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충에 감염돼 '돌덩이'가 된 너구리의 눈물

입력 2017. 11. 20. 11:29 수정 2017. 11. 20.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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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몸 전체 털 빠지고, 가려움증 유발
가족이 함께 살고 공동화장실 이용
주변 개체간 접촉 잦아 쉽게 전파
발견하면 전문 구조기관에 알려야
사람도 감염되지만 위험하지 않아

[한겨레]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의 모습은 마치 돌덩이 같다. 야외에서 녀석을 만난다면 흠칫 놀랄 만하다.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가 있다면 누가 믿을까? 메두사의 눈을 마주하거나, 마법사가 나타나 살아있는 존재에게 돌로 변하는 마법을 부렸다는 신화 속에나 나올 이야기일 테니 당연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돌덩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무언가가 돌덩이를 닮은 것이다. 이 무언가는 분명 살아있기에 움직인다. 움직이는 돌덩이, 녀석의 정체는 ‘개선충증에 감염된 너구리'이다.

정상적인 너구리의 모습. 위의 개선충증 감염 너구리와 비교해 보면, 과연 같은 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개선충증(Scabies, Sarcoptic mange)은 외부 기생충인 개선충(Sarcoptes scabiei)이 원인체이고, 대다수의 포유류가 이 기생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지만 국내 야생동물 중에는 단연 너구리가 감염에 취약하다. 개선충증에 감염된 너구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대체로 안쓰럽다, 무섭다, 징그럽다, 더럽다,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너구리를 위협하는 개선충의 확대 모습.

너구리가 개선충증에 취약한 데는 녀석의 생태적 특성이 한몫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너구리는 굴과 같은 곳을 은신처로 삼아 배우자나 새끼와 함께 살기 때문에 일단 감염되면 가족 모두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크다. 또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주변의 다른 개체들과 의사소통하는 등 교류하는 특성이 있어 개체 간 접촉도 잦다. 게다가 개선충은 어떠한 이유로 면역력이 낮아진 개체가 아닌, 건강한 개체라도 얼마든지 감염시킨다는 점도 위협적이다.

개선충증에 걸린 새끼 너구리 남매. 너구리는 대체로 배우자 혹은 가족 단위로 무리생활하기에 개체 간 접촉에 따른 질병 전파 가능성이 크다.

개선충증에 걸리면 보통은 귀와 겨드랑이, 복부, 다리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의 털이 빠지고, 심한 가려움증, 표피 박리, 만성 피부염 등을 유발한다. 갈라진 피부에 상처가 발생하면서 2차 감염에도 취약해진다. 심한 가려움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해져 먹이를 먹을 기회 역시 감소한다. 이는 당연히 체중의 감소와 탈수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심각한 영양결핍과 면역력 저하, 저체온증에 따른 폐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너구리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인 셈이다.

개선충에 감염되어 정상적으로 먹이활동을 할 수 없게 된 너구리 형제가 녀석들을 불쌍하게 여긴 누군가가 놓아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있다.

개선충증 감염은 너구리의 개체군을 조절하는 폐사 원인 중 차량과의 충돌과 더불어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일본에 서식하는 너구리를 대상으로 한 연구 가운데는 개선충증 감염이 너구리의 가장 큰 폐사 원인이라고 본 것도 있다. 너구리의 개선충증 감염은 특히 겨울철에 잦다. 낮아지는 기온과 먹이활동의 제한 탓에 겨울은 정상적인 너구리조차도 살아남기 가장 힘든 계절이다. 그만큼 몸의 면역능력이 떨어져 더욱 잘 감염될 개연성이 있다.

개선충증은 사람에게도 감염될 수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감염되더라도 사람의 몸에선 생활사를 이어갈 수 없어 증식하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연적으로 없어진다. 다만 한동안 가려움증으로 인한 고생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종사하는 직원들은 야생동물과 접촉하는 일이 많다. 그만큼 질병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예방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매년 한두 명이 개선충증에 의해 잠시나마 가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뭐, 모두 잘 살아있다.

개선충 증에 걸린 너구리를 다루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최대한 직접 접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개선충증에 걸린다고 너구리가 무조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조기에 발견해 구조한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털이 빠져 떨어진 체온을 유지해 주면서 수액 처치로 탈수를 막고 전해질을 보충한다. 동시에 항생제와 항기생충제 같은 약물투여를 병행한다면 치료가 가능하다.

다만 감염 초기에는 활동성이 떨어지기 전이므로 보통의 너구리처럼 마주할 가능성이 작고, 설령 만나더라도 경계반응과 운동성이 남아있는 상태라 구조하기 역시 쉽지 않다. 중증으로 번지고 나서야 그나마 눈에 띄어 구조가 이루어진다. 구조센터에 들어오는 너구리의 대다수는 이미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태이다.

감염이 매우 심각한 상태로 발견된 너구리의 모습. 몸에 붙어있는 노란 것은 파리 알이다. 파리를 쫓을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개선충증의 치료가 끝났다고 바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다시 어느 정도 털이 자라나 보온능력을 갖출 때까지 구조센터에 머물게 된다.

개선충증 치료가 끝난 너구리의 모습. 털이 다시 자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야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이나 전염병이라면 기겁을 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자연 생태계에서의 질병은 꽤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거부터 존재해 오면서 특정 개체군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조절해 생태계를 유지하는 균형자 구실을 한다.

하지만 오늘날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오염, 인간의 거주지 확대와 농토 확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점차 줄어 왔다. 그 결과 좁은 지역에 많은 야생동물이 몰려 서식하면서 전염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거나, 사람이나 인가의 가축과 야생동물의 접촉 가능성이 커진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문제다.

질병이 생태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 해도 질병에 걸린 동물을 발견했을 때 마냥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하고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썩 바람직하지 않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의 기회를, 치료가 불가능하면 최소한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줄여주거나 다른 개체 간의 전파 가능성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선충증에 감염된 너구리는 먹이를 이용한 포획틀로도 쉽게 구조할 수 있다. 다만 보온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포획틀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머무는 동안 추위를 덜 느낄 수 있도록 비닐이나 이불 등을 이용해 보온에 신경 쓰는 것이 좋다.

돌덩이처럼 변해버린 야생동물을 갑작스레 마주한다면 누구나 걱정이 앞설 것이다. ‘혹시나 나에게 감염되면 어떡하지? 위험하지 않을까?', ‘저게 뭐야, 징그러워, 더러워…' 같이 말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질병에 걸린 야생동물을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 접촉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꼭 직접 만지고 구조해야 하는 건 아니다. 녀석들을 살피고, 전문 구조기관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장 포획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라면 장갑을 착용해 피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고, 포획용 채나 담요·이불 등을 이용해 덮어 잡은 후 상자(너구리는 종이상자를 뜯고 나갈 수 있으므로 플라스틱 케이지를 이용하자)에 넣어 보호하면 된다. 추가로 약간의 물을 제공하거나, 따뜻한 곳에 두어 체온유지를 돕는 것 역시 필요할 수 있다.

생명의 끈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녀석에게도 햇빛은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들은 처절할 만큼 힘을 내어 버티고 있고, 지금 바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부디 외면하지 말아 주시길 빈다.

질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익숙하지 않고 징그러운 겉모습 때문에 혐오와 편견의 대상이 되거나 외면당한다면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녀석들은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버티고 있고, 지금 바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돌덩이로 변해버린 너구리를 구해주는 신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쩌면 여러분일지 모른다. 부디 외면하지 말고, 함께 해피엔딩을 써내려가 주길 부탁드린다. 글·사진 김봉균/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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