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가 된 한국 보수, '공포의 공동체'로 뭉치나
[경향신문] “보수우파가 지금 덫에 걸려 어떻게 보면 궤멸 직전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국당이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야 할 때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믿는다.”
11월 3일 오전 9시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 회의에서 류여해 최고위원은 당원과 지지자들이 갖는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덫에 걸렸다’는 말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정과 탄핵정국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보수궤멸’의 두려움을 언급한 것이었다. 보수 재편을 밀어붙이는 것은 ‘공포’이다.
이재영 최고위원은 두려움의 해결책으로 ‘통합’을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제대로 된 대여투쟁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파진영의 하나 된 통 큰 정치도 필요하다. 항간에 통합을 위해선 이런 저런 조건도 많이 달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이런 저런 조건을 달 것이면 (통합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한 서청원 의원 등 친박계 제명 등의 조치나 당대 당 통합을 조건으로 내거는 바른정당 의원을 겨냥한 말이었다. 한국당은 이날 박 전 대통령을 제명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고 탈당한 바른정당 의원들이 돌아올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다. 한국당의 입장에서는 ‘보수 재건’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류여해 최고위원이 언급한 ‘보수궤멸’의 공포는 바른정당 의원들도 피할 수 없었다. 바른정당 자강파로 분류되는 의원 중에서도 오신환·김세연 의원 등은 ‘당대 당 통합’이 아니라면 절대 통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의견들은 ‘당대 당 통합’이라면 통합이 가능하다고 열어둔 것이라 당 안팎으로 의혹의 불씨를 남겼다. 확고하게 바른정당의 ‘좁은 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유승민 의원은 2일 대전 동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당원 연수대회에서 “지지도가 올라가고 국민이 관심을 가지면 떠났던 정치인들도 다시 돌아오게 돼 있다”며 “대표가 되면 지지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의원들의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다. 서울지역의 지역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 관계자는 “상당수 지역 활동가들이 명확한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맥으로 연결된 의원들의 행보에 따라 뛰쳐나왔기 때문에 더 버티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공포가 인내심을 억눌렀다.
‘바닥 민심’도 통합을 부추긴다. 역시나 근간은 공포이다. 여론조사 및 분석기관인 시대정신연구소의 엄경영 소장은 “보수 유권자 가운데 바닥 민심의 차원에서도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백약이 무효다. 여론의 움직임상 두 정당은 통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엄 소장이 전한 소위 바닥 민심은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 “차별화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바른정당이라고 특별히 ‘깨끗한 보수’, ‘혁신보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정신 못 차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보수 핵심 유권자들의 심리입니다.” 북핵위기가 고조될수록 ‘북핵위기가 이렇게 심해서 나라가 망할 지경인데, 보수가 갈라져 있다’는 비난여론이 형성되고 이 여론은 한국당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특히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강하고 60여년 넘게 ‘보수 본진’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대구·경북지역에서 핵심 지지층의 여론은 변화될 기미가 없다. 엄 소장은 “광주와 대구의 여론이 형성되는 방식이 다르다. 광주의 경우 오피니언 리더 간의 여론이 주민들에게 전파되는 방식이라면, 대구는 반대로 주민의 여론이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압력으로 작동한다. 최순실 게이트 초기에도 대구의 지역 유력 정치인들은 탄핵 찬성이었지만 주민 여론 때문에 돌아섰다”고 전했다. 조원진 의원, 김문수 전 의원이 탄핵 반대 활동을 벌인 근본적 이유다.
대구·경북지역을 떠나 당의 기반을 옮기는 것이 바른정당 입장에서 차별화의 한 방법이었으나 선택하지 않았다. 엄 소장은 “유승민 의원조차 ‘자강’을 논하지만 진흙탕으로 구르지는 않는다. 서울시장이라도 출마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전했다. 정의당의 노회찬·심상정 의원도 2010년 진보신당 시절 각각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며 낙선과 중도사퇴의 고배를 마셨다. 반면 중도 및 진보성향 유권자들에게 바른정당은 ‘국정농단 세력의 일원’이었다. ‘좋은 정책’을 바탕으로 한 의정활동으로 ‘다른 보수’의 모습을 보이며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마침내 ‘보수 본진’이 된다는 전략은 유 의원의 정치적 고향에서도, 수도권에서도 단기간에 통하지 않았다. 수도권 중산층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보수’의 교두보가 될 법한 이혜훈 의원은 급작스럽게 금품수수 의혹에 휘말리며 대표직을 사퇴했다. 바른정당 의원들이 새누리당 시절 처리한 선거법 개정안도 덫으로 작용한다. 특정 지역기반이 아닌 전국에 지지자들이 골고루 분포된 소수 이념정당에 유리한 선거제도가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른정당 안팎에서의 모든 조건이 통합의 압력으로 작동했다. 13일 전당대회가 남아있지만 그 안에 획기적 전략 변화가 없다면 굉장히 어려운 조건에 처한 셈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한 가지 압력을 더 지목한다. ‘적폐청산’이라는 청와대와 여당이 내세운 프레임이다. 국정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간 조사해 10월 15일 발표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보면 문 대통령 지지율(68%)과 민주당 지지율(50.6%), 한국당 지지율(18%)은 동반상승했다. (조사 결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박 학교장은 “청와대와 여당이 자유한국당을 적폐세력으로 규정하고 당 차원에서 ‘적폐척결TF’ 등을 구성하는 행위 등은 국회에서 강경한 목소리를 더 증폭시켜 온건보수나 중도가 설 입지를 좁히고 결국은 양당제적 구도로 돌아가게 만든다”며 “적폐청산은 수사기관을 통해서만 하고 의회로 가져오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3일 최고워윈회의에서 홍 대표와 정 원내대표는 각각 북핵 이슈와 방송장악 이슈를 거론했다. 두 이슈를 통해 현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결집하겠다는 것이다. 정한울 연구원은 “순서가 바뀌었다. 유권자들이 실망해 떨어져 나간 가장 큰 이유는 실망감이다. ‘우리가 보수를 이렇게 지지해줬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는 심리다. 이 유권자들을 불러들이려면 뼈를 깎는 자정노력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연구원은 “2004년 탄핵 역풍 직전의 한나라당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온다. 당시 탄핵 역풍으로 존폐 위기에 몰렸던 한나라당은 한동안 대여투쟁을 자제하고 천막당사나 당 혁신의 모습만 보여줬다. 이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지속돼 인정을 받은 뒤 참여정부의 실정이 문제가 되자 국민 여론에 부응하는 견제세력이 될 수 있었다”며 “현재의 박 전 대통령 출당 정도로는 혁신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분화된 보수유권자 위에 뜬 보수정치 엘리트들을 묶어주는 것은 공포였다. 지난 대선을 거치며 소수가 된 한국의 보수는 ‘공포의 공동체’를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진보정부에도 역할을 주문했다. 박 학교장은 “현재의 구도가 장기집권에 유리할 것 같지만 갈등을 대결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통치과정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온건보수를 끌어들여 협력하는 전략이 통치계획에 포함돼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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