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내 노래 책임지고 싶었으나..더는 못 버티겠다"

2017. 11. 1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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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폐업 선언' 민중음악가 윤민석

[한겨레]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에서부터 1990년대 약자들의 생존 투쟁, 2000년대 이후 시민들의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현장에는 늘 그의 노래가 있었다. ‘전대협 진군가’처럼 때로는 비장하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처럼 때로는 잔잔하게, 그의 노래는 싸움에 나서려는 사람들을 북돋고 소외받고 억눌린 자들을 위로했다. 스스로를 ‘음악 숙련공’으로 부르는 작곡가 윤민석씨는 모든 음원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기부하거나 대중에게 공개해왔다. “내 노래를 삶으로 책임진다”는 소신에서다. 끝까지 민중음악을 하는 게 그의 꿈이다. 하지만 민중음악가로서 겪어야 하는 곤고한 삶은 그를 음악 밖으로 내몰고 있다. 새 작업실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는 지난달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 “30년에 걸친 제 민중가요 창작 인생을 당분간(?) 접을까 한다”고 밝혔다. 민중음악 작곡가 윤민석씨가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 옥상에서 자신의 민중음악 30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글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30년에 걸친 제 민중가요 창작 인생을 당분간(?) 접을까 합니다.” 민중음악계의 대표적 작곡가 윤민석(본명 윤정환)은 지난달 자신의 페이스북에 ‘드디어 폐업신고, 혹은 아주 긴 휴업신고’라는 제목의 꽤 긴 글을 올렸다. 지난 2일과 9일 두차례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그를 만나 폐업을 결심한 배경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달 말 윤민석(53) 작곡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폐업 신고’ 글을 보고 인터뷰를 청했다. 지난 2월까지만 해도 “지금은 기념할 때가 아니라 여전히, 아니 더 치열하게 싸워야 할 때라고 생각하기에…다시 노래를 만들고, 함께 촛불을 들면서 그저 힘닿는 데까지 싸워보려 한다”고 했던 그였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들어봐야 답답하기만 할 것”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관두더라도 지난 30년을 정리는 해야 할 것 아니냐’고 거듭 설득해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갑자기 작업실을 정리해야 한다고?

“후배가 지난 4년 동안 아무런 대가 없이 작업실을 내줬다. 그런데 이번에 임대료가 너무 올라 그 후배도 사무실을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됐다. 늦어도 20일까지는 녹음 장비 등 짐을 다 빼줘야 하는데 갈 곳이 없어 막막하다. 비록 조악하기는 하지만 그런 장비가 있어서 지난해 촛불 때 등 그때그때 노래가 바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짊어지고 있기에는 그 장비가 너무 큰 달팽이집이다.”

―공익재단이나 이런 곳에라도 작업실을 마련해 계속할 수는 없나?

“그런 도움을 받는 것도 쉽지 않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어 늘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게 이제 너무 싫다. 지쳤다.”

―앞으로 계획은?

“당장은 사무실을 빼야 해서 정신이 없다. 그러고 나면 대리운전을 하든 식당의 홀 서비스를 하든 해야지. 그런 일에 비하면 노래 만드는 게 제일 쉽고, 잘할 수 있는데 이제 만들 수도 팔 수도 없으니 몸뚱어리라도 팔 생각이다.”

투쟁 대열의 맨 앞에 섰던 투사

―우리 사회가 윤민석 작곡가한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이렇게 훌쩍 떠나면 많은 사람들이 서운해할 텐데.

“빚이라니, 전혀 아니다. (노래 만든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이만큼 역할을 했으면 됐고, 이만큼 사랑받았으면 됐다. 내가 관두겠다고 하니까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는 얘기를 주변에서 하는데 그럴 때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난다. 나에게 닥친 문제는 내 능력으로 내 앞가림을 못한 탓이다. 사실 지금까지 숙련공 인생으로 30년간 이 일을 해온 것도 기적이다. 아내 아플 때, 내가 고꾸라져 있을 때 나를 다독이고 살린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 때문이었는데 이제 더는 못 버티겠다.”

