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20년-끝나지 않은 고통] "공평한 교육·소득분배로 '가난한 인재' 살리는 시스템 만들어야"

사회 안호기 경제에디터·정리 조형국 기자 2017. 11. 1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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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많은 것이 바뀐 시간이었다.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에 어떤 의미였고 어떤 교훈을 남겼나. 오늘날 한국 경제는 어떤 난관에 봉착해있나. 또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20년이 지나는 동안 찾아낸 해답보다 못 푼 질문들이 더 많이 남았다.

임병용 GS건설 대표이사는 2013년 <기술·문화·지식중심 경제의 틀(Frame)>이라는 경제학 책을 썼다. 책의 첫머리는 ‘불황은 왜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5년 전 임 사장은 “모든 길은 교육으로 통한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높은 부가가치를 산출할 능력을 가질 때 가능하다. 그 책임을 개개인에게만 둘 수 없다. 천편일률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대학교육·사교육이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사회제도는 자기계발을 위한 개개인의 노력이 올바르게 이뤄질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생산방식을 벗어나 지식·자본이 결합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짚었다.

국제무역을 전공한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랜 시간 국제경제와 국내 시장을 들여다봐온 경제학자다. 평소 송 교수는 한국 경제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엇갈린 진단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분석하고 양자 모두 매달리는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해왔다. “창조경제가 중산층을 복원하고 고용을 창출할 것이라는 믿음은 지나친 낙관일지 모른다”며 보수 지지층이 주창하는 기술혁신의 어두운 단면을 지적하기도 했고 “보편적 복지에 대한 교조적 집착에서 벗어나 선별적 제도에 큰 문제가 없는 분야에는 저소득층의 혜택을 두껍게 하자”고 진보의 목소리에 태클을 걸기도 했다.

산업 현장의 일선에서 실물 경제를 체감해온 임 사장과 학계에서 경제 상황과 정책의 변화를 좇아온 송 교수에게 외환위기 그 후의 이야기를 물었다. 대담은 지난 14일 오후 3시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됐다.

‘외환위기 20년-끝나지 않은 고통’ 대담에서 임병용 GS건설 사장(왼쪽)과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가 한국 경제의 외환위기 그 후의 이야기에 대해 대담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IMF는 무엇을 바꿨나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의 많은 부분을 바꿔놨다. 교훈도 있지만 여태 남은 상흔도 적지 않다. 무엇이 문제였나. 또 어떤 점들이 달라졌다고 보나.

임병용 GS건설 사장(이하 임)=가장 체감하기 쉬운 건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선호가 늘어났고 평생직장 개념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차입경영을 줄이기 시작했다. 임직원들은 고용안정을 걱정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았다. 외환위기는 수출 지향,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해프닝적인 사건이었다고 보는데, 그 정도로 환율이 치솟고 금리가 오를만큼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증폭된 공포심이 외환위기를 초래했고, 그 결과 한국 경제가 얼마나 큰 변동성에 노출돼 있는지 알 수 있는 계기였다.

송의영 서강대 교수(이하 송)=기업에 가장 큰 충격은 ‘대마불사’ 신화가 깨졌다는 것이다. 큰 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것, 또 기업이 망하는 걸 국가가 막을 수 없다는 걸 절실히 느끼게 됐다. 이미 김영삼 정부부터 국가 주도 고성장 전략은 글로벌 스탠다드의 압력에 내몰려 있었다. 국가주의와 시장주의가 혼돈 속에서 균형을 찾고 있지만 외환위기 이후 많은 기업은 훨씬 시장에서 영향을 많이 받기 시작했고 국제금융을 더 많이 신경쓰기 시작했죠.

