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손 벌린지 꼭 20년..그 불길한 예감이 또 왔다
고도성장 30년 동안 누적된 폐단 곪아 터져
97년에만 1만7000여개 기업 도산..이듬해 성장률 -5.5%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극복..구조조정, 체질개선 선물받아
현재 외환보유액 3800억 달러, 신용등급도 최상위급
저성장, 고실업, 내수부진 등 구조적 문제 해결 난망
"나라 곳간 든든히 한 뒤 혁신 통해 경쟁력 키워야"
구제금융 요청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연초부터 잇따른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에 아시아 통화위기까지 덮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속도로 줄어들던 상황이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에는 문제가 없다”던 한국 정부 고위 관료들의 발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인들은 앞다퉈 투자자금을 빼낸 뒤 철수했다. 달러는 씨가 말랐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은 겨우 60억 달러였다. 이후 외환보유액은 최저 39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화한 지 10여일 뒤인 12월 3일 한국은 ‘IMF 자금 지원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춥고도 배고팠던 ‘IMF 체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경제위기의 대명사인 ‘IMF’는 이렇게 꼭 20년 전 우리 곁으로 찾아와 쓰나미처럼 일거에 나라를 휩쓸어버렸다. 오랫동안 위기를 모른 채 승승장구하던 한국 경제가 초대형 시련에 봉착했던 순간이다.
당시 한국 경제와 기업은 고도성장 30년의 적폐가 누적돼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기업은 남의 돈을 빌려 백화점식·문어발식 외형성장을 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과잉·중복투자는 일상이었고, 재무구조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97년 제조업체들의 부채비율은 평균 396%에 달했다. 이 전 장관은 “정경유착의 보편화로 ‘대마불사’나 ‘은행 불패’ 등 도덕적 해이도 만연해 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채 경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IMF 체제에서 기업과 은행들이 속속 무너졌고, 직장인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1997년 한해에 무너진 기업만 30대 기업 8개를 포함해 1만7000여 개에 달했다. 연 7~8%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5.5%로 추락했다. 동화은행 등 5개 은행이 퇴출당했고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외국계 펀드에 팔렸다. 실직자가 늘어났고 청년은 취업을 못 해 발을 굴러야 했다. 1998년 2월 실업률은 8.8%, 청년실업률은 14.5%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외환위기는 민관이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한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경제대책조정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위기 극복의 총대를 멨고, 국민은 세계를 놀라게 한 ‘금 모으기 운동’으로 화답했다. 경제지표와 수치들은 이른 시일 안에 회복됐다. 한국은 2001년 8월 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IMF 체제를 종료시켰다. 예상보다 빠른 ‘조기 졸업’이었다.
하지만 IMF 체제 졸업 이후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이어 가지 못한 것은 한국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시 경제수장이었던 진념 전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시스템이나 체질을 바꾸는 건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해서 꾸준히 이뤄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외환위기 이후에도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간다는 목표에 따라 법과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것이 이후 잘 이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시 구조조정에 실패한 결과가 20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 경제다. 세계 경제의 훈풍과 이로 인한 수출 호조 덕택에 올해 3% 성장률 달성이 유력시되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세계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내수는 여전히 ‘소비절벽’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금리 인상 재개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14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는 큰 부담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경제와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을 앞세워 경제를 키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목표 달성 여부는 미지수다.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이 중장기 성장 동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노동 개혁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은 9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 ‘노동시장 효율성’ 항목에서 139개국 중 73위였고 ‘정리해고 비용’ 항목에서는 112위에 그쳤다. WEF는 “노동시장의 낮은 효율성이 (한국의) 국가경쟁력 상승을 발목 잡는 만성적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통상임금,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이 모두 한 묶음으로 묶여 있는 주제들”이라며 “통합적 차원의 개혁, 전체적인 사회 대개조의 목적으로 노동시장 대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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