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늦게 합격' 마지막 사법시험 45세 최고령 합격자

임선영 입력 2017. 11. 8. 01:02 수정 2017. 11. 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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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게 합격한' 사시생…마지막 사법시험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

━ 그는 남들보다 출발이 늘 늦었다.

법대생(한양대 법학과)일 때는 집중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지 못했다. 고시와 취업 사이에서 막연히 고시생 신분으로 지냈고, 1996년 대학을 졸업한 후 2년간은 방황했다. 정이 많은 성격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다 98년 느지막이 군대에 입대했다. 서른의 문턱에서 군대를 제대한 뒤 직업도 잡지 않았다.

서른에 결혼을 하면서 뒤늦게 ‘법조인’의 꿈을 제대로 갖게 됐다. 그리고 늦었지만 뚜렷했던 그의 꿈은 결국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게 됐다.

━ '가장 늦게 합격한 사시생.' 7일 법무부가 발표한 ‘마지막’ 사법시험(59회) 3차 최종합격자 중에서 ‘최고령’인 박종현(45·사진)씨 얘기다.

사법시험은 마지막 최종합격자 55명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박씨는 이날 중앙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마지막 사법시험에 가장 늙은 합격자가 되는 바람에 전국적인 망신을 하는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런 박씨는“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뒤 아내와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고 했다. 2차 시험에만 6번 도전한 끝에, 15년간 신림동 고시촌을 집처럼 생각하며 지낸 뒤에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사법시험은 곧 제 청춘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열차에 탑승하게 돼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30대를 바친 사법시험이었다. 공부 기간이 길어질수록 지쳐갔다. 함께 사법시험을 준비한 선·후배들이 하나둘 로스쿨로 떠났다. 그는 사법시험을 고집했다. 그는 “‘내 젊음을 보낸 사법시험으로 끝을 보자’는 오기 같은 게 생겼다”고 했다. “제가 단단한 사람이 되면 하늘이 제게 한 번은 기회를 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전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부인 김현정(44·현대카드 기업문화팀 차장)씨는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시험에 떨어질 때면 아내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고 한다. 많이 울었다. 박씨는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전 합격하지 못했을 겁니다. 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용기를 줬죠.”

가장 힘들었던 시험은 2014년 사법시험 1차였다. 시험을 20일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남 1녀 중 장남인 그는 “누구보다 장남이 법조인이 되길 바라고, 믿어주셨던 아버지였기에 가슴 아프고 죄송했다”고 회상했다.

마지막 사법시험의 최고령 합격자 박종현(45)씨.
혼자서 생계를 책임지는 부인에게도 미안했다. 몇 년 동안은 부인의 만류에도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부인의 한 마디가 그의 마음을 다잡게 했다. “아직 젊은데, 지금 돈 안 벌어도 돼. 우리 인생 2막을 준비하자.”

━ 그의 ‘고시 인생’은 벼랑 끝까지 몰렸다. ‘이번이 아니면 더 이상의 사시는 없다’는 사실에 간절함은 더 컸다. ‘넘어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발레리나 강수진)이란 문구를 포스트잇에 써서 책상 앞에 붙였다.

오전 6시 30분에 영등포구 당산동 집을 나서 신림동 독서실에서 자정까지 공부했다. 지난해 2월 1차 시험에 붙은 뒤 올 6월 2차 시험을 볼 때까지 계속됐다.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하루 30분씩 헬스장에서 뛰었다. “속이 갑갑할 때 한바탕 뛰었어요. 눈물도 나고 땀도 나고, 속이 후련해졌지요.”

박씨는 이번 합격의 영광을 부인과 이름이 같은 또 한 명의 김현정(35)씨에게도 돌렸다. 그보다 10살 어린 사법시험 스터디 멤버다. “시간을 재 놓고 답안을 작성한 뒤에 서로 채점을 해주는 ‘실전형 스터디’를 함께 해줘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법의 한 축으로서 제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내년 3월이면 ‘늦깎이 사법연수원생’이 되는 포부다. 박씨는 “남들보다 시작이 늦었으니 인생의 두 번째 페이지는 더 멋지게 열고 싶다”며 “신림동 고시촌에서 스무 살이나 어린 친구들과 어울린 덕분에 젊은 동기들과의 생활도 자신 있다”고 웃었다.

━ ‘신림동 동기’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서로에게 힘을 준 동료들이 많이 생각날 것 같아요. 이젠 사법시험이 없고, 동료들에겐 제가 누린 만큼의 기회가 없다는 것도 마음이 아파요. 정든 신림동에서 후배들에게 술을 사줄 수 없다는 것도….”

박씨는 “인터뷰가 망설여졌지만 15년간 도전 끝에 꿈을 이룬 나를 보면서 다른 분들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저처럼 실패를 경험하신 분들을 마음속으로 늘 응원하겠다”고 덧붙였다.

반세기 동안 2만여 명의 법조인을 탄생시킨 사법시험은 내년부터 로스쿨로 일원화된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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