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성범죄의 특성, '그루밍'을 아시나요?

2017. 11. 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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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해 15살 여중생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하게 한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ㄱ씨가 상습 성폭행 혐의로 2013년 재판에 넘겨졌다.

ㄱ씨 사건은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루밍'(길들이기·Grooming) 수법에 의한 성폭력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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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지배 관계 형성 뒤 성관계 강요
피해자 스스로 '사랑한다' 착각하기도
성폭력 상담사례 절반 가까이 '그루밍'
"수사 기관도 그루밍 특성 이해해야"

[한겨레]

경기도 한 초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해 15살 여중생과 수차례 성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하게 한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ㄱ씨가 상습 성폭행 혐의로 2013년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법원에서 피해 여중생과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항변했다. 1·2심은 차례로 징역 12년형, 9년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ㄱ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피해 여중생이 평소 ㄱ씨에게 보낸 편지와 문자메시지에서 ‘사랑한다’는 표현과 이모티콘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검찰은 “두려움 때문에 강요된 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ㄱ씨의 손을 들어줬다. 파기환송심을 거친 이 사건은 검찰의 이례적인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ㄱ씨 사건은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루밍’(길들이기·Grooming) 수법에 의한 성폭력으로 분석된다. 그루밍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길들여 성폭력을 용이하게 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를 뜻한다. 가해자는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거나 진로고민 상담을 하며 상대에게 다가간다. 이렇게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신뢰를 얻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성관계를 허락하도록 만든다. 성폭행 피해가 발생한 뒤 상대를 회유·협박하며 피해 폭로를 막는 행위도 포함된다. 경제적·심리적으로 취약한 가정환경에 놓인 아동·청소년이 ‘그루밍’에 노출되기 쉽다.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탁틴내일)는 2014년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성폭력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전체 78건 가운데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가 34건(43.9%)을 차지한다고 6일 밝혔다. 그루밍 양상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학원·학교 교사가 친밀하게 대하면서 용돈을 주고 진로 상담을 하면서 신뢰를 쌓거나, 친아버지가 ‘다른 아빠들도 이렇게 한다’며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경우 등이다.

그러나 한국의 수사기관과 법원은 ‘그루밍’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편이다. 피해 아동·청소년이 표면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루밍을 범죄로 포섭할 수 있는 법규도 미비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오히려 피해자에게 성폭력의 책임을 묻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피해자에게 ‘서로 사랑했던 것 아니냐’, ‘폭행이 지속됐는데도 왜 신고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앞선 ㄱ씨 사건이 대표적이다.

최근 <한겨레>와 만난 ㄴ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ㄴ씨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지속적인 성폭행에 시달렸다. 수사기관에 신고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비밀을 발설하면 엄마와 이혼할 수밖에 없다”며 그를 압박했다. 의붓아버지와 재혼 뒤 겨우 안정을 찾은 어머니 생각에 ㄴ씨는 자포자기 상태로 3년을 버텼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ㄴ씨는 용기를 내 의붓아버지를 고소했다. 그러나 “왜 3년 동안이나 관계를 지속했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무고죄로 고소를 당했고, 주변에서도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는 “그루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사건 당시 어떤 두려움과 심리 상태에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신뢰 관계 또는 복종의 태도로 가해자에게 길들여진 아동·청소년은 스스로 학대당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성관계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며 “이를 구분하는 일을 아동·청소년 피해자의 몫으로 남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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