후배 사무실 한켠 무상 사용해와
임대료 인상에 작업실 철수해야
음악 장비 보관장소도 마땅찮아
“민중가요 접어야” 눈물의 선언 2012년 투병 아내 위한 성금 등
시민 후원으로 활동 이어왔으나
생활고 등 현실의 벽 부딪혀
“후배들엔 민중음악 말리고파”

윤민석이 민중음악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7년. 폭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해 초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한 데 이어 6월에는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등(사망은 7월9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6월항쟁이 거세게 불붙던 때였다.

―처음 만든 노래는 뭔가?

“첫 민중가요는 ‘사랑하는 동지에게’라는 거였다. 1987년 6월항쟁을 앞두고 단식하려는 총학생회장을 격려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는데 좀 말랑말랑했다. 그래서 ‘가요스럽다’, ‘양아치 같은 딴따라가 들어와서 이상한 노래를 만들었다’고 욕을 바가지로 들었다. 스물한두살의 어린 학생들이 시대의 무게를 다 짊어지는 상황이었으니 다들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걸 떨치려다 보니 허세 짱의 강한 노래를 원했다.”

시대의 요구를 읽은 윤민석은 1980년대 후반 ‘전대협 진군가’와 ‘전대협 찬가’를 비롯해 ‘애국의 길’, ‘통일의 꽃’, ‘백두산’,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 투쟁 현장을 달구는 노래들을 쏟아냈다. 이 중 1989년에 만든 ‘전대협 진군가’는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라는 강렬한 가사에 오르내림이 화려하고도 강한 곡조를 붙였다. 학생들은 ‘전대협 진군가’를 함께 부를 때마다 비장함에 전율했다.

그는 투쟁 대열의 맨 앞에 섰던 투사이기도 했다. 1987년 12월 대선 직전 공정보도를 요구하면서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을 점거했다가 붙잡혀 징역 3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1989년 12월 임종석 당시 전대협 의장(현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찰에 붙잡힐 때도 맨 앞에서 화염병을 던졌다가 잡혀 3개월 옥살이를 했다.

윤민석씨는 지난 30년 동안 각종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리는 노래를 만들어 음원을 무료로 공개해왔다. 그는 최근 무상으로 사용해왔던 친구의 사무실이 임대료 상승으로 문을 닫게 된 것을 계기로 “30년 민중음악 창작 인생을 당분간 접겠다”고 밝혔다. 윤씨가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폐업을 결심한 배경과 심경을 밝히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발 떨어져 노래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나름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성격이기도 하다. 노래에서 나가자, 싸우자고 해놓고 나는 안 나가고 안 싸우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시위 현장에서도 늘 맨 앞에서 싸웠다. 딸이 나한테 하는 얘기가 있다. 아빠는 중간은 없이 모 아니면 도라고 말이다. 나의 롤모델은 실천적으로는 김남주 시인이었고, 정서적으로는 문익환 목사였다. 김남주 시인처럼 나도 기록자나 예술가에 머물지 않고 전사로 불리고 싶었다.”

―무엇을 위한 전사였나?

“그때 나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광주항쟁을 폭압적으로 진압한 전두환을 반드시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2006년에 나온 만화 <26년>(강풀)에서 나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뒤집힌 세상에서 그네들이 두려워하는 사례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게 비밀조직이든 종교단체이든 상관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망했지만 말이다.(웃음)”

데모 욕하던 모범생 바꾼 광주항쟁 사진

그가 망했다고 표현한 것은 1992년 이른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된 것을 뜻한다. 당시 1심 법원은 남한 조선노동당의 실체 자체를 부인하고, ‘민족해방애국전선’(민애전)이라는 조직 사건으로 규정했다. 윤민석은 이 조직의 하부(애국동맹)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 혐의로 3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 노래를 만든 건 사실인가?

“내가 가담했던 그룹의 부탁을 받고는 노래 두 곡을 만들어줬다. 그때는 내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면 뭐든지 다 했다. 누군가 찬불가를 만들어달라고 했다면 제가 천주교 신자였더라도 만들어줬을 것이다. 그때는 운동이 나였고, 내가 운동이었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공격받고 있는데 그 일에 대한 입장은 뭔가?

