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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IMF에 손 벌린지 꼭 20년..그 불길한 예감이 또 왔다

박진석
입력 2017. 11. 21. 00:27 수정 2017. 11. 2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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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11월21일, "IMF에 구제금융 요청"
고도성장 30년 동안 누적된 폐단 곪아 터져
97년에만 1만7000여개 기업 도산..이듬해 성장률 -5.5%
금모으기 운동 등으로 극복..구조조정, 체질개선 선물받아
현재 외환보유액 3800억 달러, 신용등급도 최상위급
저성장, 고실업, 내수부진 등 구조적 문제 해결 난망
"나라 곳간 든든히 한 뒤 혁신 통해 경쟁력 키워야"
1997년11월21일의 IMF 구제금융 요청 발표 사실을 보도한 이튿날 중앙일보 1면.
1997년 11월 21일 오후 10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광화문 정부 1청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가 은밀하게 한국을 방문한 지 5일 뒤에 벌어진 일이다.

구제금융 요청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연초부터 잇따른 대기업의 연쇄부도 사태에 아시아 통화위기까지 덮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속도로 줄어들던 상황이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에는 문제가 없다”던 한국 정부 고위 관료들의 발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국에 투자했던 외국인들은 앞다퉈 투자자금을 빼낸 뒤 철수했다. 달러는 씨가 말랐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은 겨우 60억 달러였다. 이후 외환보유액은 최저 39억 달러까지 줄어들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화한 지 10여일 뒤인 12월 3일 한국은 ‘IMF 자금 지원 합의서’에 서명을 했다. 춥고도 배고팠던 ‘IMF 체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경제위기의 대명사인 ‘IMF’는 이렇게 꼭 20년 전 우리 곁으로 찾아와 쓰나미처럼 일거에 나라를 휩쓸어버렸다. 오랫동안 위기를 모른 채 승승장구하던 한국 경제가 초대형 시련에 봉착했던 순간이다.

29일 신한은행이 인수하기로 결정된 서울 적선동 동화은행 본점에 금융감독원 조사팀이 도착하자 노조원들이 출입을 저지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첫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IMF 체제’ 초기 위기극복 작업을 지휘했던 이규성 전 장관은 『코리안 미러클 4: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라는 책에서 외환위기의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한국경제와 기업의 구조적 취약성 ^준비 없는 상황에서 대외개방 확대 ^해외로부터 과도한 단기자금 차입 ^아시아 통화위기로 대표되는 당시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다.

당시 한국 경제와 기업은 고도성장 30년의 적폐가 누적돼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기업은 남의 돈을 빌려 백화점식·문어발식 외형성장을 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과잉·중복투자는 일상이었고, 재무구조는 취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97년 제조업체들의 부채비율은 평균 396%에 달했다. 이 전 장관은 “정경유착의 보편화로 ‘대마불사’나 ‘은행 불패’ 등 도덕적 해이도 만연해 있었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채 경제의 취약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IMF 체제에서 기업과 은행들이 속속 무너졌고, 직장인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1997년 한해에 무너진 기업만 30대 기업 8개를 포함해 1만7000여 개에 달했다. 연 7~8%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5.5%로 추락했다. 동화은행 등 5개 은행이 퇴출당했고 제일은행과 외환은행은 외국계 펀드에 팔렸다. 실직자가 늘어났고 청년은 취업을 못 해 발을 굴러야 했다. 1998년 2월 실업률은 8.8%, 청년실업률은 14.5%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외환위기는 민관이 똘똘 뭉쳐 위기를 극복한 승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경제대책조정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위기 극복의 총대를 멨고, 국민은 세계를 놀라게 한 ‘금 모으기 운동’으로 화답했다. 경제지표와 수치들은 이른 시일 안에 회복됐다. 한국은 2001년 8월 차입금을 전액 상환해 IMF 체제를 종료시켰다. 예상보다 빠른 ‘조기 졸업’이었다.

외환위기극복을 위한 [나라사랑 금모으기]운동이 주택은행 본점및 전국 각 지점에서 전개되고 있다.오는 31일까지 계속될 이 운동은 시행 첫날인 5일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한국 경제의 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외환위기 기간에 이뤄진 일련의 개혁은 한국 경제를 완전히 리셋시켰다. 그 덕택에 한국 경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다. 캉드쉬 총재가 “외환위기는 위장된 축복”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았던 외환보유액은 지난 10월 현재 3884억 달러로 급등했다. 세계 9위 수준의 외환보유액이다. 최소한 외환보유액이 부족해 외환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작아졌다. 여기에 견실하게 유지되고 있는 재정 건전성 등이 더해지면서 한국 경제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7년 당시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무디스는 한국을 각각 B+, B-, Ba1 등 '투기 등급'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신용등급은 각각 AA(11계단 상승), AA-(12계단 상승), Aa2(8계단 상승)로 크게 개선됐다. 세 곳 모두 일본보다도 높은 등급을 부여했다.
외횐위기

하지만 IMF 체제 졸업 이후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이어 가지 못한 것은 한국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시 경제수장이었던 진념 전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은 “시스템이나 체질을 바꾸는 건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해서 꾸준히 이뤄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외환위기 이후에도 상시 구조조정 체제로 간다는 목표에 따라 법과 체제를 정비했는데 이것이 이후 잘 이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시 구조조정에 실패한 결과가 20년이 지난 현재의 한국 경제다. 세계 경제의 훈풍과 이로 인한 수출 호조 덕택에 올해 3% 성장률 달성이 유력시되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세계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내수는 여전히 ‘소비절벽’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금리 인상 재개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14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는 큰 부담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경제와 소득주도 성장, 혁신성장을 앞세워 경제를 키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목표 달성 여부는 미지수다.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 등의 정책이 중장기 성장 동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새로운 경제 위기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손에 꼽히는 건 역시 나라 곳간을 든든히 채우는 일이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최근 한 심포지엄에서 “위기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외채는 종류를 불문하고 총량 관리해야 한다”며 “특히 어떠한 정치적 유혹이 있어도 마지막 보루인 재정만큼은 건전하게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20년
이런 토대 위에서 기업과 사람의 혁신을 통해 근본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새로운 경제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최종찬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은 “모든 경제 문제는 결국 기업이 해결해야 하는 만큼 규제 완화 등을 통해 기업 하기 좋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나 규제프리존특별법 등을 조속히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 개혁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은 9월 발표된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 ‘노동시장 효율성’ 항목에서 139개국 중 73위였고 ‘정리해고 비용’ 항목에서는 112위에 그쳤다. WEF는 “노동시장의 낮은 효율성이 (한국의) 국가경쟁력 상승을 발목 잡는 만성적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통상임금,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이 모두 한 묶음으로 묶여 있는 주제들”이라며 “통합적 차원의 개혁, 전체적인 사회 대개조의 목적으로 노동시장 대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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