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처유상수]대장장이 김종계씨-"쇠가 아무리 강해도 불에 익히면 고무줄"

2017. 11. 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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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 속에서 쇠를 달구는 것은 석탄을 정제한 코크스로 섭씨 2000도까지 열을 낸다. 강한 쇠조차 그 열기 속에서 물러질 수밖에 없다. 어떤 물질이라도 물성을 터득한 임자를 만나면 자유자재로 다뤄진다.

대장간에서는 아무리 강한 쇠라도 불로 달구고 망치로 두드려서 원하는 연장을 만들어낸다. 충남대장간의 대장장이 김종계씨는 서울 한복판에서 불을 피우고 쇠를 두드린다. 도시에서도 대장간이 필요한 이들이 있고, 그의 근육과 기술은 오늘도 녹슬지 않았다.

“열일곱 살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했으니 50년이 넘었다. 젊었을 땐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일이다. 다른 일을 찾아 도망갔다가 보면 또 이 일을 하고 있었다. 쇠 다루는 일이 천직이다 생각한다”는 김 씨는 선반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속아 대장장이가 됐다고 했다. 선반은 쇠를 깎는 기계로 당시에는 첨단 고급기술이었다. 기술을 배우려 따라간 곳은 경기도 파주의 대장간. 워낙 시골이고 순박한 때 여서 돌아올 수도 없었다. 그곳에서 제대로 월급도 받지 못하고 4~5년을 불을 피우고 쇠 다루는 일을 배웠다.

2000도가 넘는 코크스의 불로 쇠를 달궈 작업한다.

아내는 충남대장간 일꾼 겸 살림꾼

김종계씨는 군대를 가느라 파주 대장 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대하고 다른 일을 찾아 일한 곳이 용접일. 역시 쇠를 만지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집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일당 일을 했는데 그래서는 생활이 되지 않았다. 월급 주는 곳을 찾아 취직을 했는데 역시 대장간이었다”고 한다. ‘대장장이에게는 딸도 주지 않는다’는 시절 대장간 일은 힘들고 기피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내를 만나 길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는 묵묵히 내조했고, 두 딸을 낳아 키웠고, 지금은 가게에 나와 그를 돕는다. 김씨는 “아내가 가게에 나온 지 한 10년 됐다. 저 사람 아니면 가게가 돌아가지 않는다. 장사는 뜨내기 손님을 잘 잡아야 하는데 나 혼자 있으면 왔다 가도 나간다. 저 사람이 웬만한 것은 다 알아서 설명하고 판다. 이제는 망치질만 하지 않을 뿐 대장장이가 다 됐다”며 아내를 칭찬했다.

충남대장간이 있는 신당동은 서울에서 대장간이 가장 많았던 동네다. 동대문 에서 신당동 중앙시장 일대까지 100여곳 이 넘는 대장간이 몰려 있었다. 해가 뜨면 풀무질하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집을 짓는 데 필요한 연장 부터 집에 필요한 칼을 사거나 연탄집게 하나를 구하려 해도 당연히 신당동 대장간 거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버렸다. 무쇠 칼 대신 스테인리스 식도가 나오고, 목조건물은 콘크리트로 바 뀌었다. 대장간에서 만들던 제품들은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으로 대체됐고, 쓰임새도 사라져갔다.

이곳저곳에서 대장장이로 일하던 김종계씨가 신당동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그때까지 신당동은 서울에서 대장간이 가장 많이 남아있던 곳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대여섯 집이 남아있었는데 이제는 옆집하고 나하고 둘만 남았다. 대장장이 중에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고 다 내 또래든지 윗사람들이다.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다. 세월이 변하지 않았나.” 그의 이야기 중간에도 일을 부탁하는 손님들의 발길은 끊임이 없었다. 무뎌진 연장의 날을 세워 달라는 이들부터 일에 맞게 연장을 맞춰 가는 사람. 테이블 다리를 주문하는 이들까지 그야말로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었다. 손님을 대하며 간간이 용접과 그라인더로 원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냈다.

충남대장간을 찾는 이들을 지켜보며 느낀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누구도 값을 깎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끔 필요한 장식 따위를 주문한다는 인테리어 업자는 “일을 더 잘하시라”며 그가 제시한 금액보다 더 값을 치르겠다며 계약금을 건네고 갔다. “여긴 단골들만 온다. 한 번 써보면 자기 손에 맞고 다른 데서 만든 물건과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웬만하면 원하는 대로 다 만들어주니까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 김씨의 설명이다.

김종계씨는 방금 주문 받은 연장의 작업내용을 분필로 적어놓고 다시 부엌칼을 사러 온 손님을 맞았다. “몇 가지 소소한 것 외에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은 거의 없다. 요즘에는 대부분 건축공사 현장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만든다. 공사장 연장들은 제주도에서도 주문이 온다. 현장 일정에 맞춰서 택배나 퀵서비스로 보내준다”고 말한다. 공사판에서 그의 솜씨는 소문이 나 있어서 주로 현장감독들의 주문이 그치질 않는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충남대장간의 으뜸 일꾼이다.

손님들 누구도 값을 깎지 않는 이유

현장에서 사용하는 연장의 날이 무뎌 지면 노동자들은 그를 찾아온다. 무뎌진 끌이며 정을 내려놓고 갔다. 새벽일 나가는 이들을 위해 그의 대장간은 새벽 6시면 문을 열었다. 시간을 맞춰 약속해둔 연장을 내어주고 한 시간 남짓 가게를 정리하고 나면 화로에 불을 붙여 9시까지 아침 작업을 한다. “너무 일찍 쇠를 두드리면 주변에서 싫어하니까 2시간 정도 쇠를 달궈 작업하고 아침을 먹는다. 요즘엔 새벽에 찾아오는 이들이 없는데도 딱 그 시간이면 눈이 떠져서 대장간에 나와 문을 연다. 습관이 그만큼 무섭다.”

