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로 떨어진 날씨에도 얼지 않는 계곡엔 물속 곤충 '득실'

2017. 11. 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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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이강운의 홀로세 곤충기 - 소설
소설 아침 수은주는 영하 12도 '한겨울'
강도래, 날도래..청정 계곡서 월동한다

[한겨레]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옆 계곡 하천은 물속 생물들의 소중한 피난처이다.

아침 기온이 벌써 영하 11.8℃. 텔레비전에서는 대관령이 영하 11.3℃를 기록하며 올 늦가을 가장 춥다고 방송하지만, 연구소 아침은 더 춥다. 가을을 보내기 싫어 자꾸 늦가을이라 하지만 겨울에 들어선 입동(立冬)이 지난 지 한참이어서 아무리 앙탈을 부려도 이제 때는 겨울이다. 늘 계절을 앞당겨 쓰는, 강원도 오지에 있는 연구소는 반짝 추위가 아니라 추위에 추위가 더해 쌓이면서 이미 본격적인 겨울이다.

19일 아침 수은주는 영하 11.8도를 가리킨다.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 문득 그리워했던 첫눈이 날린다. 떨어진 붉고 누런 낙엽이 퀼트 조각같이 예쁜 무늬를 만들어 그냥 놔두었는데 내린 눈으로 덮였다. 세상 모든 생물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잠깐이나마 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처럼 보인다.

찬바람 불고 건조한 요즘에 땅바닥에 딱 붙어 겨울을 견디며 사는 민들레나 달맞이꽃에 하얀 눈은 녹으면서 천천히 스며들어 목마름을 채워주는 샘물이다. 팽나무 잎에 붙어 바닥으로 떨어져 겨울을 나는 왕오색나비와 홍점알락나비 애벌레들은 배고픈 쥐나 새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흰 눈은 은신처를 만들어주고 차가운 기운을 잠시라도 녹여주는 따뜻한 이불도 된다. 하얀 눈은 축복이다.

눈 속에 파묻힌 왕오색나비, 홍점알락나비 애벌레.

꿈 좇아, 곤충 따라 깊은 골짜기로 온 지 스무 해. 자연을 닮아 때를 알고 때에 맞춰 사는 법을 알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산속 겨울 채비는 김장으로 시작되는데, 다섯 달 겨울철 양식인 김장을 하려고 심은 배추는 때를 맞추지 못해 어정거리다가 훅 겨울 한복판에 들어서면서 거둘 엄두도 못 낸 채 거적으로 덮어만 두고 있다. 배추가 얼어 거의 물거품이 되었지만 그래도 잘 버틴 놈 골라서 내일 김장을 하려고 준비한다.

사람의 산속 겨울나기에 꼭 필요한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를 고르고 있다.

맨살 드러낸 나무들로 속이 텅 비어 있던 겨울 빈 숲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목숨이 보인다. 갈색쐐기나방, 노랑쐐기나방, 배나무쐐기나방 등 쐐기나방과(科) 딱딱한 고치들은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놓고 겨울을 나고 있다. 비단 실로 주변의 나뭇잎과 어린 가지로 촘촘하게 엮어 따뜻하게 겨울을 나고 있는 주머니나방 애벌레의 이동식 은신처인 주머니도 잘 보인다. 워낙 질기고 강해 손으로는 찢을 수 없고 칼이 있어야 겨우 흠집을 낼 수 있을 정도다. 보온 작용을 하는 거품으로 알집을 만들어 이제는 천적까지 물리칠 수 있는 딱딱한 보호벽이 된 사마귀 알집. 모두 안전 가옥에서 겨울을, 천적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있다.

단단한 고치로 겨울을 나는 노랑쐐기나방 번데기.
좀사마귀 알집.
주머니나방과 애벌레.

햇볕 한 줌 들지 않던 계곡이 잎 떨어져 헐거워진 나무 사이로 햇볕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따뜻해지고 있다. 물에 기대어, 물속 돌에 몸을 의탁하고 사는 물속 곤충들은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다. 계곡 주변 나무가 떨어뜨린 나뭇잎이 썩으면서 좋은 먹이가 되고 얼지 않고 흐르는 물의 양도 일정해 활동하기 ‘딱 좋은’ 시절이다.

연구소를 끼고 흐르는 계류는 남한강 최상류에 위치하여 물속에 녹아있는 산소가 매우 많은 초 일급수로 맑은 물에 사는 수서생물엔 가장 좋은 서식처다. 여울과 소가 반복되고 수심이 달라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어 양서·파충류와 민물고기, 수서곤충 등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한다. 연구소가 소재한 ‘갑천(甲川)’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가뭄 때도 물이 마르지 않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으니 물에 사는 생물들에겐 가장 안정적인, 으뜸가는 ‘살 데’이다.

