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남동생만 먹던 고기반찬과 몰카 찍는 남친, 27살 이지혜

2017. 10. 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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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별 성차별 속 여성으로 살아남기
'이지혜 게임' 이지혜 기자가 해보니

7살, 남동생과 차별하는 할머니의 밥상
19살, 남자친구 폰엔 몰래 찍힌 다리 사진과
"어딨어? 사진 보내" 행동 통제하는 데이트폭력
20대 여성들 "이 모든 게 충격실화" 폭풍 공감

[한겨레]

보드게임 ‘이지혜 게임’ 표지. 텀블벅 화면 갈무리

‘이지혜 게임’에 등장하는 다섯 살 이지혜의 장래희망은 우주비행사다. 이를 들은 이웃 아저씨가 지혜에게 말했다. “아이고! 무슨 여자애가 그런 일을 해~ 넌 미스코리아가 딱이야!” 이때 지혜가 해야할 말은 무엇일까? ①우주비행사 할 거예요! ②여자는 미스코리아 해야 하는구나. ③왜 안돼요? ④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게임 참가자들이 ③번을 고르자 지혜는 당돌한 아이가 되었지만, 지혜의 순응도와 사회성은 떨어졌다.

여성이라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상황이 보드게임판 위로 옮겨졌다. ‘이지혜 게임’은 지난 8월 게임제작자 ‘놀래미’가 텀블벅을 통해 제작한 게임이다. 참가자들은 이지혜의 엄마, 아빠 등 주변인물이 되어 이지혜가 일생동안 맞닥뜨리는 20개의 성차별적 상황에 대응할만한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이들의 선택에 따라 이지혜의 자존감과 감수성, 순응도, 사회성, 스트레스 등 다섯 가지 스펙의 수치가 달라지는데, 이 중 하나라도 0이 될 경우(스트레스는 100이 될 경우) 이지혜는 죽는다. 각각의 스펙을 관리해야 하지만 스펙 변화는 알지 못하는 참가자들은 상황을 추론하면서 답을 골라 이지혜를 끝까지 생존시키는 것이 게임의 공동 목표다. <한겨레>는 24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의 한 카페에서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 여성환경연대 등 여성단체 활동가 5명과 함께 이지혜 게임을 직접 체험했다. 사회부 24시팀 이지혜 기자가 실제 ‘이지혜’가 되어 게임을 진행했다.

24일 저녁 서울 신촌동의 한 카페에서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여성환경연대 등 여성단체 활동가 5명이 이지혜 게임을 하며 적당한 답을 고르고 있다.

본격적인 이지혜의 인생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일곱 살의 이지혜는 ‘남동생 밥그릇 앞에만 고기반찬을 놔주는’ 할머니를 마주한다. 한사성의 승진(25)이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저희 집도 조부모님이 항상 남동생에게만 반찬을 챙겨줬거든요. 한 번은 제가 다섯 살 때 식탁에서 반찬을 못 먹는다고 울었더니, 할아버지가 밥상을 뒤집으시더라고요.(웃음)” 승진의 경험을 들은 나눔(25)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지혜가 ‘밥상 뒤집기’라는 비극을 피하려면 ‘운다’는 선택지는 고르면 안되겠네요. ‘할머니와 친해지려고 안마를 해준다’는 선택지는 어때요?” 참가자들은 나눔의 말대로 ‘안마를 해준다’는 답을 골랐지만, 할머니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나오자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참가자들은 자신이 맡은 스펙을 관리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이지혜의 상황에 감정이입하기 시작했다. 열아홉살의 이지혜가 남자친구의 휴대전화에서 우연히 자신의 다리가 찍힌 사진을 발견한 상황이 나오자 승진은 “명백한 사이버성폭력이다. 증거수집하고 신고하면 카메라이용촬영죄로 처벌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금개(25)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고소를 하더라도 처벌은 벌금형 정도로 너무 미미하거든요. 게다가 막상 내 일이 되면 남자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일이 많아져요.” 참가자들의 침묵이 길어지자 나눔이 입을 열었다. “어쨌든 사진은 당장 지워야 해요. 나중에 남자친구가 ‘혹시 내 사진첩에 있는 다리 사진 네가 지웠니?’라고 물어볼 순 없지 않을까요?(웃음)” 참가자들은 결국 ‘몰래 사진을 지운다’는 선택을 했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이지혜의 자존감은 위험 수준으로 낮아졌다.

이지혜 게임 상황 예시. 참가자들은 이지혜의 스펙을 고려해 각각의 상황에서 최선의 답을 논의해 선택해야 한다. 텀블벅 화면 갈무리

이지혜의 인생이 20대로 접어들자 같은 20대인 참가자들의 경험도 함께 섞였다. 스물일곱 살의 이지혜는 “늦은 밤까지 어디서 뭐해? 어디 있는지 사진 좀 찍어 보내봐”라고 말하는 남자친구를 만나는데, 이 상황을 읽자마자 곳곳에서 ‘역시 연애가 문제’라는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일하는 은총(26)이 말했다. “사실 이성을 ‘통제’하는 것도 데이트폭력의 하나거든요. 올해 형사정책연구원의 실태조사를 보면, 남성의 71%가 애인을 향해 ‘통제 행동’을 한 것으로 나왔어요. 통제 행동이 더 심한 데이트폭력의 전조증상일 수 있는데, 온라인에서는 이런 행동이 ‘로맨스’로 치부되는게 현실이죠.” 여성환경연대의 단추(26)는 “선택지에 ‘술자리 사진을 찍어보낸다’, ‘남자친구 집착에 화를 낸다’ 등이 있는데, 뭘 선택해도 ‘데이트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고 지적했다.

참가자들이 고심 끝에 ‘이지혜는 서둘러서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간다’는 선택을 하자, 게임을 진행하던 이지혜 기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지혜씨는 27살의 나이로 사망하셨습니다….” 스트레스 지수가 100을 넘은 탓이었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일찍 죽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이렇게 심사숙고해도 27살에 죽다니, 살아남기 너무 힘들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지혜의 생존력이 ‘개복치’(모바일 게임 캐릭터. 쉽게 죽는 것이 특징) 수준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왔다.

참가자들은 이지혜가 겪은 상황이 여성이라면 숱하게 경험하는 일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4개 답 가운데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지를 골라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삶과 닮아있어서 안타깝고 슬펐다”(승진) “게임에 나오는 상황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정서적·육체적 폭력인데, 다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에 많이 공감을 한 것 같다”(은총) “이지혜처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살았는데, 그 선택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페미니즘의 역할인 것 같다”(금개) “일상적인 모습들이긴 하지만 성소수자처럼 더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제2의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단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법한 소재가 많이 나온다.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해봐도 좋을 것 같다”(나눔)

황금비 이지혜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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