“내 생각이 바뀌었건 달라지지 않았건 그런 얘기는 일체 안 한다. 생각이 바뀌었더라도 내가 바뀌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때 바보였고 또라이였다고 해봐야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

―뜨거운 불덩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았다. 활동하다가 잡히거나 하면 바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에서 그때는 가슴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기도 했다.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늘 우선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왠지 누군가에게 미안했다. 나는 행복하면 안 되고, 즐거우면 안 됐다.”

어린 시절 윤민석은 못하는 게 없는 재간둥이였다.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대학 입시학원을 운영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만능 슈퍼맨으로 키우고자 애썼다.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와 기타를 배우게 했고, 주산학원에도 보냈다. 음악에 재능이 뛰어났던 윤민석은 중학교 때부터 곡을 만들었다. 또 시를 쓰는 문학청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음악을 전공하는 것은 강하게 반대했다. “음대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가 맞아 죽을 뻔했어요. 하하. 아버지에게 음악은 상것들이 하는 것이었죠.”

고교(영주고) 때 그는 친구 우병우(전 청와대 민정수석)와 1등 자리를 다퉜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대학 입시 성적이 예상보다 낮아서 집에서는 재수를 권했지만, 오로지 아버지 곁을 벗어나고자 장학금을 주는 곳을 택해 서울로 올라왔다. 보수적 동네 출신인 윤민석은 대학 초반에 ‘어쩌다 니들과 같이 있게 됐지만 나는 다르다’고 여기면서 동문회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입학하자마자 공인회계사(CPA) 시험 준비반에 들어갔고 행정고시 공부에도 몰두했다.

―언제부터 바뀌었나?

“대학 1학년 때는 데모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모님이 주는 비싼 등록금 내고 헛짓한다고 속으로 욕했다. 대학 2학년 때 딴따라 병이 도져 학교 앞 음악다방 디제이와 이태원의 나이트클럽에서 기타 연주 아르바이트를 할 즈음이었다. 흐릿하게 복사된 광주항쟁 사진을 봤는데 갑자기 충격으로 다가왔다. 국군이 빨갱이를 죽인 거라고 알고 있던 믿음이 무너지면서 혼자 두어달 동안 힘들었다. 그렇게 세상을 알아가다가 어느 순간 내 앞가림만 하려고 공부하는 내 모습이 너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견디지 못하겠더라. 결국 3학년 올라갈 때 휴학계를 내고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시작한 게 학교 노래패(소리개벽)였다.” 2년 후배인 임종석도 소리개벽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전대협 진군가’로 대학가 석권
노무현 탄핵 때 ‘헌법 제1조’ 이어
세월호 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격동기마다 거리서 울고 웃어 “우리 세대 중에서 변하지 않는
마지막 사람으로 남고팠는데…”
“폐업은 경제능력 없는 내 탓
30년간 사랑해준 시민에게 감사”

윤민석씨는 1987년 한양대 노래패인 소리개벽을 만들어 활동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민중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윤씨가 대학 노래패 시절에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 윤민석씨 페이스북 갈무리

‘퍼킹 USA’ 대박나도 살림은 더 곤궁

윤민석이 노래운동에 뛰어든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는 민중가요 전성시대였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광야에서’ ‘그날이 오면’ ‘잠들지 않는 남도’ 등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갖춘 노래를 만든 노래운동패 ‘노래를찾는사람들’(곡 문승현, 문대현, 안치환, 류형수),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등 노동가요를 주로 만든 김호철, ‘참교육의 함성으로’의 주형신, ‘바위처럼’의 유인혁 등이 대표적인 민중음악가들이었다.

윤민석이 민중음악가로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계기는 1992년부터 95년까지의 감옥생활이었다. 그는 빈 라면상자의 골판지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감옥에서 가상 연주를 하는가 하면 컴퓨터 음악을 책으로 독학했다. 1995년 출옥 전에 동료들이 열어준 ‘윤민석 통일음악회’(안치환, 꽃다지, 신형원 등 출연)도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공연 실황을 찍은 비디오를 교도소장 등과 함께 본 그는 감옥에서 다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완성해 숨겨나온 노래가 대략 30곡쯤 됐다.

