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청춘에 희망을!] 격무·상사 갑질에 힘겨운 직장생활.. 사표 던지는 청년들

이창수 2017. 11.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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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어렵게 직장 들어왔는데../역대급 취업난에도 입사 성취감은 잠깐/자유로운 환경서 자란 80∼90년대생/권위적 조직문화·쳇바퀴 생활에 염증/지난해 신입사원 10중명 3명꼴 퇴사

한선현(28·가명)씨는 지난달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다녔던 회사는 국내에서 대표적인 물류업체다. 지난해 말 입사에 성공했을 때 주변의 부러움과 축하를 동시에 받았다. 초봉이 5000만원을 넘는 데다 ‘역대급’ 취업난을 뚫은 데서 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입사 후 시작된 인격모독으로 한씨의 회사생활은 비참했다.

10년 차 선배인 ‘사수’는 하루에도 몇번씩 100여명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때때로 얼굴에 서류다발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일 때문이라면 그러려니 할 테지만 대부분 신변잡기적인 지적이었다.

“일을 함께 하기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일 못하는 사람이나 거짓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재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는 정말 재미가 없다”는 말도 들었다. 수개월 동안 꾹꾹 참다가 회식 자리에서 조심스레 “힘들다”고 말해봤지만 “그럴 거면 그만두라”는 힐난만 돌아왔다. 그래서 그만뒀다. 1년 이상 일해야 받을 수 있는 퇴직금도 마다하고 9개월 만에 회사를 나왔다. 마음은 후련했다. 그러나 ‘돌취생(돌아온 취업준비생)’인 그에게 취업시장은 냉랭하기만 하다. 


회사 생활을 어느 정도 한 직장인이라고 해도 퇴사를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직장인 이영호(34·가명)씨는 새벽 어스름이 짙은 오전 6시면 출근을 준비한다. 몸은 천근만근. 도무지 풀릴 줄 모르는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1시간 거리의 회사에 8시 전까지 출근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는 어젯밤에도 오후 10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전날에도, 전전날에도 그랬다. 밥 먹듯 하는 야근에다 그나마 야근이 없는 날은 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칫솔을 입에 물고 본 거울 속에는 자신감 넘치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술, 담배에 찌들어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숱이 적어진 머리칼, 흐리멍덩한 눈을 가진 직장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이씨는 공연 기획자가 꿈이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20대 후반 부푼 꿈을 안고 대학로의 한 연극단에 들어가 무일푼으로 2년 가까이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러나 나아질 줄을 모르는 주머니 사정은 결국 그를 3년 전 늦은 나이에 중소기업에 입사하게끔 했다.

‘퇴사’란 단어를 하루에도 몇번씩 곱씹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월세날과 텅 빈 통장 잔고, 어느덧 30대 중반이 돼 버린 현실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이제는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신입사원 27.7%, 1년 이내 사표

퇴사를 고민해 본 직장인이라면 이들의 사연이 남 일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는 데서 오는 회의감과 정체감, 지긋지긋한 사내정치와 갑질 문화, 입사 때부터 시작되는 은퇴 고민 등은 직장인이 사직서를 만지게 되는 이유다.

퇴사 후 직면하게 될 난관들을 떠올리면 주저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에는 조기 퇴사를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는 게 직장인들의 ‘미덕’이었던 과거와는 달라진 풍경이다.

15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6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6년 신입사원 채용실태조사’에 따르면 1년 이하 신입사원의 퇴사율은 2012년 23.6%에서 2014년 25.2%, 지난해 27.7%를 기록하며 증가세를 이어갔다. 특히 300인 미만 중소기업의 신입사원 퇴사율은 32.5%에 달했다.

원하는 직장을 가기 위해 이른바 ‘취업 반수’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진 점이 조기 퇴사의 배경으로 풀이된다.

최근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구직자 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올해 취업하고 싶은 기업에 입사하지 못한다면 ‘일단 다른 곳에 취업한 뒤 다시 지원하겠다’는 응답이 49.8%에 달했다.

