점검을 하고 있다. 점검을 통해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23일 오후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이민호 추모제에 걸린 산업재해 발생경과 내용. 최충일 기자
23일 오후 7시 제주시청 광장에서 열린 이민호 추모제에 걸린 추모 쪽지들. 최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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