출옥 이듬해인 1996년에는 ‘윤민석과 함께 하는 몇가지의 실험’이라는 노래 테이프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다. 이때 노래패 `조국과 청춘’의 가수 양윤경을 만났다. 윤민석은 “노래를 빡세게 부르는 다른 민중가수들과 달리 부드러우면서도 표현력이 뛰어난” 양윤경과 1998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2001년에는 민중가요를 보급하는 인터넷 사이트(송앤라이프)를 만들어 5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모든 노래를 저작권료 한푼 받지 않고 무료로 퍼가게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창작활동도 가장 왕성했다. 2002년 동계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인 아폴로 안톤 오노가 범한 반칙 행위를 소재로 만든 ‘퍼킹 유에스에이’(Fucking USA),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사건 때의 ‘헌법 제1조’와 ‘너흰 아니야’는 민중음악의 고전이자 불후의 명곡이다.

―송앤라이프를 오래 운영하지는 못했는데.

“처음에는 후원금으로 버텼는데 갈수록 사무실 유지가 힘들었다. 게다가 ‘퍼킹 유에스에이’가 대박이 난 것도 한 원인이다.(웃음) 다운로드가 20만을 넘어갔는데 서버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어 그때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2006년에 문을 닫았으니 그래도 오래 버텼다.”

―한때 곡을 공개하면서 자발적인 후원을 호소하는 이른바 감동후불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공연계에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한번 시도해봤다. 처음에는 의미가 좋다면서 돈을 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대로 반짝했지만, 지속이 안 되더라.”

자금난에 송앤라이프도 접은 윤민석은 대리운전을 하거나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나갔다. 2011년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결혼 전에 치료받았던 아내의 유방암이 재발했다. 그즈음 그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의원 등 이른바 출세한 친구, 선후배들을 만나면 그들은 ‘너는 아직도 안 변했냐. 정치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라고 말했고, 그런 말은 그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았다. 가장 힘들 때였다. 죽어가는 아내를 보다 못한 그는 2012년 8월 트위터에 “누가 1억만 빌려주세요. 아내 좀 살려보게요. 아내가 낫는 대로 집 팔아서 갚을게요”라는 글을 올렸다. 윤민석을 기억한 시민들이 순식간에 1억5천만원의 돈을 모았고, 동료들은 두번째 ‘윤민석 음악회’를 열어줬다.

“당시 병원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해서 음악회가 열린 한양대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날부터 아내가 미음을 세 숟가락이나 먹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기운이 아내를 살렸다. 그 전까지는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하느님 왜 안 데려갔어요’라고 얘기하던 아내가 거짓말처럼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윤민석을 기억해준 시민들이 정말 눈물겹게 고맙더라.”

몸속에 암이 퍼진 상태이지만 아내는 2012년 말 기적처럼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윤민석은 가수 양윤경에게 2014년 첫 앨범(<우리 아가는>)을 만들어줬다. 엄마가 갑자기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 딸의 트라우마를 달래주려고 만든 노래들이다.

암과 싸우는 아내, 자신의 우울증, 생활고 등 3중고에 지친 윤민석에게 그의 유일한 무기인 민중음악을 다시 벼리도록 해준 것은 시대의 아픔이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는 고스란히 그의 고통이었다.

1989년 6월 임종석 전대협 3기 의장이 임수경씨가 남한 학생 대표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그해 초 윤민석씨는 전대협의 대표 노래가 된 ‘전대협 진군가’를 만들었다. 임종석 당시 의장은 한양대 노래패(소리개벽)에서 2년 선배인 윤씨와 함께 활동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아내 수면제 먹인 뒤 세월호 노래 만들어

“제 삶을 바꾼 두 번의 계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광주항쟁이고, 다른 하나는 세월호였다. 세월호는 어떤 면에서는 광주보다 더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는 아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스트레스 안 받도록 집에서는 텔레비전도 안 켜고 지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닷속에서 죽어가니까 미치겠더라. 도저히 못 견뎌서 수면제를 먹여 아내를 재워놓고는 작업실에 나와서 혼자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고는 미친놈처럼 꺼이꺼이 울면서 두 달을 지냈다. 그 슬픔이 제 안에서 부대끼다가 핏방울처럼 뚝 떨어지면서 노래가 됐다.”

