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아 몸에 호스가 주렁주렁.. 딸은 미쳐 버렸다

김창엽 입력 2017. 11. 1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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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배의 횡설수설 육아기 2] 생후 이틀 만에 중환자실에 간 손자

[오마이뉴스 글:김창엽, 편집:이주영]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응급실로 갔는데,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주었어요."

지난 9월 하순, 사위로부터 손자가 병원에 입원 조치 됐다는 말을 들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이틀도 못 된 아이가, 출생 다음 날 사돈과 아이 엄마와 서울에 올라가 봤을 땐 너무도 건강해 보였던 '핏덩어리'가 입원이라니, 그것도 중환자실에.

직감적으로 '큰일이 있구나' 생각했지만, 짐짓 차분하게 응대했다.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인척 또 주변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아이가 세상 빛을 보기 무섭게 중환자실 신세를 진 경우가 없어 적잖이 불안했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치자면, 신생아 아비인 사위가 더 할 것이기 때문에 나라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수유하는 딸. 손자의 몸에 이런 저런 의료용 호스 등이 부착돼 있는 모습을 보고나면 딸은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곤 했다.
ⓒ 김창엽
"혈변이 계속 나와요. 병원에서는 하루 두어 번씩 연달아 검사하고 또 피를 뽑아 체크하고 있는데 원인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걸리나 봐요."

생물학 계통을 전공한 사위는 상당히 소상하고 정확하게 중환자실에 입원한 손자의 상태와 의료진의 보살핌 등을 10~20분 단위로 전해 왔다. 사위는 일터에도 나가지 못하고 중환자실과 제 처가 입원한 조리원을 왔다 갔다 하며 나에게 문자메시지로 실황 중계하듯 충실히 '보고'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이삼일쯤 지났을까? 손자의 상태는 그때까지도 이렇다 할 호전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혈변은 계속됐고, 황달은 더 심해져 신생아에게 흔한 수준을 넘어서 자못 심각한 편이라는 것이었다.

의료진은 여전히 혈변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위가 전하는 주치의 말에 따르면, "산모의 피를 흡입한 듯한데, 검사가 잘못됐는지 혈변 속 피가 신생아의 혈액인 걸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그쯤 되니 시골에 가만히 앉아서 사위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을 수만은 없었다. 손자가 입원한 뒤 사흘 만에 아이 엄마와 함께 서둘러 다시 상경했다.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2차례로 제한돼 있었는데, 사위의 안내로 들어가 보니 손자는 인큐베이터 비슷한 장치에 치렁치렁 몇 가닥의 줄을 주먹만 한 몸 여기저기에 단 채로 잠들어 있었다.

"아기 발에 바늘 꽂는 걸 보라고?"

 출생 직후 손자.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핏덩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 김창엽
면회를 끝내고 병원에서 멀지 않은 조리원에서 숙식을 하던 딸을 찾았다. 외견상은 산모치고는 건강했지만, 딸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접견실에 자리잡은 딸은 몇 마디 입을 떼기 무섭게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딸은 아주 예민해진 상태로, 좀 과장하면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걱정 될까 봐 사위가 우리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는데, 딸이 병원에서 의료진들에게 큰소리를 치는 등 '소란'을 벌였다고 한다.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는 딸이 훌쩍이며 이 얘기 저기 얘기를 입에 담는데, 그걸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아이 엄마도 덩달아 눈물을 훔쳤다.

이쯤 되면 사실 내 처지는 확실해지는 것이다. 내가 신경 써야 할 대상이 신생아인 손자 1명에서, 딸, 사위, 아이 엄마까지 4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사위가 귀띔하길, 병원에서 의료진에게 좀 무례할 정도로 따지고 들었는데, 그건 그들이 특별히 잘못해서가 아니라 제 아내를 다독일 심정으로 일부러 '쇼'를 했다는 것이었다.

사위의 깊은 속이 참으로 가상했다. 못 나가는 일터 눈치 보느라, 중환자실에 있는 제 새끼 틈나는 대로 살펴보느라, 조리원에서 넋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제 아내 달래느라 온종일 몸도 마음도 바쁠 텐데. 그러느라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던 사위를 보고 있자니 그러다 곧 병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평소 차분하던 아이 엄마는 서울서 손자와 딸 면회를 끝내고 시골집으로 돌아오자, 얼굴에 그늘이 완연했다. 딸을 안심시키려고 애써 불안한 내색을 감췄는데, 몸만 성할 뿐 이튿날부터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 하루 종일 불안·근심 모드였다. 아이 엄마 역시 마음의 병이 생긴 것이었다. 아이 엄마와 딸을 달래기 위해 없는 말도 지어내고, 견강부회도 하고, 일부러 살짝 말을 비틀어 전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런저런 과학 논문을 읽어내는 게 한때 밥벌이 가운데 하나였던 나는 인터넷을 통해 열심히 손자의 병증과 관련됐을 만한 주제의 국제 의학 논문들을 뒤졌다. 하루에 20편 이상을 쓱쓱 읽어 치운 날도 있었다.