쇠로 만든 가구 장식부터 호미, 쇠스랑 등의 농기구와 도끼와 끌 등의 산판 연장 까지. 그리고 콘크리트 브레이크에 쓰는 기계정까지 충남대장간의 바닥과 선반 벽과 천장에는 수천 종의 물건들이 빼곡 했다. 대체 그는 얼마나 많은 물건들을 만들까. “여기 작업해놓은 것만 수천 가지이고 설명만 들으면 다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잡고 조물거리는 일은 안 한다. 공이 많이 든다고 값을 많이 쳐준 다는데 성격상 오래 붙들어야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굵고 큰일을 빨리빨리 하는 것이 체질에 맞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 리 일이 많아도 혼돈하지 않는다고 강조 한다. 필요해서 찾아온 이들의 심사를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그런 성격은 때로는 차려놓은 밥상도 마다했다. 대장간 일이 전통기술로 인정받아 많은 이들이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지정 받았다. 김종계씨는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면 기계를 쓰지 않고 전통방식대로 수작업만 해야 한다. 민속촌 대장간처럼 보여주는 곳이 되는 것이다. 전통도 좋지만 요즘 기계를 쓰지 않고 작업할 수 있나? 그래서 그쪽으로는 눈을 두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많이 사라졌다지만 서울에는 곳곳에 대장간이 남아있다. 불광동, 모래내, 천호동, 문래동 등지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과 담금질을 하는 곳들이 문을 열고 있다. 몇몇 곳은 대를 이어 대장간의 맥을 이어가는 곳도 있다. “대장간은 변두리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도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돈은 못 벌어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제법 수입도 괜찮다. 요즘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공무원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는 김씨는 새로 기술을 배우려는 이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아무리 좋아도 대를 잇지 못하는 작업은 점차 문을 닫게 될 것이고, 꼭 필요해서 대장간을 찾는 이들은 불편을 겪어야 할 것이다. 김씨는 제대로만 일한다면 기술을 가르쳐주고 가게를 물려줄 용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거칠고 힘들어 보이는 일이라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현실을 알고 있다고도 이야기했다.

김종계씨는 “그렇게 싫어했는데 언제부턴가 대장간 일을 하는 것이 편해졌다. 이젠 쇠를 만지는 일이 좋아졌다. 받아들이면 편하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세월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불과 싸우고 쇠를 두드리며 담금질하는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자 불도 쇠망치도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일에 의심의 순간이 있겠지만 받아들일 때 편안하게 자기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거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부디 젊은이들은 자신처럼 길게 돌아가지 말고 천직을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무뎌진 연장들은 그의 손에서 다시 날이 선다.

새로 배우려는 젊은이 없어 아쉬워

시대에 따라 대장간에서 만드는 물건들은 달라졌다. 가구 장석을 주로 만들던 때가 있었고, 농기구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김종계씨의 충남대장간도 그런 시절을 거쳤다. 한때 그가 만들던 농기구들은 견고하고 작업하기에 쉬워서 유명했다. 도시가 넓어지면서 농기구를 찾는 이들이 사라지자 낫이며 호미를 직접 만드는 일은 줄었다.

대장간에서 쇠를 만지는 방식은 공장의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멀다. 용도에 따라 쇠를 고르고 불에 달궈 망치로 두드려 모양을 만든다. 거듭 두드려서 틀을 잡고 물에 담금질함으로써 강도를 높인다. 요즘에는 기계망치가 있어 망치질은 줄었다지만 전체적인 방법은 달라지지 않았다. 쇠가 망치질을 견디고 불을 이겨내며 담금질을 거칠수록 좋은 제품이 태어난다. 낫이며 연장 하나를 만드는 데도 수천 번의 망치질과 수십 차례의 담금질이 있어야 한다. 쇠로 만든 도구의 단단함과 손에 붙는 편리함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장장이의 눈과 근육과 땀으로 쇠는 인간에게 필요한 도구로 태어날 수 있다.

김씨는 “쇠가 아무리 강하고 단단해 보여도 대장장이를 만나면 고무줄과 같다. 쇠를 다루는 방법은 불에 잘 익혀야 한다. 익히지 않으면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고 강조한다. 화로 속에서 쇠를 달구는 것은 석탄을 정제한 코크스로 섭씨 2000도까지 열을 낸다. 강한 쇠조차 그 열기 속에서 물러질 수밖에 없다. 어떤 물질이라도 물성을 터득한 임자를 만나면 자유자재로 다뤄진다. 김씨는 모든 일에는 그렇게 쉽게 해낼 수 있는 요령이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그 길을 알기까지가 어렵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으면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씨와 같은 대장장이는 그야말로 쇠에 통달한 이들이다. 위로 한 번, 옆으로 돌려서 한 번 망치질을 할 때마다 쇠의 약한 부분은 강해지고 불순물들은 떨어져 나간다. 그렇게 수천 번의 망치질이 쇠를 단련하고 대장장이의 삶을 만들어 갔다.

“아마도 이 동네가 재개발될 때까지는 대장간 문을 열어야 할 것 같다. 쇠붙이들은 대장간에 있을 때야 필요한 물건이지만 지금 문을 닫는다면 다 고철로 나가야 할 것 아닌가” 하는 김씨는 요즘 저녁시간에 운동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야 더 오래도록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대장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가 충남대장간의 문을 여는 날까지 김씨의 기술과 경험이 필요한 이들은 찾아올 것이다. 그가 만든 물건을 들고 기쁘게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김종계씨에겐 아직도 힘과 보람을 준다. 그것이 그가 거친 노동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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