‘잊지 않을게’와 ‘약속해’ ‘얘들아, 올라가자’ 등 세월호 관련 노래 10여곡이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윤민석은 이 노래들을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에 전달했고, 대책위는 2014년 11월 추모 음반(<잊지 않을게 끝까지>)으로 만들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도 세월호 참사 때 만들었는데 추모음반의 노래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은데.

“처음에는 세월호 엄마 아빠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희생자 이름 304명도 그냥 한 덩어리로 보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이들 얼굴을 하나씩 쳐다볼 수 있었고, 아이들의 엄마도 시연이, 영석이 엄마 등으로 개별적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현장에 가서 틀어놓으면 깃발이 되고 기도가 되고 주문이 되는 그런 희망적인 노래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 속에서는 선혈이 낭자한데 희망을 보여주려니 노래 만들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화문 앞에 머리 깎은 엄마 아빠들이 모였는데 짭새들이 둘러싼 채 압착해서 소변을 거기서 봐야 하는 모욕적인 상황이 일어났다. 그때 저들의 치밀함과 악랄함에 맞서는 것은 결국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노랫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노래는 5분 만에 완성됐다.”

윤민석은 자신의 많은 노래 중에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가장 아낀다.

지난 2월 윤민석은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30년 만에 처음 받은 음악상이다. ‘헌법 제1조’와 ‘이게 나라냐 ㅅㅂ’ 등 촛불집회에서 불린 노래로 받은 상이어서 그에게는 더 특별했다.

―민중가요를 30년 동안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제가 이념이나 신념이 투철해서가 아니다. 저는 생판 무식이고, 가진 것은 가슴밖에 없다. 짧게 얘기하면 우리는 4·19 세대의 변절을 욕하면서 운동했다. 그래서 우리 세대 중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사람들이 ‘너 운동하고 조금 고생한 뒤 나중에 금배지 달려고 그러지?’라고 욕할 때 ‘아니야 저런 놈도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예 하나가 됐으면 했다.”

2011년 4월5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년)의 주역으로 말기 위암과 싸우고 있던 김은숙씨의 쾌유를 비는 행사에서 윤민석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제 ‘기억, 희망을 노래합니다’가 열린 2015년 4월10일 밤 경기도 안산 문화광장에서 안산시 고등학생 친구들이 희생 학생들을 추모하며 노란 풍선을 날리고 있다. 윤민석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잊지 않을게’와 ‘얘들아, 올라가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 10여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윤민석에게 노래는 뭐였나?

“나에게는 혁명의 도구였다. 평화로울 때는 평화로운 노래를 하면 되는 것이지만, 싸워야 할 때는 싸우는 노래로서 내 노래가 무기가 되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민중가요는 구리다거나 군가풍이다, 음악성이 떨어진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속으로 민중가요 하는 사람이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란다고 말한다. 레게가 필요하면 레게로, 투쟁이 필요하면 군가풍으로, 발라드가 필요하면 발라드로 자유자재로 구사해 왔다. 그리고 내가 만든 노래에 대해 내 삶으로 책임진다는 자세로 30년을 버텼다.”

―‘전대협 진군가’ 등 예전 노래는 주로 군가풍이었다. 거기에 비해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 요새 노래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던데.

“사람의 정서적인 면도 달라졌으니 시대에 따라 민중가요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 다만, 어떤 노래가 맞는지를 알려면 사람들의 싸움 현장에 계속 있어야 한다. ‘헌법 1조’나 ‘이게 나라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모두 현장에서 탄생한 곡이다. 사람들의 구호나 손피켓 등을 보면서 그 내용들이 밥처럼 제 안으로 들어와서 툭 하고 노래로 떨어진다. 내 얘기가 되어야 가장 진솔한 노래가 된다.”

―민중가요는 대중음악 등 다른 노래들과 어떻게 다른가?

“민중이 따로 있고, 대중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은 멀티모드다. 술을 마실 때는 술꾼, 집에 가면 아빠 또는 누구의 아들, 또 누구의 친구 등등 그때마다 지위가 달라지는 멀티모드의 삶이다. 그런데 천민자본주의에 살다보니까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기본적 상식이나 양식, 그것을 계급성이라고 하든 민중성이라고 하든 그것이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것을 내세울수록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그러나 저 밑으로 가 있는 양심 또는 민중성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한 계단 한 계단 불편하지만 자극해서 끌어올리는 게 바로 민중음악이다. 그렇게 노래하다 보면 지난해 촛불혁명처럼 어느 날 민중성이 확 올라오게 된다.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작업을 계속해 왔다.”

