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성(性)스럽고 성(聲)스럽고 성(聖)스러운 이야기詩

김정수 시인 2017. 11. 1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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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장인수 시인 '적멸에 앉다'


2003년 ‘시인세계’로 등단한 장인수(1968~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적멸에 앉다’를 읽다 보면 저절로 ‘걸친다’는 말이 떠오른다. 고향에 사는 부모님(그는 주말마다 내려가 농사를 거든다)과 도시에 사는 가족, 교사생활을 하면서 겪은 사적인 이야기를 실 한 오리 안 걸치고 술 한 잔 걸치며 흥겹게 풀어놓는다.

특히 3부 아내를 중심으로 한 농담 짙은 성적(性的) 시편들은 다소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지만, 그 안에는 해학과 자연 회귀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독감에 걸린 아내 병간호 중에 욕정이 발동해 애무하다가 섹스에 실패한 이야기(‘독감의 유혹’), 수술을 한 아내가 장모님보다 남편에게 소변을 받아 달라 부탁하는 이야기(‘예수님이 섹시해 보이네’), 침대에서 아랫배와 발가락을 서로 비비다가 웃음보가 터진 이야기(‘웃음의 물살’), 모유가 나오지 않는 아내의 젖을 주무른 걸 수업시간에 떠든 이야기(‘젖꼭지 수업’), 낚시터와 섬진강 모래사장에서 용두질한 이야기(‘아랫도리 무량사’), 산책을 하다가 아내가 갑자기 남편의 아랫도리를 와락 움켜쥔 이야기(‘스님! 노여움을 푸세요’)와 같이 성(性)과 관련된 이야기가 노골적이면서도 질펀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탄천 물가에서 짧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허벅지를 쫙 벌리고 순식간에 셀카를 찍는 이야기(‘찰나의 미학’), 첫 부임한 학교의 첫 수업 시간에 앞에 앉은 여학생이 가랑이를 벌리고 초짜 선생을 당황하게 한 이야기(‘초짜 선생’), 시화호 해바라기 꽃밭에서 10초 동안 남학생에게 키스하는 달아난 여학생 이야기(‘해바라기사원’), 땀으로 흥건한 각설이 버드리의 브래지어 이야기(‘각설이의 땀’), 소주 한잔 마시고 잠든 아버지의 헐렁한 반바지 틈으로 보이는 불알 두 쪽 이야기(‘아버지 옆에 가만히 눕다’)까지 풀어놓고 있다.

이처럼 자칫 오해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한 것은 시인이 ‘격식과 가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하기 때문이다. 성 충동은 자연스러운, 살아 있다는 몸과 마음의 신호와 다름없다. 반응에 따른 행동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지만 반응을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는 자기검열과 사회윤리라는 터부를 깨는 행위와 다름없다. “원죄의 부끄러움을 뛰어넘었”(‘예수님이 섹시해 보이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원초적인 성 충동의 반응을 노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부끄러움을 알기 이전, 즉 성경에서 말하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에덴동산이나 부처님의 진신(眞身)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저녁 늦게 집에 와서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고
겉사람의 팬티까지 벗습니다
노곤함과 예의범절을 홀딱 벗습니다
내 거웃, 젖꼭지, 겨드랑이가
하루 일과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삽으로 놀란흙을 떠내듯
본향을 향하는 속사람의 생살을 만집니다
착한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나의 갈비뼈를 만지고
달랑거리는 알몸으로
거실과 부엌을 돌아다니며
자메이카 커피를 갈면서
커피 향을 즐깁니다
베토벤 교향곡 4번에서 9번을 들으면서
음악으로 알몸 목욕을 합니다
- ‘음악으로 알몸 목욕을 합니다’ 전문

“저녁 늦게 집에 와서/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고/ 겉사람의 팬티까지 벗”는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집 밖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갖춰야만 했던 “예의범절”을 내려놓는 행위다. “내 거웃, 젖꼭지, 겨드랑이가/ 하루 일과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행한 격식에서 벗어나 ‘순수자연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은 자연과 모성을 기억하고 있는, 한 번 파서 손을 댄 “놀란흙”이다. ‘놀란다’는 것은 흙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을 만지는 것은 “놀란흙”처럼 내 안의 “속사람”을 깨우는 것과 같다. 자연 속이었다면 풀과 나무, 바람과 달빛으로 목욕을 했겠지만 도시에 살고 있으므로 “커피 향”과 “음악으로” 세속의 때를 씻어낼 수밖에 없다.

이는 표제시 ‘하늘 밭’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신 “묘유(妙有)하구나”와 상통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써 생성하고 변화한다. 즉 공(空)하므로 비로소 생동감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새 떼들이 “발자국을 쿡쿡 심”은 ‘하늘 밭’도 원래 비어 있는 것(空)이지만 비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날아왔다가 달아난 새 떼로 인해 하늘은 생성과 변화가 가능한 ‘장천하어천하’(藏天下於天下: 천하를 천하로 감싼다)의 경지인 것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의도적으로 원초적 본능을 질펀하게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성경, 불경 그리고 장자에서 이르는 심오한 세계가 숨겨져 있다. 웃음을 지으면서, 이마를 찡그리면서 시를 읽는 사이 우리는 무심결에 그 세계에 감전되고 만다. 그것이 그가 이번 시집에 숨겨놓은 코드가 아닐까.

◇적멸에 앉다=장인수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124쪽/9000원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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