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독립문, 일제 아닌 중국한테서 독립 상징

2017. 11. 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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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사실 5가지
120년 전 오늘 서대문에 준공
현판 글씨는 이완용이 썼다?
조선 최초 콘크리트 건축물?

[한겨레]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안에 자리한 독립문의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120년 전 오늘, 1897년 11월 20일 독립문이 준공됐습니다.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안에 자리한 그 독립문입니다. 독립문은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본떠 만든 15m 높이의 석조문입니다.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선 이 독립문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일제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개혁하려던 것은 청국을 의뢰하는 사대당을 몰아내고 청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독립의 완전한 국가를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

-<서재필 박사 자서전 > / 김도태 저 (을유문고 , 1972. 초판은 1948년 수선사에서 발간 )

1896년을 전후해 열강의 이권침탈, 주권침해의 압력이 갈수록 거세집니다. 이에 대항해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내정개혁을 추진하고자 창립한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개혁파 인사들이 주축이 된 독립협회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정치에 참여시켜서 스스로 주권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임금이 나가 맞았던 문인 영은문 바로 앞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립문 건립에 필요한 비용은 약 3825원으로 책정됐습니다. 이들은 <독립신문>을 통해 이런 뜻을 알리고 국민들에게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각계각층의 국민들은 독립협회의 목적을 지지하고 성금을 자발적으로 헌납했습니다.

1897년 8월까지 5897원19전2리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성금으로 독립문 건립뿐만 아니라 독립관과 독립공원 건립도 추진했습니다. 공사 도중 비용이 부족해지자 다시 국민들의 자발적 헌납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사 총괄은 유명한 건축기사였던 한국인 심의석이 맡았습니다. 석재의 가공은 한국의 고급 기술자들이 담당했습니다. 육체적 노동과 관련한 일은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독립협회 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이를 두고 자신의 일기에 ‘역사의 영고성쇠(개인이나 사회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뒤바뀌는 현상)’라고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을 사대하던 상징인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독립문을 세우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던 것입니다.

독립공원은 막대한 경비 소요로 인해 계획대로 개설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환영과 송별연을 베풀어주던 모화관을 개수해 독립관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독립관은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됐습니다.

임인식(1920∼1998년) 사진작가와 미군정 당시 서울에 있던 미군 병사 프레드 다익스가 찍은 독립문과 영은문 주춧돌 모습. 서울시 제공

이렇게 건립된 독립관과 독립공원은 현재 자취를 감췄지만, 독립문은 일제와 한국전쟁을 겪고도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독립문은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열망하고 있었고, 특히 대중의 참여로 지어졌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2. 독립문 현판 글씨는 이완용이 썼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지어진 독립문에는 하나의 논란이 존재합니다.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이 매국노 이완용과 독립운동가 김가진 가운데 누구냐는 공방입니다.

독립문 현판을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의 시발점은 <동아일보> 1924년 7월15일자 기사입니다. 당시 ‘내 동리 명물(名物)-교북동 독립문(橋北洞 獨立門)’이란 제목의 기사 내용에는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치 기사

“(중략 )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 이완용은 다른 이완용이 아니라 조선 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

실제로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에 깊게 관여했습니다. 친일 매국노로 알려진 이완용은 이때까지만 해도 친미파였고, 독립협회 창립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문 건립 성금에도 당시로써 큰 돈인 100원(현재가치 약 500만 원)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독립문 현판의 글씨체와 이완용 글씨체가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다른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으로 지목돼 온 김가진 선생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또 한 명의 독립협회 창립멤버입니다. 김 선생은 창덕궁 후원 현판의 글씨를 썼을 만큼 명필로 소문났습니다. 실제로 창덕궁 현판의 글씨체와 독립문 현판의 글씨체가 매우 비슷하다는 의견이 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김가진 선생의 손자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2010년 1월3일치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내용을 언급합니다.

“독립협회 결성의 주역 중 한 사람이던 할아버지는 당대 명필로도 꼽혀 서대문 밖에 세운 ‘독립문 ’의 한자 ·한글 제자 모두 쓰셨다 . 비원에 있는 현판도 대부분 할아버지 글씨다 . 독립문의 제자가 ‘역적 ’ 이완용의 글씨로 일부 잘못 알려져 있는데 , 육안으로 서체만 비교해도 틀린 주장임을 알 수 있다 .”

-한겨레 2010년 1월 3일치 [길을 찾아서] ‘일본 작위 내던지고 망명한 할아버지 / 김자동’? 중에서

하지만 독립문 현판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있지 않아 글씨의 주인을 놓고 아직도 이론이 분분한 상황입니다.

3. 터널 건설하는 과정서 통째로 들어 옮겨지다

독립문의 아픈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구자춘 서울시장은 1979년 금화터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급기야 독립문을 훼손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의 종로구 행촌동과 서대문구 영천동을 잇는 독립문 고가 차도를 놓기 위해 독립문을 통째로 들어서 이동시킨 겁니다.

이 결과 독립문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70m나 떨어진 곳으로 이전됐습니다. 방향도 북서쪽으로 틀어져 원래의 무악재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독립 문지’라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묻어 놓았습니다.

4. 순수한 석조물이 아니다

1979년 고가도로 공사로 인한 이전으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습니다. 독립문은 1896년 설계 당시 서재필이 프랑스의 에투알개선문을 모형으로 했다고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비용을 최대한 아끼기 위한 방안이었습니다.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건축기사가 서재필을 도와서 세부설계를 작성했습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석조문으로 건립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석재인 화강암이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순수한 석조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전 공사를 위해 독립문을 뜯어보니, 내부에서 철근 콘크리트가 나왔습니다. 이를 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콘크리트 사용 건축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옵니다.

<경향신문> 1979년 7월 26일치 기사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치부 이하 부분이 강회 및 잡석 다짐으로 시공돼 있었기 때문에 독립문 보수공사 때 철근콘크리트로 보강 공사를 한 것으로 뒤늦게 판명됐기 때문입니다.

5. 의류 회사 P.A.T의 예전 브랜드

독립운동가인 김항복 선생은 1947년 의류 회사인 평안엘앤씨의 메리야스 전문 브랜드 ‘독립문 PAT’를 창업했습니다.

<경향신문> 1982년 6월 24일치 광고(위)와 1985년 4월 18일치(아래) 광고

김항복 선생은 평안도 출신으로 광복 뒤 설립한 회사에 독립문 로고를 넣음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민족 부흥에 대한 깊은 염원을 담았습니다. ‘독립문 PAT’는 1971년에 ‘PAT’로 브랜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독립문 PAT’라는 이름을 한참동안이나 사용했습니다.

참고문헌

<한민족독립운동사> 1 권 국권수호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 11 권 한민족독립운동의 기본흐름

대죠션독립협회회보

한국사연구휘보 제 174 호 2016 년 제 3 호 < 묻혀 있는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윤치호일기 > 1897 년 2 월 22 일조 참조

< 독립신문 > 1897 년 5 월 25, 1898 년 1 월 18 일 , 1897 년 5 월 25 일자 참조

< 동아일보 > 1924 년 7 월 15 일자 참조

< 한겨레 > 2010 년 1 월 3 일자 참조

PAT 공식누리집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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