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성의 씨네 IN&OUT] 만화계 '찰리 채플린'.. 변함없는 디즈니 간판스타

김신성 입력 2017. 11. 18. 19: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89번째 생일 맞은 미키 마우스 / 1928년 만화 '증기선 윌리' 통해 탄생 / 각종 캐릭터 상품 등 세대 이어 인기 / 20세기 초반부터 문화콘텐츠 위력 입증

긍정적인 사고를 지녀, 무슨 일을 당해도 다시 일어서며 남을 배려하는 세심한 품성을 보인다. 정의감이 강해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나서서 말리고, 싫어하는 상대와 좋아하는 상대에겐 각각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은근슬쩍 장난치기도 좋아해 친구 도널드를 골탕 먹이기도 하지만 덤벙대서 무언가 잘 잊어버리는 탓에 여친 미니로부터 종종 꾸지람을 듣는다.

미국에서는 믹(Mick)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는 그를 미라오수(米老鼠)나 미치(米奇)라 하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폴리노(Topolino)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의 호칭은 라통 미겔리투(Ratón Miguelito), 핀란드는 미키 히리(Mikki Hiiri), 인도네시아는 미키 티쿠스(Miki Tikus), 그리고 한국에선 그의 본명 미키 마우스(Mickey Mouse)를 그대로 쓴다.

89년 전 오늘인 1928년 11월 18일, 미키 마우스는 미국 뉴욕 콜로니 극장에서 세계 최초의 유성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뽀빠이, 도널드 덕, 벅스 버니, 스머프, 아톰, 도라에몽, 헬로 키티, 세일러문, 피카츄 등 세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줄줄이 등장했지만 미키 마우스의 인기는 여전하다. 주인공 캐릭터의 왕중왕이다.

1930년대에 미키 마우스 인형을 가졌던 소녀라면 증손자가 미키 마우스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캐릭터와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디즈니 캐릭터들은 유독 장수한다. 영화·TV·뉴미디어·그림책·놀이공원 등 각종 상품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 디즈니는 이미 문화 콘텐츠의 위력과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 그 선두에 미키 마우스가 있다.

많은 이들이, 월트 디즈니가 낡은 하숙집 천장에 오가는 쥐들을 보고 미키 마우스를 창조해낸 것으로 알지만 이는 나중에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일 뿐이다. 1920년대 중반, 월트 디즈니는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검은 고양이 펠릭스에 버금가는 애니메이션 ‘행운의 토끼 오즈월드’를 만들어낸다. 청년기부터 함께 작업을 해오던 어브 아이웍스와의 공동 작업이었다.

하지만 오즈월드가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순간, 투자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캐릭터 판권이 배급업자에게 넘어가고 만다. 상심한 두 사람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캐릭터를 개발해야만 했다. 새 아이디어는 생쥐였다. 아이웍스에 의해 동글동글한 몸체에 가늘고 긴 팔다리를 지닌 귀여운 생쥐가 탄생했다. 애니메이션 사가들은 이 순간을 진정한 애니메이션의 출발로 꼽기도 한다.

월트 디즈니는 새 식구가 된 생쥐의 이름을 ‘모티머 마우스’(Mortimer Mouse)라고 지었는데, 그의 부인 릴리언이 ‘미키 마우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붙였다.

미키 마우스는 귀여운 악동이었다. 사람들은 미키를 만화의 찰리 채플린이라 불렀다. ‘증기선 윌리’가 상영된 3주 동안 미키에겐 3만여 통의 팬레터가 쏟아졌다. 찰리 채플린으로부터 함께 공연하자는 제의를 받았고 밀랍인형으로 유명한 마담 투소도 미키 마우스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월트 디즈니는 1932년 캐릭터 사업에 직접 뛰어들어, 인형에서 칫솔에 이르는 수백 가지 미키 마우스 상품을 내놓았다. 미국은 미키 마우스 천지가 되었다. 미키 마우스는 캐릭터 비즈니스의 잠재력을 처음으로 입증한 주인공이다.

신문 연재만화도 적극 활용했다. 1930년 1월 첫선을 보인지 6개월 만에 22개국, 40개 신문사로 팔려 나갔다.

미키 마우스는 결국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1935년에 미키 마우스 영화를 본 사람이 5억명에 달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내외도 백악관에서 미키 마우스를 빼놓지 않고 챙겨 본다고 말했다.

미키 마우스는 1978년 탄생 50주년을 맞아 애니메이션 캐릭터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정됐으며 지금도 디즈니의 영원한 마스코트로 남아 있다.

월트 디즈니는 생전에 이같이 말했다.

“꿈꿀 수 있다면, 꿈을 이룰 수 있다. 내가 이룬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생쥐 한 마리였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