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할 때마다 오천명의 적이 생긴다는 '의사 이국종'

손현덕 2017. 11. 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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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의 생각-39] 이 글은 네 달 가까이 컴퓨터에 저장돼 있었다. 내가 이국종 교수(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를 만난 건 지난 8월 4일. 유난히 무더운 여름이었다. 많은 얘기를 듣고, 많은 자료를 봤다. 당초 글을 쓸 생각으로 그를 만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그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받은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귀순병사가 총상을 입었다는 뉴스를 접한 날, 사실 나는 제일 먼저 이국종 교수를 생각했다. "그 병사가 거기로 가겠네"라고 짐작했다. 짐작은 맞았다. 나는 이 교수와 통화했다. 북한 병사의 상황을 들었다. 처참했다. 그래도 나는 이 교수가 병사를 살릴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온몸에 피가 거의 다 빠져나간 사람인데도 칼로 가슴을 열어 심장 짜는 걸 지켜봤기 때문이다. 뼈는 붙이면 됐다. 그래서 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벌어질 그에 대한 비난, 그리고 그의 독설도 예상했다.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았고 이 교수도 그대로인 걸 알기 때문이다. 당시는 이국종 교수는 이 글이 공개되지 않길 바랐다. 우리 사회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고, 그 파장이 본인에게 어떻게 돌아올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들이 실상을 알게 됐다. 그래서 좀 편한 마음으로 이 글을 내보낸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모든 걸 다 쓰지는 못했다.
2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총상을 입은 채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회복 상태 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스스로 말하듯, 그는 무수저에 지방대 출신이다. 아주대 의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아주대 병원에서 외상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이국종 교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건 지난 2011년 있었던 단 한 번의 수술이었다.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선원을 구출한 아덴만 여명작전의 영웅 석해균 선장. 정작 선원은 모두 구했으나 그는 해적들이 쏜 총탄을 맞았다. 모두 6발. 배를 뚫고 팔 다리를 관통해 뼈가 으스러졌다. 그런 석 선장을 이 교수가 살렸다. 간호사를 포함해 3명이 석 선장이 부상을 입었던 오만으로 날아갔고, 스위스의 '에어앰뷸런스'를 빌려 석 선장을 후송했다.

이 사건으로 이 교수는 일약 스타가 된다. 대한민국 의료계에서 가장 찬밥 신세를 받는 중증외상 분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국회는 소위 '이국종 법'을 만들고, 이로 인해 올해 대한민국에 모두 17개의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될 예정이다.

6년이 흐른 지금, 과연 업무 환경은 나아졌을까? 보다 많은 의사들이 중증외상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나섰을까? 이제 우리나라 외상센터도 선진화된 시설을 갖췄을까? 그리하여 터지고, 깨지고, 으스러져서 요란한 앰뷸런스 소리와 함께 병원에 실려오는 환자들을 많이 구하게 됐을까?

이국종을 만나면 그 답을 얻게 된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았다. 껍데기는 보기 좋아졌을지 모르나 시스템은 그대로다.

중증외상 의료진은 여전히 의료계의 아웃사이더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의사는 없으며, 그런 그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노고를 치하해 주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문 닫는 게 낫겠다는 저주와 인격살인적인 투서, 그리고 이간질이 난무하는 곳. 정치가 없을 것 같지만 가장 정치가 난무하는 곳이다.

이국종은 남다른 의사가 아니다. 사명감이 투철한 의사도 아니다. 원해서 택한 전공 분야가 아니다. 지도교수가 거기 가서 몇 년 있으면 좋은 데로 옮겨주겠다 해서 간 곳이 중증외상 분야이다. 그저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평범한 직장인이다. 대한민국 중증외상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것도 아니다. 미국, 영국, 일본의 선진시설을 그대로 복사했다. 그의 논문이 특출난 것도 아니다. 그동안 나왔던 걸 좀 업데이트했을 뿐이다. 수술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다. 나름 칼잡이치고는 손이 빠르긴 하나 일본의과대의 히사시 마스모토의 심장 여는 솜씨를 보노라면 이국종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그는 한 명의 '시골의사'이다.