임=외환위기 자체는 국지적인 현상이었다. 당시 미국, 중국 등의 경제는 좋았는데 아시아권의 제조업 기반 수출 기업, 차입형 구조를 가진 경제에 불신이 크게 일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치솟은 환율은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고 외환위기도 극복됐다. 자본시장 개방, 세계화, 신자유주의 확대 등은 이미 외환위기 전부터 시작됐던 트랜드인데, 그 트랜드 속에서 상징적으로 증폭됐던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송=나는 생각이 다르다. 보수적인 시각은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지만, 1970년대 박정희식 개발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점, 이후 경제 호황에 취해 과도한 자신감을 부렸던 점에 외환위기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국의 전통적 성장 기법은 1970년대 형성됐는데 중화학공업 재벌 몇 개를 타겟으로 문제가 있으면 돈을 찍어서 무한 지원하는 모델이었다. 성장 지상주의로 가면서 높은 부채를 기반으로 경영이 이뤄졌는데 외국 기준에서는 매우 위험한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최초로 쓴맛을 본 게 1979~1980년 전두환 정부에서 소위 ‘안전파’들이 득세할 때인데 이때 개혁을 제대로 못했다. 철저한 반성이 없었던 건 80년대 후반,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가 너무 잘 풀렸기 때문에 과도한 자신감, 오만함이 생겼기 때문이다. 지나친 차입경영과 중복 과잉투자가 원인이 됐다는 점에서 책임이 있다. ‘한국은 아무 잘못을 안했는데 외국 투기자본이 건드려서 문제가 터졌다’는 건 아닌 것 같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 김영민 기자

-‘한국은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졸업했다’는 평가도 있다.

송=모범생이었고, 그래서 당시 IMF 대응방식에 대한 반성도 나왔다. 갑자기 금리를 올리고 재정을 축소해서 국민에게 쓸 데 없이 많은 고통을 줬다. 외환위기 이후 IMF 정책에 대한 재평가, ‘한국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반성이 시작됐다. 망할 기업이나 은행은 문을 닫아야 하지만 금리는 낮게, 재정은 넓게 국민 고통을 줄여가는 게 옳다는 인식이 우리 경제에 교훈으로 남았다.

임=나중에 보니 한국의 경제 기초체력이 생각만큼 취약하거나, 또는 흥청망청하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판단이 있었던 거다. 외환위기 반성의 영향으로 이후에는 위기가 왔다고 무조건 고금리, 재정긴축으로 처방하지 않는다. 당시에 ‘한국이 빚을 갚으면 안된다. 빌려준 측도 리스크 프리미엄이 있었으니,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얘기지만, 말이 안되는 얘기는 아니다.

송=당시 IMF의 대응은 전통적인 남미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남미는 정부 적자가 너무 많아 외채 규모가 컸고 생산능력이 없는 경제라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외국 자본이 ‘저 나라는 돈을 못갚겠다’는 불안감 때문에 돈을 빼갈 때 이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방법은 금리를 올려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 또 재정을 초긴축으로 돌려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것이다. 한국도 표면 상으로 외채위기가 생겼으니 남미 모델을 그대로 적용한건데, 한국은 초과설비가 널려있었다는 점이 남미와 굉장히 달랐다. 기업 과잉투자가 문제였으니 환율만 올라가면 수출할 여력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래서 외환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처 능력이 있는 국가에서 긴축으로 국민을 괴롭히기보다 금리를 낮추고 재정을 풀면서 부실기업과 은행을 철저히 정리하는 것이 한국 외환위기의 교훈으로 남았다.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대처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가 됐던 과잉설비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는 것인가.

송=앞서 언급한 지나친 자신감, 그 때문에 생긴 과잉설비는 외환위기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이를 빨리 극복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투자였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외환위기 후 성장동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매우 큰 문제로 본다. ‘기업들이 겁을 낸다’면서 투자의욕 저하, 성장률 하락을 단점으로 든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90년대 초 국내 투자가 경제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9~40%로 어마어마하게 높았고 굉장한 부실과 과잉설비가 생긴 상황에서 문제가 터졌다. 경제 성장률도 외환위기 때문에 떨어졌다기보다 충분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90년대 초반 선박·철강·자동차·반도체 등 부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 잘 풀렸던 상황 때문에 투자가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임병용 GS건설 사장 | 김영민 기자

■한국 경제, 천천히 내려오는 걸 대비해야

-한국의 앞날을 얘기할 때 늘 거론되는 나라가 일본이다. ‘잃어버린 20년’으로 축약되는 일본의 오랜 침체는 한국의 미래일까.

임=저는 의문이 든다. 일본은 정말 불황이었을까? 일본은 실업률이 높았던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고 경제활동을 하는데 그걸 불황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황이면 실업률이 높고, 잠재성장률과 실질성장률의 갭이 넓어지고, 경제가 능력에 비해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게 불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불황은 ‘왜 성장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표현된다. 과거에는 고도 성장을 이뤄왔지만 지금은 성장이 정체되거나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 자원은 대체로 동원됐는데 성과가 나지 않는 상황이 해소되지 않을 때다.

