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김정일의 퇴진]①무가베 축출의 1등공신은 '하이퍼 인플레이션'?

이현우 입력 2017. 11. 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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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P연합뉴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37년 장기집권에 이어 자신보다 마흔살이나 어린 부인에게 권력 세습을 시도했던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93)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사임의사를 밝혔다. 무가베 대통령은 이날 의회에 자발적 퇴진을 결정했으며 순조로운 권력이양을 바란다고 서신을 보냈다.

표면상 그의 축출은 무가베의 유력한 후계자로 일컬어지던 에머슨 음난가그와 부통령과 무가베의 아내 그레이스 간의 권력투쟁에 의한 것이다. 무가베 대통령은 지난 6일, 갑작스럽게 음난가그와 부통령을 경질해 그레이스에게 권력을 세습시키려는 야망을 드러내면서 군부와 집권당의 지지를 잃었다.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와 집권당의 탄핵으로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됐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무가베 대통령의 정치적 무리수가 낳은 결과로 비춰진다.

하지만 짐바브웨 내부상황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민심을 크게 잃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기반 붕괴, 농업생산량 악화에 따라 4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짐바브웨의 민심은 이미 그를 떠난지 오래였다. 특히 짐바브웨에서 2000년대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얼마나 심각했는지 1차대전 직후 독일과 중일전쟁 당시 중국과 함께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의 대표적 사례로 주요국 경제학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짐바브웨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에 대해선 알 정도다.

지난해 2월, 자신의 92번째 생일을 기념해 만든 92kg짜리 생일케이크 앞에 선 무가베 대통령 모습(사진=AP연합뉴스)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현재 휴지보다도 저렴한 짐바브웨 달러가치의 급락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80년 무가베 집권 이전 7%대였던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율은 무가베의 집권과 무차별 화폐발행이 실시된 2000년대 이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2008년에는 짐바브웨 정부는 인플레이션율을 약 2억3000만%에서 3억%정도로 추산했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집계 자체를 포기했다. 결국 짐바브웨 달러는 생산비용보다도 못한 가치를 가지게 되어 화폐로서 기능을 상실했고, 달러나 위안화 등 해외화폐가 통용되고 있다.

이처럼 상상을 초월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가베 정권의 경제정책 때문이었다. 무가베는 장기집권을 목표로 통제경제체제를 구축했으며 2000년, 포퓰리즘 정책의 일환으로 백인 지주들의 농지를 모두 몰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흑인 우월주의를 내세워 이에 저항하는 백인들을 축출하거나 살해하는데 앞장섰으며 심지어 외국자본이 소유한 자국 기업 주식의 50%를 국가에 양도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여기에 반항하는 업체 직원들도 곧바로 체포했다.

이렇게 되자 일단 해외자본들이 모두 짐바브웨를 떠나버렸다. 금이나 백금, 크롬 등의 원자재 수출업 외에 별다르게 발전한 산업이 없었던 짐바브웨의 경제는 곧바로 파탄났다. 당장 생필품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하자 무가베 정권은 정부에서 정한 가격보다 비싸게 상품을 팔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시작했고, 결국 기업도 상인도 농민도 모두 파산해버렸다. 여기에 세수가 줄어들자 그 이후부터는 무차별적으로 화폐를 발행해 이를 충당하면서 사실상 국가기능이 마비됐다.

이런 상황임에도 무가베 대통령 자신은 사치를 일삼았다. 본인의 생일잔치를 위해 매년 수백만달러를 투입하는데, 본인이 한살 먹을 때마다 이와 같은 무게의 케이크를 만들어 전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도 그의 생일잔치에는 그의 나이와 같은 93kg의 케이크가 등장했고, 일주일간 이어진 엄청난 생일잔치엔 250만달러가 투입됐다. 4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에이즈 환자가 200만명, 80%가 넘는 실업률을 자랑하는 국가상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를 일삼은 것이다.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그의 별명은 '검은 김정일'이 됐다. 실제로도 북한의 세습독재체제를 부러워했고 친북정책을 펴기도 했다.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는 추모위원회를 만들고 매년 김일성이 사망한 달에 애도행사도 열었다고 전해진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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