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아프니까 소수자다?

황수현 입력 2017. 11. 2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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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나중에”란 말로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지난 2월 성평등을 주제로 열린 정책포럼에서 연설하는 그에게 한 여성 성소수자가 뛰어들어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표명을 요구한 일이다. “나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내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느냐”고 묻는 그에게 문 후보는 “나중에 말씀할 기회를 드리겠다”고 답했다. 이 답변은 지지자들이 “나중에”를 연호하며 파장이 커졌다. 여러 언론이 대통령으로서 소수자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며 준엄히 꾸짖었다. 적어도 실명을 드러내놓고는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선 스멀스멀 불만의 말들이 나왔었다. 골자는 “여성 인권운동할 땐 가만히 있던 성소수자들이 왜 이럴 때만 페미니즘에 업히냐”는 거였다. 생경한 장면이었다. 기억하건대 여성과 성소수자는 늘 암묵적 동지였다. 이성애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아래 여성과 성소수자는 1등 시민이 될 수 없었고, 두 집단은 주류 사회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서로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왔기 때문이다. 이 연대에 금이 간 건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페미니즘 운동에 불이 붙으면서다. 며칠 전 트랜스젠더 방송인 하리수씨와 연예인 지망생 한서희씨의 논쟁은 이 균열이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평소 SNS에 여성 인권에 대한 게시물을 자주 올렸던 한씨는 11일 몇몇 트랜스젠더로부터 “트랜스젠더도 여성이니 우리의 인권에 관한 게시물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트랜스젠더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성’분들만 안고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에 하리수씨가 “인성이 안타깝다”며 공개 비판하자 한씨는 다시 “그쪽들 인권은 본인들이 챙기라”는 말로 선을 그었다. 이번에도 온라인에서 논란이 이어졌지만 목소리는 지난 번처럼 조심스럽지 않았다. “여자만 안고 가겠다”는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무상 생리대를 얘기하려니 생리 안 하는 여자가 말을 끊어 먹고, 낙태 반대를 주장하려니 자궁 없는 여자가 말을 가로채 도통 뭘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권 운동할 땐 가만히 있더니”란 말도 빠지지 않았다. ‘네가 한 게 뭐가 있냐’는 말이다.

이런 ‘성과급 인권’은 문명사회의 흔한 오류지만 성소수자계엔 특히 만연하다. 커밍아웃한 한 남성 성소수자는 정체성을 숨기고 사는 소수자들을 향해 “차별 받은 적이 없으니 고통 받은 적도 없다”며 자신들이 애써 ‘쟁취’한 인권을 무상으로 누려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게 인권의 중량은 고통의 무게와 같다. 많이 울면 그 무게도 무거워진다. 눈물로 안 되면 피를 흘려서라도 간신히 인권의 무게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인권은 수고에 따른 보상이 아니다. 눈물을 재는 저울도 아니다. 인권은 위태로운 약속이다. 인간이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고 믿기로 한 인간들끼리의 약속이다. 어린 여아의 내장을 파열시킨 성범죄자에게도 살 가치가 있다고 믿기로 한,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저버리고 싶은 약속이다.

인권이 숭고한 절대 가치라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찢어 먹고 뺏어 먹으려는 욕망은 더욱 가열차진다. 그러므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작동원리는 소유가 아니라 사용이다. 그건 땅 속에 묻힌 천연의 광물이 아니라 내일이면 휴지조각이 될 수도 있는 화폐에 가깝다. 많으면 좋지만 안 쓰면 없는 것이 된다. 쟁취만 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약속은 깨진다.

혹자는 성소수자를 기이하게 여기는 것으로 주류 집단에서 ‘정상’임을 인정 받는 사회에서 페미니스트에게만 소수자 인권에 대한 과업을 얹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할 일은 남이 진 짐을 보고 내 짐을 더는 게 아니라 약속을 어긴 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그 처벌 또한 그렇게 숭고한 일도 아니다. 겨우 내일을 살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황수현 문화부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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