송=불황이나 극심한 공황이라기보다 일본은 낮은 성장률이 지속되는 장기침체를 겪어왔다. 한국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식으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인구가 줄면 필연적인 일이다. ‘성장률 감소’라는 하나의 현상을 두고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는 “나라 망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해법이 갈린다. 보수는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 유연성을 높여 위기를 극복해야한다고 하고 진보는 재벌을 개혁하고 공정거래로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질은 성장률 하락이 불가피한 것이고,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4, 3, 2, 1%로 천천히 하향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성장이 정체됐던 선진국은 ‘고속성장을 못했다’가 아니라 ‘1인당 GDP 성장률을 2%로 오래 유지해왔다’가 사실에 가깝다. 우리도 1인당 GDP 2%를 유지한다면 위기라고 보기 어렵다. 인구가 줄고 노동력이 감소하는 대신, 노동자 한 명당 생산량은 2% 생산을 유지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단 천천히 떨어지는 게 아니라 3%에서 1%로 급락하는 건 문제다. 부동산 시장의 급락으로 수요가 움츠러들면서 중소기업이 타격을 받고, 중국 등 기술 열위에 있던 국가들이 따라잡으면서 수출이 막히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전개를 우려하는 의견들이 많다. 한국에서 일본의 장기침체가 반복된다면, 그런 스토리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임=저는 저성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올해 미국이 실질성장률이 한국보다 더 높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국민소득이 5만불에 달할 뿐만 아니라 인구구성도 건전하고 좋은 실적을 꾸준히 내고 있다. 한국이 미국을 캐치업 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저성장을 인정하는 건 미국과의 차이가 더 벌어진다는 얘기다. 우리가 미국과 똑같이 잘 할 수는 없어도 지금보다는 잘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는 분이 ‘오늘 출근한 직원이 내일 나오기만 해도 돈을 벌텐데’라고 하더라.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만큼 열정이나 성과가 높은데 그런 부분을 살려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지금은 노동 투입, 자본 투입으로 경제가 성장하는 건 아니니까 다른 측면으로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급락’의 위험요인,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임=우리 경제는 여전히 수출 지향적인 제조업에 기반해 있다. 서비스업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경기를 좌우하는 건 세계 경제에 따른 수출 경기, 그리고 부동산 두 가지다. 교역조건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매일 얘기하는 GDP는 우리 경제가 생산할 수 있는 실물의 크기일 뿐, 그게 얼마인지 말하지 않는다. 교역조건이 악화되면, 실질 GDP는 큰 변동이 없더라도 국민 생활이 어려워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에서 생산하는 철광석 양은 변화가 없는데, 예전에는 부자가 됐지만 요즘은 가난해진다. 한국이 생산하는 반도체, 자동차, 기계류도 마찬가지다. 중국·베트남 등에서 제조업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공급라인으로 자리 잡으면 한국의 교역조건이 나빠지고, 한국 생산능력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지면 실질 GDP는 그대로 있지만 국민 생활은 피폐해질 수 있다.

실물경제에 있으면서 크게 느낀다. 진입장벽이 있고 희소가치가 있는 제품, 예를 들면 한국이 잘하는 뷰티케어 등 고급 의료기술 같은 기술적 장벽이나 브랜드 장벽으로 보호되는 산업은 교역조건이 악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 한국이 주력 수출하는 제품의 장기적인 교역조건을 전망해보면 낙관할 수 있을까.

송=쉽게 얘기하면 중국이 따라오기 때문에 혁신하지 않으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가격이 폭락하면서 실질 생산량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국민 소득은 떨어질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수출 제품 가격이 떨어지는데 임금이 내려가지 않으면 도산으로 갈 수 있고, 이는 경제에 급작스런 충격이 될 수 있다. 금리가 지금보다 2~3% 더 오르면 부동산은 버틸 수 있을까. 금융위기 정도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충격이 될 거라고 본다. 많은 한계가구가 넘어질거고, 집값 하락으로 소비가 침체되면서 장기침체가 올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한국 경제가 경계해야 할 위험 중에 하나인데, 정부가 가계부채를 우선순위에 놓고 관리하려는 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분간 수출 상황이 좋을 거고 설비투자도 늘어날 것이므로 올해 3% 달성은 충분하다. 향후 1, 2년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성장 급락’, ‘외환위기 후 활력 저하’ 같은 불필요한 압력에 시달린 현 정부가, 지난 정부가 부동산 경기부양에 집착했듯, 근시안적 해법을 택할까 걱정된다.

