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국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사유와 성찰]선생복종

들판마다 휑뎅그렁하다. 무엇이나 받아주고 살려주고 키워주더니 제 앞으로는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비운 채 말이 없다. 그래도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양식을 거둬간 사람들아, 머잖아 닥칠 너희의 끝을 생각해 보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뿐이랴. 울긋불긋 고운 빛깔로 하늘을 수놓고 물들이기까지 한 해의 소임을 다한 나무들이 시방 알몸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무랄 데 없이 장하고 엄숙한 그들은 착하게 나서 복되게 마치는 선생복종(善生福終), 이른바 선종의 모범이시다.

입동 무렵이면 몸살로 고생하는데 이번에는 별일 없이 새 계절로 들어가고 있다. 때로는 앓기도 해야 한다. 앓아야 안다. 통 앓지 않는 사람은 남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생각할 줄 모른다. “사람이 되어 병 앓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토록 병 없음이 나의 근심”(채근담)이라고 했는데 괜한 말씀이 아니다. 늙어서까지 청년기의 근력과 정력을 유지한다고 해보자. 좋기야 하겠지만 천년만년 봄인 줄로만 알고 좀처럼 늦가을의 야무진 매듭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을 게다. 없다가 있고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우리 운명이라면, 낙법을 익히듯 죽어가는 기술도 익힐 필요가 있다.

“우리 형편은 교수대에서 밧줄을 목에 건 다음 딛고 선 마루청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이 사실을 잊으면 쓸데없는 잡념에 시달리고 욕망에 사로잡히며, 교만에 빠지고 만다. 종당 죽음에 직면할 사형수들이 매일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니 사람이란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모르겠다. 더구나 향락을 하겠다니 요절복통할 일이다.”(유영모)

예수만 사형수가 아니다.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 확정 판결을 받고 시작하는 미결수다. 성경은 첫 인간에게 이 점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기 3장 19절) 그렇다면 집행을 기다리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따뜻할 온(溫)자는 죄수(囚)에게 쟁반(皿)에 음식을 담아서 주는 것을 나타낸 회의문자라고 한다. 감옥 같은 세상에서 너나없이 사형수 신세라면 그저 따스한 정으로 품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뜻이 이 한 글자에 실려 있다.

최근 어떤 국빈의 요란스러운 행차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됨됨이가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비대한 몸집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에 띄우는 큰 배를 몰고 다니느라 엄청난 기름을 태웠을 텐데, 와서 기껏 한 일이라고는 무기를 왕창 팔아치운 것뿐이었다. 그러느라 북쪽에 대고는 한껏 험담을 쏟아 놓았다. 사형수에게 허락된 ‘마지막 오늘’을 고작 전쟁상인이 되어 탕진하다니 인간의 미련과 탐욕은 이 정도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사람은 역시 사람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말년에 한 신부에게 스물네 개의 질문을 보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까지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서는 인간이라면 마주치게 되어 있는 문제들이었다. 없는 것 없이 다 가진 사람이라도 “헛되고 헛되도다. 세상만사 헛되도다.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하는 쓸쓸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질문지에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던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하는 물음도 들어 있었다. 하필 이런 구절이 마음에 걸렸을까?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던 걸까. 아니면 현재의 행운에다 복된 미래까지 확보하고 싶었던 것일까.

묻기만 해놓고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죽음의 전령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거 다 몰라도 괜찮다. 인생의 성패와 생사를 판가름하는 문제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신은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내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더냐?” 대뜸 “언제 당신께서 굶주리고 목말랐느냐?”고 따지고 나설 윤똑똑이들을 위해 신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보충설명을 덧붙였다. 보고자시고 할 것도 없는 사람의 형편에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따라 영생이 주어지거나 박탈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말씀.

닷새 후면 대학수능시험일이다. 거기서 만점을 받더라도 이 물음에 머뭇거리면 말짱 헛수고다. 문제도 미리 내주고, 정답까지 쥐여주었는데 어째서 그리들 끙끙거리는가. 보다 못한 어느 성인이 말했다. “안 난 셈치고 살고, 죽은 셈치고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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