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낙태약'으로 초기임신 중단할 수 있다면?..20대 여성들, 자판기 설치 퍼포먼스

최미랑 기자 2017. 11. 1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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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여성단체 ‘페미당당’회원들이 약물을 사용한 임신중단을 촉구하고 먹는 낙태 유도약인 ‘미프진’의 국내 도입을 요구하는 뜻으로 ‘낙태약 자판기 설치 퍼포먼스’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수술대에 오르는 대신 약물 복용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는 실제로 가능하지만 낙태가 법적으로 금지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이다.

최근 낙태 비범죄화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여성들이 낙태약 자판기 모형을 서울 시내에 설치하고 약물을 통한 임신중절 방법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였다.

19일 서울 중구 정동길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앞 인도에 자판기가 한 대 놓였다. 자판기에는 ‘우리는 왜 낙태약을 자판기에서 살 수 없을까’라는 문구가 붙었다.

“여러분, 임신 초기 낙태가 수술이 아닌 약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후 2시쯤 주최 측의 설명과 함께 자판기 운영이 시작됐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안에서는 진짜 낙태약이 아닌 비타민제나 젤리가 나왔다. 낙태 비범죄화와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단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문구도 함께 제공됐다.

이날 낙태약 자판기를 설치한 것은 20대 페미니즘 단체인 ‘페미당당’이다. 페미당당은 “인공 임신중단이 불법인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임신중단이 수술적 방법으로 이뤄지며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며 “한국에서도 하루 빨리 안전한 임신중단과 평등한 임신중단권을 위해 낙태죄 폐지와 ‘미프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프진은 1980년대 프랑스의 한 제약회사가 개발해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경구용 인공유산 유도제의 상품명이다. RU-486으로도 알려진 이 약은 미국에서는 2000년부터 판매가 승인됐고, 2005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됐다.

19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여성단체 ‘페미당당’회원들이 약물을 사용한 임신중단을 촉구하고 먹는 낙태 유도약인 ‘미프진’의 국내 도입을 요구하는 뜻으로 ‘낙태약 자판기 설치 퍼포먼스’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페미당당 우지안씨(23)는 이날 퍼포먼스에 대해 “실제로 미프진이 국내 도입된다면 당연히 자판기에서는 판매할 수 없고 의사의 처방 등 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 임신 중단은 여성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판기’라는 상징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같은 단체의 신화용씨(24)는 “국내에서는 낙태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수술적 방식 외에 약물적 방식으로 임신을 중단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다”며 “가임기 여성에게는 그동안 이런 정보가 전혀 제공되지 않았고,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가짜 낙태약이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현실에 문제제기 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자판기 앞에 줄을 선 참가자들은 대부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 캠페인을 접하고 취지에 공감해 찾아왔다고 했다. 트위터를 보고 친구와 함께 온 김성하씨(21)는 “최근 낙태죄를 폐지하고 미프진을 도입하라는 청와대 게시판 청원도 20만명이 넘게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임신을 유지할지 중단할지는 여성이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하고 수술보다 안전한 방법이 있다면 이 방법도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정모양(17)도 친구와 함께 줄을 섰다. 정양은 “아이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닌데 (현행법상) 낙태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는 처벌하고, 남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등 모순이 커서 낙태죄는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임신중단을 태아에 대한 생명권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원빈씨(26)는 “지난해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취지로 열린 ‘검은 시위’에도 참석했었다”며 “아이는 여성이 낳고 싶을 때 낳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국가나 법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현직 의사는 “저는 의사인데도 그동안 수술적 방법이 임신 중단의 기본이라고만 생각해 왔다”며 “의료 교육 과정에서도 임신 중절을 성폭행 등으로 인한 ‘문제임신’의 관점에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선택권·건강권 차원에서의 임신 중절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형법 제269조에서는 낙태를 한 여성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또 제270조에서는 낙태 시술을 한 의사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지난 9월30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이 같은 조항을 없애 낙태죄를 폐지하고, 미프진을 국내에 도입하라는 취지의 게시물이 올라와 한 달 만에 23만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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