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포항 지진 대피소에서 만난 '나홀로' 아이들, 돌봄 절실

백경서 2017. 11. 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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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대피소에서 진행된 아동 심리상담
비 맞고 선 남성 그린 한부모 가정 학생
지진트라우마 사각지대 놓인 아이들
보호자 출근하자 낮시간 혼자 보내
포항의 한 대피소에서 상담사가 아이들을 상담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지진이 날 때 집에 혼자 있었어요. 옆집에서 물탱크 터지는 소리가 '펑'하고 크게 들려서 깜짝 놀랐어요. 너무 무서워서 장롱에서 가장 두꺼운 이불을 꺼냈어요. 두꺼운 이불 속에 있으면 위에서 뭐가 떨어져도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 잘했죠?"
포항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아동양육시설 어린이들이 간식을 먹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17일 오전 11시쯤 경북 포항 지진 대피소인 환호여자중학교. 김가영(15·가명)양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심리상담사에게 지진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양은 엄마와 둘이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살고 있다. 한부모 가정 자녀다. 지진을 났을 당시에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집에는 김양 혼자 있었다.
김양은 대피소에서 1시간가량 상담을 받았다. 상담 내내 명랑한 표정이었지만, 심리상담사는 김양의 심리상태가 극도로 불안하다는 걸 단번에 눈치챘다. 김양이 그린 그림을 보고서다.
포항의 한 대피소에서 상담사가 아이들을 상담하고 있다. 백경서 기자
김양의 그림에는 한 남자가 서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우산이 없는 채였다. 특이하게도 빗방울이 유달리 굵었다. 김양은 "이 남자는 시험에서 떨어져서 패배했어요. 그래서 소나기가 억수같이 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상담사가 김양에게 "비가 언제 그칠 것 같으냐"고 묻자 김양은 "그칠 것 같지는 않는데…내일 오후?"라고 답했다. "남자의 고통이 끝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상담사에 따르면 비가 대각선으로 오도록 그리거나 빗방울이 굵을수록 정서적 불안감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비를 맞고 있는 건 김양 자신이라고 상담사가 귀띔했다. 비가 내리는 시간이 길수록, 표정이 어두울수록 김양이 힘들다고 분석할수 있다고 한다.

아이마다 그림은 제각기 달랐다. 하지만 상담사가 "넌 이겨낼 수 있어"라고 안아줄 땐 대부분이 "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며 울먹였다.

로뎀나무 상담사가 상담이 끝난 아이를 안아주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날 봉사활동을 나온 3명의 상담사는 환호여중 지진 대피소에 머물고 있는 10여 명의 아이들을 상담했다. 이들은 정부가 지진 대책 차원에서 파견한 게 아니라 본인들이 자원봉사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현장에 왔다.

10년간 아동을 상담해온 양인정(41)씨는 "아이들 대부분이 불안한 상태다. 특히 한부모·조부모 가정 자녀 등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친구들은 지진 발생 전에도 정서적으로 불안한 성향이 있는데다 지진까지 겪는 바람에 더 힘들어 한다"고 말했다.

실제 김양뿐만 아니라 포항 지진 대피소 곳곳엔 한부모, 조부모 가정 자녀가 있었다. 이 아이들은 부모가 일하러 간 낮에 혼자 휴대전화를 보거나 잠을 잤다. 김양도 혼자 구석에서 있는 걸 상담사가 데려와 먼저 말을 걸었다.
경북 포항의 한 아동양육시설이 지난 15일 규모 5.4의 강진과 계속되는 여진으로 인해 파손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포항시 북구 환호동에 있는 선린애육원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지내는 보호시설이다. 지진으로 건물 곳곳에 금이 간 선린애육원 아이들 79명이 대피해 모여 지내는 환호동 항구초등학교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진 후 심리 상담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루 뒤인 18일 찾은 항구초에는 10여 명의 교사가 79명의 아이를 한꺼번에 보고 있었다. 3~4세 어린아이부터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도 2명 있었다. 한 3살 남아는 장난감 팽이를 가지고 놀면서 기자에게 "(지진났을 때) 팽팽 돌았어요"라고 말했다.
경북 포항의 한 아동양육시설이 지난 15일 규모 5.4의 강진과 계속되는 여진으로 인해 곳곳이 파손돼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애육원 교사는 "지진 당시 건물에 6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전등이 떨어지고 벽에 타일이 부서지면서 애들이 많이 놀랐다. 몇몇 애들은 극도로 불안감을 호소해 상담이 절실하다"고 상황을 전했다.

실제 지난 밤 여진으로 진동이 느껴지자 누워있던 애들이 벌떡 일어나서 떨기도 했다. 그는 "애육원 내 상담사가 1명 있지만 지진이라는 재난 상황인 만큼 정부에서 체계적인 상담지원을 해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보건소 직원 1명이 79명의 아이들을 지켜봤다. 이마저도 의사가 아닌 일반 행정 직원이었다.

선린애육원 아이 중 한 아이가 손을 다친채로 밥을 먹고 있다. 백경서 기자
이처럼 지진 이후 돌봄이 더 절실해진 아이들이 곳곳에 있지만, 당국은 전체 현황조차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포항시는 이재민 1797명(17일 오전 11시 기준) 중 미성년자가 몇명이나 되느냐고 물어도 "정확히 모른다"고 반응하고 있다.

앞서 17일 오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이재민의 불안감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한 재난심리회복 상담실도 아이들에겐 무용지물이었다. 행정안전부·보건복지부와 국립정신병원, 시·도 정신건강복지센터 인력으로 구성된 상담팀은 포항지역 3개 대피소(흥해실내체육관·기쁨의 교회·항도초)에 투입돼 상담에 나섰다. 포항시 상황실에 따르면 각 3명씩 총 9명이다. 하지만 79명의 애육원 아이들이 있는 항구초에는 아예 상담실이 마련되지 않았다. 상담실이 있는 대피소에선 강당 무대위 등 개방된 장소에 상담실이 있어 소극적인 아이들이 선뜻 찾기 어려워 보였다.

17일 오후 포항의 한 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단체로 생활하는 아동양육시설 어린이들이 인근 교회에서 전달한 피자와 치킨을 간식으로 먹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아동 심리상담사들은 아이들의 경우 직접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드물기에 일일이 찾아가는 상담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현진 심리상담사는 "지진이라는 큰 사건을 겪은 아이들을 혼자 방치하는 건 또다른 학대와 마찬가지다. 무작정 상담소만 마련한다고 애들이 오지는 않는 만큼 직접 찾아가는 상담이 필요하다. 여진까지 계속 이어지면 더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17일 포항항도초등학교 강당에서 하루일과가 지루한 어린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상담하고, 부모가 자리를 비울 경우 대신 돌봐 줄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채규만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당국에선 단순 물품 지원으로 그치지 말고, 미성년자 현황을 신속히 파악해 각 대피소나 보건소마다 아동돌봄 및 상담 전문 인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 교수는 또 "지진을 겪은 부모와 아이 모두 정신적 스트레스가 클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선 당장 겨우살이와 무너진 집이 걱정일 테지만 중·고생이라도 절대 혼자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서는 안 된다"라고 당부했다.

포항=백경서 기자 baek.kyugseo@joonga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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