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왜 내가 맡아야하나?"..'리더 포비아' 한국

박재영,임형준,양연호 2017. 11.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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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에 도움 안 되는데.." 총학생회장 선거 시즌 후보 全無 대학 속출
"욕만 먹는 역할이라.." 아파트 대표자 출마 꺼려 입주자회의 구성 못하기도
고위층 잇단 구속 보며 권력에 대한 회의 커지고 헌신에 보상·존중 없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

학생회장·동대표 지원자 실종

올해 봄 입주를 완료한 서울의 A아파트는 최근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해임된 이래 새 회장을 선출하는 데 난항을 겪고 있다. 입주민 상당수는 젊고 의욕적인 입주민이 회장에 나서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물론 동대표 입후보마저 꺼리는 입주민이 대다수다.

한때 정치권 등용문으로 통했던 대학 총학생회장 자리는 아예 후보자를 찾지 못해 안달이다.

지난 10일 가톨릭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총학생회장 후보자 지원이 없어 2018년도 중앙선거 후보자 모집이 마감됐다고 밝혔다. 총학생회장뿐 아니라 모든 단과대학생회장과 동아리연합회장까지 지원자는 '0명'이었다.

한국 사회에 '리더 포비아(leader phobia·지도자 기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과 장관, 지자체장, 사정기관 수장의 잇단 구속수사로 권력층의 리더 수난사가 진행형인 가운데 대학이나 아파트, 학교 등 일선 현장에서도 리더 자리를 피해 다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A아파트 한 입주민(41)은 "유능한 후보자는 대부분 본업이 있는데도 희생적으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는 건데 회장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면 자질 있는 이들은 아무도 회장을 하지 않으려 하고 결국 검증 대상 리더 후보군의 평균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광명의 D아파트 역시 9개동 중 6동의 대표만으로 입주자대표회의가 운영되고 있다.

총학생회장 기피 현상도 '스펙에 도움이 안 된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봉사하는 리더십'이 강조되면서 권한 없이 책임만 떠안게 되는 리더직을 꺼리는 탓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자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최근 학내 여성단체에 뭇매를 맞고 사과하는 사태가 빚어지는 등 리더에 대한 무분별한 요구가 이 같은 리더 기피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 인천 등 수도권 소재 주요 대학 34개를 조사한 결과 약 26.5%에 해당하는 9개 대학이 총학생회가 없는 '비대위' 체제인 것으로 나타났다.

합리적이고 투명한 조직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리더의 어깨는 무거워졌지만 권한은 약해졌다.

교장 승진 필수 코스인 교감의 인기도 날로 떨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교내 발언권이 약해졌고 수당에도 별 차이가 없지만 업무량은 급증하기 때문이다. 은퇴 교사 강 모씨(64)는 "사회가 변하면서 '군림하는 교감'은 옛말이 됐다"며 "차라리 승진은 포기하고 속 편하게 살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소재 한 중학교 교사(37)는 "담임 역시 서로 기피해 기간제 교사가 담임을 맡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했다.

지난 정부의 노동개혁이 적폐로 규정되고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 전환이 새 정부 기조로 떠오르면서 주목받을 것 같았던 노조위원장 자리 역시 기피 대상이다. 금융투자협회는 2015년 6월부터 2년이나 노조위원장 자리가 공석이었다가 지난 6월에 가까스로 채워졌다.

한 금융공기업 노조 관계자는 "근로 여건 개선이나 부당한 인사 시스템 개선을 외쳐봤자 현실적으론 동료들의 응원과 격려가 전부"라며 "노조 활동으로 임원·경영진 등 사측과 갈등을 빚으면 두고두고 본인 인사에 불리하게 작용할 텐데 누가 맡으려고 하겠느냐"고 전했다.

전통적인 카리스마적 리더십에서 조정자적 리더십으로 리더십의 정의가 바뀐 지 오래지만 여전히 리더에 대한 과도한 책임을 강조하는 문화가 이 같은 리더 기피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게 전문가 진단이다.

이택광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시민 참여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여전히 그 바닥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며 "추가적 보상 없는 자발적 책임은 절대 지려 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리더 역할을 한 사람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고 했다.

[박재영 기자 / 임형준 기자 / 양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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