임=중요한 건 경제가 얼마나 창출할 능력을 가졌냐는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은 개방 경제를 해야하고, 그럴 수 밖에 없는데 밖에서는 밖에서는 보호주의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지만 룰을 어기는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중국 내부에서 집중적으로 키워서 해외로 내보내는 걸 느낀다. 미국이나 유럽도 전반적으로 폐쇄적인 분위기로 가고 있다. 보호주의가 강화됐을 때,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차별화되지 않은 수출산업’이다. 보호무역주의가 세지는 추세와 더불어 한국의 수출 제조업 전략을 따라 쓰는 후발국가들이 늘어나면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송 교수가 말씀하신 부동산, 가계부채 못지않게 우리 경제에 위기가 될 수 있다. 송 교수께서 경계하는 부동산 경기부양 등 대증요법으로 인한 성장률 착시를 경계하자는 데는 100% 동의한다. 가치를 생산할 역량을 키우는 성장, 그게 필요하다.

■“호나우두가 밥을 제대로 못 먹었으면 세계적인 선수가 됐을까.”

-가치를 키우는 성장, 어떻게 가능할까. 임금을 갑자기 낮추기도, 품질을 확 올리기도 어려울텐데.

임=수출 지향적인 제조업 기업들은 브랜드와 기술로 뒷받침이 돼야 하는데 국내 금융시스템이 너무 낙후돼있고, 미국의 창업지원시스템 같은 것도 형성돼 있지 않다. 성공 경험도 부족하고 정부 역할도 미진한 측면이 있다. 예전 IT 버블 때 수많은 벤처기업이 쓰러졌던 아픈 경험, 트라우마도 아쉬운 점이다. 스타트업이나 강소 중견기업들이 잘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돼야 한다. 그들이 필요한 인적자원이 공급될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기업에 우수한 인재들이 취업할 수 있는 분위기와 금융지원 같은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할 거다. ‘굉장히 잘 될 수 있는데’ 생각이 드는 잘하는 곳이 분명 많다. 대기업들은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투자 기회가 있고 확신만 있으면 연구개발이든 설비든 투자할 준비는 돼 있는 상황이다.

송=혁신은 위험을 인정하는 건데 위험을 평가하고 감당할 금융 체제가 없다. 분명히 혁신은 필요하다. 천천히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고, 천천히 내려가려면 어마어마한 혁신이 필요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표현한 건 창조경제고, 이번 정부에서는 혁신성장이다. 단어가 뭐가 됐던 혁신능력을 제고하지 않으면 하락 폭이 가팔라지고 미국과의 갭이 벌어질 것이다. 미국이 일본에게 쫓기고 중국한테 당하면서도 좋은 실적을 내는 건 혁신을 계속 하기 때문이다. 이건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이지만, 혁신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쉽게 얘기하면 당장 중국으로부터 도망치고 미국을 쫓아가야 한다는 거다. 재벌이 혁신이 없었다고 비판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앞으로 재벌이 그간의 혁신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다. 그간의 재벌의 혁신은 총수가 몰아붙이고 밑에서는 떠받치는, 집단적·관료적·하달식으로 이뤄졌다. 이게 계속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미국의 10대 기업 중 5곳이 2004년 이후 새로 생긴 곳인데 한국은 외환위기 지나고 나서 망한 기업도, 새로 큰 기업도 많이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외환위기가 외세를 빌어 어마어마한 구조조정을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시기였다. 네이버·다음·카카오를 일으킨 활력이 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진보 측이 지적하는 문제는 타당한 면이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은 모든 재벌이 기업마다 안에 IT 시스템을 총괄하는 업체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미국에서는 대기업 시스템 관리를 하는 업체가 생겼을 것이다. 미국 오라클쯤 되는 기업이 없는 이유가 재벌체제에 있다는 거다. 중소기업 기술을 가로채고, 웬만한 거래는 다 내부로 돌리고, 광고도 계열사로 몰아주고… 혁신이 없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은 된다고 본다.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당분간 유지될 재벌 체제에서 다이내믹스(활력)이 유지될 것인가, 또 떨어져나갈 재벌의 빈자리를 메울 스타를 만들 시스템이 있는가.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다. 혁신이 필요한 상황에서 소득주도성장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임=소득주도성장은 단기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재정·통화정책처럼 공공부문이 시장에 개입해 수요를 자극하는, 자본 투입을 늘려 성장을 유도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장기적으로 더 많은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소득분배를 공평하게 해서 ‘가난한 가정의 똑똑한 아이’도 인재가 될 수 있게, 또 약간의 장애가 있어도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개념이 아닐까. 이렇게 노동의 질이 올라가고 지식 노동자가 양성되면 ‘호나우두가 밥을 못 먹어서 세계적인 선수가 못 됐다’는 얘기는 없을 것이다. 없는 사람 주머니에 돈을 채워 소비 성향을 높이고, 이를 통해 수요를 진작한다는 건 소득주도성장을 좁게 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송=소득주도성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다. 소득주도성장을 아주 좁게 보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끝나는 거고 이보다 조금 넓게 보면 정규직 전환, 근로시간 감축, 시간당 임금 인상,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등을 합친 개념일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임 사장이 말한 ‘포용적 성장’, 보건이나 교육을 통해 사회 인적자본 수준을 높이고 생산성을 올리는 준비작업에 해당할 것이다. 이건 성장정책이 맞다.

