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경찰서 24시간 불침번 6개월..'태극기 집회' 노인들의 순정

2017. 11. 1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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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자정, 집회신고 위해
남대문경찰서 로비서 '불침번'
"구속도 탄핵도 못막았지만
박근혜 정부 진실 알릴 것"

[한겨레]

태극기시민혁명 국민운동본부(국본) 소속 회원이 지난 16일 서울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에서 ‘밤샘 당직’을 서고 있다. 국본은 매주 토요일 대한문 앞에서 집회를 열기 위해 지난 6개월 간 24시간 내내 민원실을 지키며 항상 ‘1등’으로 집회 신고를 접수한다.

서울 중구 남대문경찰서 1층 민원실은 보수단체 활동가들의 발길이 몇개월 전부터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민원실 한쪽의 낡은 의자를 벗 삼아 고생스런 불침번을 선다. 주로 50대 이상의 나이다. 세명 정도가 함께 앉을 수 있는 너비의 긴 의자에 놓인 전기장판과 반듯하게 접힌 담요 두장이 늦가을 추위를 이겨내는 도구다.

“저희는 대한문 앞 태극기 집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에요. 경찰서가 매일 자정에 집회신고를 받기 때문에 당번을 서가며 자정에 집회신고를 하고 갑니다.” 지난 9일 밤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에서 시간을 보내던 이보희(54)씨가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집회가 1년을 맞은 것처럼 박 전 대통령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일명 ‘태극기 집회’도 19일로 1주년을 맞는다. 지난해 11월19일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자유총연맹 등 80여개 보수단체가 서울역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친박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는 지금도 규모를 달리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대한문 앞은 ‘보수의 심장’이자 태극기 집회의 공간이 되어 왔다. 이들은 왜 1년 넘는 시간 동안 집회를 이어오는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거기 조금만 앉아 있어도 등이 얼마나 시린지 몰라. 저쪽에 의자 가지고 와서 이리 앉아요.” 9일 저녁 8시께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에 앉아 있던 기자를 향해 원종례(64) 씨가 말을 걸어주었다. 경찰서 밖과 통하는 유리문 앞에 쭈뼛거리며 서있는 기자를 자신들 쪽으로 불렀다. “저녁 먹었어요?” 원 씨는 큰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어 내놓았다. 그는 자신을 태극기시민혁명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집행부라고 소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결혼도 안 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신 분인데 너무 안타까워요. 육영수 여사를 존경하는 것처럼 저는 박 대통령도 존경해요. 박 대통령에게 쓰인 누명만 벗길 수 있다면 저는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박 전 대통령이 구속될 때 그는 서울구치소에도 찾아갔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울구치소를 ‘서청대’라고 부른단다. ‘서울구치소 내 청와대’라는 것이다. “죄 없는 대통령을 몰아낸 것이니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도 인정할 수 없고, 박 대통령이 있는 서울구치소가 청와대예요.” 원씨가 강조하듯 말했다.

국본은 지난 4월 결성되어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한문 앞 친박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정확한 집회 이름은 ‘탄핵 무효 석방 촉구 집회’다. 지난 12일까지 대한문 앞에서만 30회째 집회를 열었다.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민원실에서 대기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경찰서 로비는 난방을 하지 않는다. 원씨와 함께 민원실에 함께 앉은지 세시간쯤 지나자 몸에 한기가 돌고 다리가 조금씩 떨렸다.

이들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6조1항 ‘옥외집회나 시위를 시작하기 720시간 전부터 48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는 조항에 근거해서 한 달 뒤 열 집회를 미리 신고하고 있다. 한달 전에는 집회 신고를 해야 다른 단체가 대한문 앞 공간을 선점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단다. 지난 6개월간 태극기시민형명 국본은 대한문 앞 집회신고를 독점해왔다. 남대문경찰서는 매일 자정 집회신고를 받고 있다.

이날 원씨는 이보희 국본 대변인과 함께 불침번을 섰다. 이보희 대변인(54)은 지난해 10월까지는 중소 게임회사 대표로 있었지만 지금은 단체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그만둔 상태라고 했다. 그는 “좌파가 말하는 분배에 동의할 수 없고 80년대 대학에서 선배들이 주는 좌익성향 책을 보며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깨달았다”고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이들은 대화 내내 ‘박근혜 구출’, ‘시민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언론에 호도된 사람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진실을 알려주고 의식을 일깨우는 게 시민혁명”이라고 설명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에도 불법 절차가 있다고 이들은 생각하기에 (석방이 아니라) 구출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이어가던 이 대변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잘못된 건가요? 정부 정책을 시행하는 입장에 있어서 정부에 반대되는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을 지원할 순 없잖아요.” 이 대변인의 손에는 1979년 발간된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들려 있었다. 표지에 ‘인천 상륙의 영웅, 미국의 시저 맥아더’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박혔다. 이 대변인은 젊은 시절 자신이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이 취미다. 이들은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에 얼마 전까지 국민교육헌장 문구를 붙여놓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13일 아침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은 국본에서 ‘행진 때 성조기를 드는 담당’을 맡았다는 이아무개(50)씨가 지키고 있었다. 이씨는 지난해 12월 초부터 친박집회에 참여했다. “미국이 우리가 위태로울 때마다 도와줬기 때문에 성조기를 들고 집회에 나가요. 지금 우리나라는 위태로와요.”

그는 이어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 맞고 죽은 게 아니라 누가 죽인거다”,“문재인은 전자개표 조작으로 당선된 대통령” 등 근거없는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밤 10시부터 남대문경찰서 민원실을 지키고 있다는 이씨 눈가의 잔주름이 그의 고단한 하루를 대신 설명해주었다. 16일 아침 이보희 대변인을 경찰서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여느 때처럼 오른쪽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달았다. 지난 8일 그를 만났을 때 ‘외출할 때마다 옷에 태극기 배지를 달고 나간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한민국 국민이 태극기를 다는 걸 부끄러워하면 되겠냐”고 이 대변인은 설명했다.

보수 노인들의 집단 사회참여 심리를 연구한 <할배의 탄생>의 저자 최현숙씨는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일상의 매순간 역사에 공조하고 가담하고 연루된다”고 썼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시민 혁명’을 위해 지난해부터 16일까지 약 4400시간을 경찰서에서 보낸 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역사에 어떻게 가담하게 될까.

“우리는 박 전 대통령의 구속도, 탄핵도 막지 못했지만, 장기간이 걸리더라도 ‘시민 혁명’이란 방향성을 가지고 갈 겁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중단하지 않을 겁니다.” 이 대변인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글·사진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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