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웠던 中 인사 마음 녹인 文대통령 한 마디 '一花獨放'

강태화 2017. 11.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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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리커창 총리 회담서 '증광현문' 문구 인용
시진핑, 해당 문구 2013·2014년 연속 인용해 사용
2014년 '중앙일보' 기고문서 한·중 관계 4원칙 밝혀
中 '의구심' 없앤 文의 '중국 고사' 원작은 시진핑?…2014년 기고문의 '암호 코드'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제31차 ASEAN 정상회의'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 소피텔 호텔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와 회담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13일 저녁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의 소피텔 호텔. 문재인 대통령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마주 앉았다. 리 총리 옆에는 재정부 부장, 공업정보화부 부장 등 각료들이 주로 배석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이미 문 대통령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했지만, 이날 회담장에 배석한 각료들은 문 대통령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배석자들의 표정은 차가웠다. 문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는 시험해보자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국측 인사들이 문 대통령의 ‘한마디’에 모두 한꺼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회담은 “각종 교류 협력이 조속히 정상궤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결론으로 끝났다.

중국측 모든 인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동안의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한 문 대통령의 말은 이 대목이다.

“중국 고전에 ‘꽃이 한 송이만 핀 것으로는 아직 봄이 아니다. 온갖 꽃이 함께 펴야 진정한 봄이다’라는 글을 봤다. 리 총리와의 회담이 다양한 실질 협의의 다양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 문구는 명나라 때 편집한 아동교육 교재 ‘증광현문(增廣賢文)’에 나오는 문장이다. 원문은 ‘일화독방불시춘 백화제방춘만원(一花獨放不是春 百花齊放春滿園)’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오후 '제31차 ASEAN 정상회의'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 소피텔 호텔에서 리커창 중국 총리와 회담장 앞에서 만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문 대통령이 “(어디서) 봤다”고 한 이 문장, 그는 어디서 봤을까?

주인공은 시진핑 국가 주석이다. 시 주석은 2013년 중국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포럼에서 세계 경제협력을 강조하면 이 말을 인용했다. 그리고 1년 뒤 시 주석은 이 문장을 또 사용했다.

2014년 7월3일자에 실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특별 기고문. 13일 문 대통령은 리커창 중국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해당 기고문에서 시 주석이 사용했던 문구를 인용했다.
2014년 7월3일자 중앙일보에는 시 주석의 특별 기고문이 실렸다.

시 주석은 기고문에서 “경제무역은 항상 중ㆍ한 관계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중국은 한국과 함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가속화, 금융 협력의 심화, 거시정책의 협력강화 등을 통해 이익의 ‘파이’를 보다 크게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꽃 한 송이 피었다고 봄이 온 것이 아니라, 온갖 꽃이 만발해야 비로소 봄이 왔다(一花獨放不是春 百花齊放春滿園)’는 말이 있습니다. 국제금융위기의 깊은 영향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중ㆍ한 양국은 한 배에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함께 손잡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지역의 발전을 이끌고, 아시아의 번영과 진흥을 위해 기여해야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문 대통령이 과거 시 주석의 발언을 확인해 이날 작정하고 이 말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14년 시 주석의 기고문에는 이날 리 총리와의 회동에서 문 대통령이 요청했던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시 주석은 한ㆍ중 관계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네 가지 견지’를 들었다.

첫째가 선린우호를 통한 상호 신뢰 증진이다. 그는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無信不立)’는 것은 중ㆍ한 양국 국민이 함께 간직해 온 공동 이념”이라며 “서로 친척집을 드나드는 것처럼 고위급 및 각 분야의 교류를 강화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깊은 관심사를 중시하는 한편 공동 관심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견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1일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주요 원칙 중에는 ‘양국 간 최고위급 전략대화 채널 확대’라는 대목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이날 리 총리를 만나서도 “투자활성화를 위한 경제 분야 고위급 협의체 재개”를 공식 요청했다.
APEC 정상회의에 참석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오후(현지시간) 베트남 다낭 크라운플라자 호텔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중국이 사드 배치 과정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신뢰의 문제였다”며 “전 정부에서 ‘사드 배치 계획이 없다’고 하다가 갑자기 약속을 뒤집은 뒤 중국은 한국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서 극단적인 조치가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은 지난 6개월간 문재인 정부가 ‘믿을만 한가’를 놓고 사실상 공개적으로 한국을 시험해 왔다”며 “사드에 대한 지난 10ㆍ31 합의는 문 대통령을 신뢰하기 시작한 시 주석이 사실상 ‘보증’을 서서 성사된 것이고, 경제 관련 문제를 리 총리와 각료들에게 결정하도록 한 것은 스스로 문 대통령을 믿을만 한지를 보고 결정하라는 취지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 주석이 강조한 두번째 견지는 호혜협력이다. 앞서 ‘일화독방불시춘 백화제방춘만원’이라는 문구를 인용해 설명했던 부분이다. 시 주석은 이 부분을 제시하며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과 금융 협력의 심화 등을 강조했다. 공교롭게 문 대통령도 이날 경제 분야의 협력 재개를 요구하면서 ‘금융협력’을 콕 집어서 언급했다. 문 대통령이 리 총리에게 이날 제안한 원ㆍ위안화 직거래시장 발전 역시 금융 분야다.

한중 통화스와프가 자정 만기 되는 10일 서울 KEB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원화와 위안화를 살펴보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한중 통화스와프 만기 연장 협의와 관련해 "아직 모든 것이 완결되지 않았고 오늘도 회의가 잡혀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시 주석은 또 “평화와 안정을 견지하고 공동의 터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세번째 견지로 들었다. 그는 기고문에서 “동란이 발생하면 역내 국가 중 그 누구도 혼자만 무사할 수 없다”며 “중ㆍ한 양국이 책임감을 가지고 이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실현하기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반도 전쟁 불가론’을 기초로 최대한 압박을 가하되 최종적으로는 평화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일관된 주장과 일치한다.

시 주석의 마지막 전제는 “인문 교류를 견지하고 우정의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회동에서도 문화와 관광 교류의 재개를 가장 먼저 요구했다. 특히 이번 동남아 순방 기간중 아세안 국가에게 ‘한ㆍ아세안 미래공동체’ 구상을 제시하면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내 정치철학은 아세안이 추구하는 ‘사람 지향, 사람 중심’ 공동체 비전과 일치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다음달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리 총리와 정해진 30분을 훌쩍 넘긴 50분 가까이 회담을 이어갔다. 회담 중에는 리 총리가 좋아하는 바둑으로 대화를 끌고 갔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아마 4단 수준의 바둑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 기록을 담은 책에는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이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봉합하고 관계 정상화에 나서며 예전 같은 중국인 관광객(유커)의 대규모 한국 방문에 대한 기대감이 국내 관광업계에 커지고 있다. 3일 서울 중구 명동거리의 한 상점에 중국어로 쓰인 광고 문구가 붙어 있다.[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이날 회담이 끝나가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다음달 정상회담에서 충분히 논의하도록 하자”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자 리 총리는 “바둑 얘기도 계속 하자”고 화답했다고 한다.

마닐라=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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