이 교수가 정말 특이한 의사라는 건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그는 2000년 외과 전문의 면허를 취득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회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핍박받은 인생을 살았다. 이국종만 없으면 모든 사람이 다 편한데, 없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게 특이하다.

2003년 그는 1만2000원을 들여 페인트를 샀다. 그리고 건물 정면 입구 보도블록에 크게 'H'자를 그렸다. 중증외상 환자는 헬기로 수송해야 하고, 그러려면 헬기 착륙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거 만드는 데 20억원 든다고 하니 병원이 못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페인트로 그렸다. 거기에 블랙호크가 앉았다. 면적이 좁아 뒷바퀴는 잔디밭에 걸쳤다. 그 잔디밭을 파고 면적을 넓히기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그래도 학교가 이걸 해준 건 미군 환자가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에겐 대리석 건물보다 중요한 게 헬기착륙장이었다.

아주대 중증외상센터를 방문해 보면 보통의 병원과는 좀 다르다. 제법 시설도 갖추고 소위 'FM'으로 일한다. 이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중증외상센터 운영할 필요 없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러니 의료계에서 눈 밖에 날 수밖에.

2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이국종 교수가 총상을 입은 채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회복 상태 등을 설명하며 병실에 걸린 태극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는 환자가 있는 곳이면 헬기를 타고 간다. 국내든 외국이든. 오히려 야간비행이 기본이다. 사고는 대부분 밤중에 발생하기 때문. 이 교수는 "야간비행 하지 않는다면 그게 의사냐"고 말한다. 역시 동료 의사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밖에.

병원 중환자실은 기본적으로 환자 1명에 간호사 1명이 기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병원은 이렇게 운영하는 곳이 하나도 없다. 1등급이라고 해봐야 간호사 1명에 환자 2명. 그는 "오만이나 필리핀보다도 못한 시스템"이라고 비난한다. 병원 입장에서는 그런 이국종이 거북하기 짝이 없다.

석 선장 수술로 유명세를 타자 외부활동이 잦아졌다. 언론사 인터뷰도 했다. 그는 "한번 나올 때마다 5000명의 적이 생긴다"며 "20번 정도 했으니 아마도 10만명의 적이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게 대한민국 의사 전부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15년이다. 비난에 익숙해졌고, 쓰레기 취급받는 것에 무덤덤해졌다. 병원 본관에 빈 병상이 200개나 되는데도 중증환자는 "이곳으로 보내지 말라"는 통첩을 받고, 적자 내는 부서인지라 3개월마다 찍히는 성과급은 매번 보잘것없다. 먹고살기 위해 비참함을 견디면서, 쌍욕 먹어가면서, 앵벌이로 뛰라면 뛰면서 살아온 이국종 교수다.

그래도 다 죽어가는 사람 살리고 나면, 그를 면회 오는 가족들의 웃는 모습,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다시 직장에 복귀했어요"라는 감사의 편지를 받을 때 그 느낌. 그게 이 교수가 살아가는 이유다.

원래 1시간 정도를 예상하고 아주대병원에 그를 취재하기 위해 갔지만 3시간 30분을 훌쩍 넘겼다. 그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듣느라 정작 하고 싶은 질문은 제대로 못하고 나왔다.

참 많이도 지쳐 있었다. 세월호 때 오른쪽 어깨가 부서지고 왼쪽 눈은 망막이 파열됐다. 그의 부친도 1군단 통신병으로 있으면서 비무장지대서 6·25 때 북한군과 교전하다 왼쪽 눈을 잃었다. 우연치고는 묘하고 운명치고는 기구하다.

그는 이제 국가에, 이 사회에 바라는 게 없다. 그저 직장서 그만둘 때까지만 일을 하겠다고 한다. 가로 3M, 세로 6M의 초라하고 작은 사무실. 야전침대가 책상 뒤에 놓여 있고, 벽에는 미군 부대 모자와 기념사진과 임명장 같은 것들이 걸려 있다. 허름한 책꽂이에는 유독 소설가 김훈의 작품들이 몇 권 있었다.

"김훈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니 "그의 '칼의 노래'를 거의 외우다시피 읽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는 그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노량해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손현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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