◆“권위주의 조직문화에 회의감 커져”

‘역대급’ 청년실업 속에서 가까스로 취업문을 연 청년들이 스스로 사표를 내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 직장 생활에 대한 기업과 구직자,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인식 간극이 크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구직자 대부분이 군부독재 시대를 지나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란 80∼90년대생이란 점을 지적한다. 수직적인 문화에 익숙지 않은 청년들이 조직생활에 빠른 염증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또 고용환경이 불안해지면서 입사 때부터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을 찾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박상현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대졸자의 직업이동경로를 조사해보면 저출산의 여파로 여러 형제와 부대끼며 배려심이나 양보심을 체득할 기회가 적었던 청년 중에는 조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서도 1년 이하 퇴사의 이유로 ‘조직 및 직무적응 실패’란 응답이 49.1%로 절반 가까이 됐고 ‘급여 및 복리후생 불만’(20%), ‘근무 지역 및 근무 환경에 대한 불만’(15.9%)이 그 뒤를 이었다.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직장 내 갑질’은 퇴사를 결심하는 결정적 이유다.

최근 간호사들에게 노출과 선정적인 춤을 강요해 논란이 된 한림대 성심병원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를 폭로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직장인 7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75.8%가 ‘최근 3년 내 갑질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임금 체불, 욕설, 괴롭힘을 당했다는 제보가 쏟아지는 등 갑질문화가 여전한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사표가 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퇴사자들은 ‘무작정 퇴사’에 대한 우려를 전한다. 자칫 ‘낙오자’ 꼬리표가 달리거나 취업절벽에 갇힐 수 있어서다. 퇴사 후 취업 고민상담 플랫폼인 ‘코멘토’를 창업한 하진규(33)씨는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 중 퇴사에 대해 조언하는 경우가 많은데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한다. 사업이라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라며 “퇴사 전 치밀한 준비가 없다면 쓴맛을 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 직장인에 공감과 위로… ‘퇴사 콘텐츠’ 뜬다

“이제는 직장인이란 말 대신 ‘퇴사한 사람’과 ‘퇴사할 사람’으로 구분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지난달 발간된 잡지 ‘월간퇴사 1호-퇴사러의 탄생’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월간퇴사는 퇴사자와 퇴사 희망자, 퇴사 실패자 등 직장인 13명의 이야기를 담은 ‘퇴사 전문’ 잡지다. 잡지를 만든 편집장 곽승희(30·여)씨는 “독자들에게 정답을 주기보다는 퇴사자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잡지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퇴사 콘텐츠’가 인기다. 퇴사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데다 퇴사를 실제 하지는 않더라도 각종 ‘퇴사론’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어서다.

서점가에선 지난해 5월 ‘나는 5년마다 퇴사를 결심한다’를 시작으로 올해 ‘퇴사하겠습니다’, ‘직장인 퇴사 공부법’, ‘퇴사준비생의 도쿄’ 등이 출간돼 인기몰이 중이다.

15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퇴사’가 제목에 들어간 서적의 구매비중(1월1일∼10월31일)은 전년 동기 대비 8.3배 늘어났다. 30대 구매자가 44.2%로 가장 많았고 40대(24.1%)와 20대(20.6%)가 그 뒤를 이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평론가 평점이 6점인 데 반해 관람객 평점이 8점 이상으로 더 높다.

회사원인 주인공이 살인적인 업무강도와 매일 같은 야근으로 지하철에서 쓰러지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영화를 본 직장인 대부분이 ‘내 일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최근에는 퇴사를 가르치는 ‘학교’도 등장했다. 퇴사 과정 전반을 훑는 ‘퇴사학개론’부터 경영대학원(MBA)이나 로스쿨 준비, 창업 준비 등 전문적인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퇴사학교’에 다니는 직장인 수강생은 매달 200∼300명에 달한다.

퇴사학교 관계자는 “퇴사 콘텐츠들이 평생직장이 없어진 시대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는 직장인들의 욕구를 겉으로 드러내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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