우리 경제의 저성장이 수요 부족으로 인한 장기침체를 앞두고 있다면 좁은 의미의 소득주도성장도 유효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3% 성장을 이어간다면 수요 진작이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저는 소득주도성장에 찬성하는 쪽이었는데, 거꾸로 3% 성장이 이뤄진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수요 진작보다 혁신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으면 좋은데, 소득주도성장을 선택했다면 %에 천착해서는 안된다. 잘못하면 확대 재정정책의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다른 접근이 절실한 상황은 맞는 것 같다. 혁신도 필요하고 생산성도 높여야 하는 상황, ‘꼭 필요한 것은 이것’으로 말씀하실 것이 있는지.

임=생산성을 좌우하는 것 중 하나가 ‘신뢰와 소통’이다. 뻔한 얘기지만, 국민이 정부를 신뢰한다면 정부가 시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진다. 예를 들어, 브랜드가 약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강소 기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국민들이 대기업보다 정부를 신뢰한다면, 정부의 여러 인증 시스템이 실효성 있게 작동하면서 브랜드가 약한 기업, 업력이 짧은 기업도 시장에 수월케 안착할 수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 정책을 더 과감하게 펼칠 수 있는 것도 신뢰의 장점이다. 소통을 하려면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의 생각 속에서 일리를 찾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나둘씩 쌓은 신뢰는 굉장한 힘이 된다.

송=80~90년대 일으켰던 산업 중 상당 수를 앞으로 후진국에 뺏길 수밖에 없다. 그럼 한국은 그간 하지 않았던 산업으로 고도화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과정에서 탈이 없으려면 지금 ‘구조조정의 상시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이건 10년 넘게 우리 정부의 모토였는데 잘 안되고 있다.

구조조정 상시화를 가장 저해하는 건 구조조정 사이클과 정치 사이클이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보수가 구조조정을 시장원리에 따라 가혹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전통 보수는 웬만한 재벌은 살려야 한다고 한다. 진보는 구조조정 여파로 생기는 약자들의 고통을 이유로 반대한다. 한국에서는 특히 구조조정과 관련해서, 시장주의자가 낄 틈이 없고 구조조정이 힘을 받기 어렵다.

구조조정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상황을 벗어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항상 덩치가 큰 기업들은 정치적 파급력 때문에 꼭 정치 문제로 비화되는데 관치금융·공기업 지배구조·공기업 독립성 제고·금융감독시스템 개선 등, 한국 경제의 많은 문제들이 다 물려있는 사안이다. 구조조정을 정치에서 독립시키는 것, 정말 중요하다. 이걸 안하면, 장기침체에 빠지기 쉽다.

<사회 안호기 경제에디터·정리 조형국 기자 situation@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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