특별한 날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겨울 방학이 되면 숲을 찾아 도심을 떠나온 아이들로 깊은 산 속 연구소가 떠들썩했다. 깊은 산 차가운 계곡 물이 낯설기만 했을 텐데 어느 순간 몸속에 흐르는 야성을 발휘하여 얼음장 계곡 물에 발을 담근다. “아, 차가워!” 아이들의 환호성이 물소리 따라 산속을 울린다. 연신 소리를 질러대면서도 한겨울 계곡에서 돌을 뒤집어 곤충 채집을 하던 아이들에게 시간이 멈춰 선다. 귀여운 놈들. 그놈들이 벌써 시집·장가를 간다.

겨울 방학을 맞아 하천에서 물속 생물 조사를 하느라 신난 학생들.

처음에는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는 걸 엄두도 못 내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차가운 계곡 물에 젖으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어느 정도 채집방법을 터득한 후에는 숨은그림찾기 하듯 돌 밑에, 계곡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보호색을 띠고 있는 물속 생물을 찾아내고 물속 세계를 확인하고는 자신들 스스로 뿌듯해한다. 불과 2시간여 만에 월동 중인 북방산개구리와 민물고기인 버들치와 돌고기, 수서곤충인 각다귀와 물자라까지 골고루 채집하며 물 밖은 영하 20도라는 사실에 놀라고, 얼지 않는 계곡 물에 놀라고, 그렇게 많은 생물이 한겨울에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세 번 놀란다.

청정하천의 대표적인 물속 곤충인 강하루살이 애벌레.

채집한 생물 중에서 가장 생소한 곤충을 뽑으라면 아마 날도래와 강도래일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곤충인 데다, 날도래와 강도래라는 수서곤충은 청청한 1급수 지역에서만 서식하므로 좀처럼 관찰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날도래 애벌레는 손재주가 무척 뛰어난 물속 건축가다. 육지의 주머니나방처럼 비단 실로 주변의 나뭇잎이나 작은 자갈 혹은 나뭇가지를 붙여 자신이 살 집을 스스로 만드는데, 종류에 따라 모양이나 재료가 천차만별이라 집만 봐도 대충 어느 종류인지 분류가 가능하다. 작은 자갈을 자잘하게 붙인 가시우묵날도래, 바수염날도래 집이 있고, 긴 나뭇가지를 붙여 만든 띠우묵날도래 그리고 작은 나무 부스러기를 모아 붙인 둥근날개날도래 집, 나무 조각과 자갈을 섞어 만든 검은날개우묵날도래 집 등 형태와 재료가 다르다. 날도래의 집은 천적으로부터 몸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물 밑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가시우묵날도래 애벌레.

이에 비해 집을 만들지 않는 강도래 애벌레들은 겁이 없는 편이다. 점등그물강도래 애벌레는 날도래보다 몸집도 크고 무늬도 화려한 편이다. 갑옷을 입혀 놓은 듯 튼튼해 보이는 외관에 부리부리한 눈, 두 개의 긴 꼬리, 굵직굵직한 다리는 겁날 게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강도래 애벌레 역시 물을 떠나 살 수 없지만, 물살 앞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 몸을 지탱해 줄 집이 없는 대신 유속이 빠른 계곡에서 물살에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돌이나 바닥에 붙어 있기 위해서 몸이 납작하다. 물살 빠른 계곡에 사는 강하루살이, 어리장수잠자리도 납작한 몸으로 바짝 엎드려 산다.

어리장수잠자리 애벌레.

며칠 전 세계적 희귀종이면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갯게’가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군 인근 갯벌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개체 수가 급격히 줄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었는데 해안도로, 방파제와 같은 구조물을 없애고, 갯잔디를 심어 서식지를 확대하면서 ‘갯게’가 돌아왔다니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신기하다. 어디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하다가 ‘살 만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우리 곁으로 오다니.

그러나 4대강이 막혀있고 설악산에 인공 구조물이 세워지면 산속 개울도, 동네 앞산도 뒷산도 모두 부서지고, 골짜기마다 숨어있던 생물들의 살 데가 없어지겠지! 녹색으로 성장하겠다던 이명박 정부의 엉터리 개발 계획으로 난자당한 우리의 산하를 봐라. 지금은 녹색 성장이 아니라 녹색 철학이다.

글·사진 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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