주로 밤에 침침한 눈으로 논문을 읽고 나서는 아이 엄마나 딸이 들으면 충격을 받거나 할 내용은 빼고, 손자가 무사히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할 만한 근거가 될 내용만을 주로 전했다. 부정적인 대목들은 사위와 나 둘이서만 공유했다. 예를 들면, 장중첩이나 장세포 괴사가 원인일 경우 신생아의 배를 갈라야 혈변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등의 얘기는 삼갔다.

내 딸이라서 두둔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막 출산한 산모들은 이런 상황에 놓이면 평소처럼 침착할 수 없을 게 당연할 것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남자들의 눈으로 산모들을 재단할 수는 없다. "입원을 시키면 장차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번지르르한 말을 아무리 늘어놓는다 해도, 출산 직후 타의에 의해 제 새끼와 떨어지게 된 엄마가 '미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리원 면회실에서 본 딸은 짐승의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었다. 애가 타서 막 낳은 제 새끼를 찾아 헤매는 짐승 어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간중간 제정신이 돌아와, "지금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설득하면 잠깐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이내 우울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채혈한다고 발바닥에 바늘을 꽂을 때 죽어라 우는 걸 보라고?"

'흔히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할 때 정말 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했다.

큰 일이 없을 거라 믿는 이유

좀 뜬금없고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세월호 엄마들의 마음을 산모들보다 잘 이해할 사람도 드물 듯하다. 실제로 딸은 사회문제나 세상사,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친정집에 돌아온 뒤 어느 날 "세월호 엄마들의 마음을 그 전과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하기도 했다.

엄마들을, 때로는 여성들을 싸잡아 '감성적'이라는 말로 은근히 낮춰보는 예가 적지 않다. 섬세함이니, 여성적이니, 감성적이니 하는 말이 문자 그대로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남성들이 합리적이니 어쩌니' 하며 대비시킬 땐, 감성이 이성보다 한 수 밑이라는 전제를 알게 모르게 바닥에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비약일 수 있지만, 감성에 호소하는 게 직업인 연예인들을 '딴따라'라는 식으로 부르는 데는 이성이나 합리성을 중시하는 과학자들이나 법률가들보다 그들이 열등하다는 인식이 작용한 탓은 아닐까?

사람은 놀랄 만큼, 때로는 자신마저도 속일 만큼, 감성적 혹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단적인 예로 선거 판세를 결정짓는 게 정책보다는 유권자들의 감성일 때가 더 많지 않은가.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보복이니 분풀이니 하는 용어를 동원하는 것도 사실은 감성에 기대보려는 것이다. 감정이나 감성은 동물 중 가장 이성적이라는 인간의 사고를 좌지우지하는 요체일 때가 많다.

신생아는 두말할 나위가 없고, 산모 역시 감성이나 감정에 의한 지배를 유달리 많이 받게 돼 있다.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 가끔 들었던 얘기 가운데 '세 살 되기 전 아이들은 세상을 다 안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특정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이와 유사한 얘기들이 구전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전통사회에서 그만큼 보편적으로 퍼졌던 얘기일 터인데, 이는 신생아들이 매우 '섭리적'인 존재임을 암시하는 말로 나는 풀이한다.

신생아 손자가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끝내 큰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 스스로 되뇔 수 있었던 건 섭리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자가 세상에 나온 건, 아니 세상의 모든 아가들이 엄마 배 밖으로 나온 건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존재여서일 것이다. 과학적 잣대로만 따지자면, 태아들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을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은 사산하지 않고 햇빛을 본다.

 손자 보기의 예행 연습이었을까. 2년 전 우리 식구가 된 망울이의 어렸을 때 모습. 개 새끼도 사람 새끼도 다를 게 없다. 육아의 원칙 또한 마찬가지일 게다.
ⓒ 김창엽
감성과 이성 중 섭리에 가까운 쪽은 아무래도 감성일 것이다. 진실한 감정은 고차원의 이성을 끝내는 능가한다. 손자가 아니라도 무릇 세상의 생명은 진정한 감성과 감정으로 대해야 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아이 엄마와 나 둘만이 사는 시골집에 두어 해 전 태어난 지 한 달도 못 되는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와 우리는 이후로 세 식구가 되었다. 우리는 반려견 '망울이'와 함께하며 진실한 감성 혹은 감정은 개든 사람이든 삶의 고갱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장인어른, 무슨 일이 있다면 더 공부하는 것 포기하고 국내에서 자리잡아 보겠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면회를 앞두고 사위가 조용히, 그러나 이미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결심을 밝혔다. 좋은 조건에 외국으로 취업형 유학을 나가는 게 거의 확정적인 단계였는데, 제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면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더 없는 진심을 담은 얘기였다. 나는 사위의 결심에 답하는 대신 윗니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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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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