민중음악을 단지 노래로서만이 아니라 몸으로 헤쳐온 그이지만, 민중음악과의 작별은 사실 꽤 오래전부터 맘속에 자라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2015년 페이스북(8월21일)에 “내 음악 인생을 후회해본 적은 결코 없지만, 솔직히 말해서 섭섭하거나 외로운 적은 정말 수도 없이 많았다”며 “만약 지금 누군가 민중가요 작곡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아마도 그를 아끼는 정도 만큼 말릴 것 같다”고 적었다.

“‘3년간 상업용 노래 만들어 봤으면’ 망상도”

―민중음악 하는 게 힘들어서인가?

“아니다. 어떤 일이든 힘들지 않은 게 있겠나. 어떤 일이든 돈이 되거나 보람이 있거나 재미가 있거나 이 셋 중 하나는 있어야 자기 삶을 관통하면서 할 수 있다. 물론 민중가요는 보람이 있기는 하지만, 미래가 없다. 연극계만 하더라도 극단 청소하고 한 회당 3만~5만원 출연료 받으면서도 버티는 것은 그것이 커리어가 돼서 나중에 텔레비전으로 간다든가 하는 등의 한방이 있다. 이 동네는 그러지도 못한다. 민중가요 부르는 후배들이 그러더라. 해고자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아, 나는 돌아갈 공장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다고 말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민중가요를 하고 싶으면 첫째 가진 돈이 많든가, 아니면 차라리 대중음악판에 가서 이름을 얻어서 한두 곡 노래를 적선하는 방식으로 하라고 말이다. 그도 저도 안 되면 대학교수 등 자격을 얻으라고 말한다.”

윤민석과의 두 번에 걸친 인터뷰는 그가 예고한 대로 힘들었다.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눴지만, 매번 가슴은 답답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래도 그를 음악 밖으로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휴업을 하더라도 음악은 계속해야지 않나?(기자는 일부러 ‘휴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는 즉각 “폐업, 거의 폐업”이라고 정정했다.)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현장을 뜨겁게 달군 노래 ‘너흰 아니야’의 앨범 표지.
윤민석씨가 송앤라이프를 운영하던 시절인 2004년 4월 작업실에서 <한겨레21>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며칠 전에 딸이 한 대학이 주최하는 백일장에 나가서 난데없이 장원을 했더라. 2년 뒤에 그 대학에 지원해서 합격하면 4년간 장학금을 준다고 하는데 그게 그렇게 솔깃했다. 그런 서글픈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지금까지의 견디는 삶 말고 단 몇년이라도 이겨내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다.”

―무슨 뜻인가?

“망상이긴 한데 지금까지 30년 동안 민중음악을 했으니 앞으로 그 십분의 일인 3년 동안은 상업용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10만원씩 천 명에게 1억원을 후원받아서 그 돈으로 판매용 노래를 만드는 거다. 평균 두 달에 한 곡씩 해서 삼 년 동안에 15~18곡쯤은 만들 것이다. 그중에서 한 곡쯤은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은 치지 않겠나. 그러면 원금은 돌려주고, 나는 저작권을 토대로 이전에 했던 것처럼 다시 열심히 민중가요를 만드는 그런 망상 말이다. 그런 것을 하려면 지금보다 백 배는 더 뻔뻔해져야 하는데 그렇게는 못하겠다. 결국 이제 조용히 잊혀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한 부동산 소개업소에서 그에게 전화가 왔다. 윤민석은 “감당할 수 있는 사무실인지 가봐야겠다”며 서둘러 일어섰다. 노래, 그중에서도 세상을 바꾸는 노래를 자신의 전부로 여겼던 뮤지션은 촛불혁명 1주년에 ‘30년 천직’과 작별하러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윤민석은 17일 통화에서 “장비를 쌓아둘 공간은 집 가까운 곳에 구했다”고 밝혔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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