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노동정책의 역풍.. 노동자들이 내몰린다

전수용 기자 2017. 10. 24.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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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된 親노동정책] [上]
"동네 주유소 상당수, 최저임금 감당 못해 셀프로 바꿀 준비"
겨우 꾸려가던 공장들, 야간조 없애고 직원 일부 내보내
최저임금 인상·근로 단축 앞두고 저소득층 일자리 줄어
편의점·주유소 등 "안타깝지만 알바생 줄이는 수밖에"
아르바이트 30명 둔 주유소 사장 "10명만 빼고 모두 내보낼 생각"
남성의류매장선 직원 15명 실직
완성차업체 용역 콜센터 직원 "내년 인원 감축 방침에 뒤숭숭.. 월급 덜 올라도 계속 일했으면.."
금형·주조 등 영세업체들은 "납기 맞추려 휴일 없이 야근.. 근로시간 줄이면 문 닫아야"

지난 20일 밤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산업단지의 A직물. 공장 입구는 철문으로 닫혀 있었고, 경비원 한 명만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 회사는 그동안 주·야간 2교대로 24시간 공장을 돌렸다. 하지만 최근 야근조를 없앴다. 회사 관계자는 "섬유업계 불황으로 일감이 줄어 고민이었는데 내년 최저임금까지 크게 올라 어쩔 수 없이 야근조를 없앴다"고 말했다. 80여명이던 직원 절반인 40명이 한꺼번에 회사를 떠났다. A사 임원은 "오랜 기간 같이 일한 직원들이었다. 울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500m 정도 떨어진 염색 가공업체 B사의 공장 불은 켜져 있었지만 일하는 직원은 한 명뿐이었다. 직원 40여명이 주·야간으로 작업했지만 지금은 28명으로 줄였고, 야근도 최소화했다. 마무리 작업 중이던 직원은 "11시쯤 공장 문 닫고 퇴근한다"고 했다. 염색공단 관계자는 "가뜩이나 어려운데 최저임금까지 대폭 인상이 결정되자 야간작업을 포기하고, 미리 직원을 내보낸 업체들이 여러 곳"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근로자 삶의 질 개선, 소득 증대를 통해 경기를 살리겠다며 추진 중인 내년 최저임금 인상(시급 6470원→7530원·16.4% 인상), 근로시간 단축(최대 주 68시간→52시간), 통상임금 확대와 같은 친(親)노동자 정책이 저소득층의 일자리를 없애는 '역설(逆說) 현상'이 산업 현장 곳곳에서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정부 정책 취지와 달리 기업·자영업자들이 고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인건비 상승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중소 제조업체와 편의점·주유소·식당 등 영세·소상공인 사이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지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인 C사는 당장 내년 사업 계획을 짜야 하지만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전체 직원 1만4000여명 중에서 계산·진열 등을 담당하는 매장 직원 9000여명의 월급을 올려줘야 하는데 증가분이 1인당 월평균 11만원을 넘는다. C사 관계자는 "내년에 추가로 들어갈 인건비만 100억원이 넘는데 한 해 영업이익 절반을 쏟아부어야 한다"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정근 건국대 교수는 "인건비 상승을 수반하는 친노동 정책이 한꺼번에 시행되면 내년엔 임금이 30%까지 오를 수 있다"며 "통상적으로 근로자 임금이 20% 이상 오르면 국가 경제가 부진하게 되면서 기업은 해외에서 탈출구를 찾고,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자영업자는 빈곤층으로 전락한다"고 말했다.

"셀프로 바꿔야죠. 방법이 있나요. 알바생 3분의 2는 내보낼 겁니다."

서울 강남에서 주유소 두 곳을 운영하는 곽모씨는 요즘 셀프(self) 주유소로 바꾸기 위해 주유기 가격 등을 알아보고 있다. 내년 최저임금 인상을 앞두고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다. 직원 30명을 데리고 일하는 곽씨는 각종 보험료까지 내년엔 월 600만원 정도 추가 인건비 부담이 생긴다. 곽씨는 "셀프로 바꾸면 10명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20명은 내보낼 것"이라며 "안타깝지만 정부가 그렇게 몰아가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셀프 주유기는 1기당 2000만원 안팎이어서 1억원 넘는 비용이 들지만 길게 보면 사람 줄이는 게 이득이라는 게 곽씨 계산이다. 그가 운영하는 주유소는 서울 시내에서 매출로는 톱 수준인데도 최저임금 인상 감당이 안 된다고 한다.

곽씨는 "주유소 사장 15명 모임이 있는데 한 명 빼곤 나랑 생각이 같다"고 했다. 주유소업계는 전국에서 20% 정도인 셀프 주유소가 내년엔 50%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전국 주유소에서 일하는 근로자는 5만여명. 1만5000개 가까운 일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최저임금 인상, 고용 축소 이미 현실로

남성 의류 브랜드 업체인 T사는 최근 전국 중소형 백화점과 아웃렛에 입점해 있는 매장 50곳 중 5곳의 문을 닫았다. 매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직원 15명 정도가 일자리를 잃었다. T사는 다른 의류업체와 마찬가지로 하루 8시간 근무(휴식시간 포함)에 올해 최저임금(시급 6470원)보다 1만원 이상 많은 6만원을 주고 매장 판매 직원을 써왔다. 정부가 내년 최저임금을 16.4% 올리기로 하자 일당은 7만5000~8만원으로 뛰었다. 이미 최저임금 이상 받는 근로자의 시급도 연쇄적으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상률도 25~33%에 달해 내년 최저임금 인상률보다 훨씬 높다. T사 대표는 "앞으로 가맹점주도 인건비가 올랐으니 판매 수수료 올려 달라고 아우성칠 텐데 걱정"이라며 "감당이 안 되면 가맹점 계약을 추가로 해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편의점을 하는 김모씨. 6년 전 대기업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시작한 김씨는 "6년 전으로 돌아가면 죽어도 편의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얼마 전 아르바이트생 4명 중 2명을 내보냈다. 대신 김씨 부부가 번갈아 가게를 지키고 있다. 그는 "월 매출 오천에 삼사백 남는데 우리 부부 인건비도 못 건진다"고 했다.

◇용역업체·콜센터 "암울한 내년 한숨만…"

완성차 업체 용역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박모씨는 고객 불만 사항을 접수해 해당 부서에 전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잔업수당(20만원), 고객대응수당(30만원)까지 합하면 170만원 정도 월급을 받는다. 내년엔 최저임금 인상으로 월급이 20만원가량 오른다. 하지만 박씨 마음은 편치가 않다. 회사가 사람을 줄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기 때문이다. 실제 콜센터는 전체 인원 100명 중 5% 감축을 검토 중이다. 박씨는 "콜센터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자리인데 월급 덜 올라도 고용 불안 없이 맘 편하게 일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경비·청소 용역업체 H사의 대표는 한숨이 부쩍 늘었다. H사는 서울 7~8곳 빌딩의 경비·청소 용역을 맡고 있다. 월 매출 1억원에 순익은 수백만원 정도다. 건물주가 내년 용역비를 올려주지 않으면 적자가 불가피하다. 회사 대표는 "사람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같은 양의 일을 적은 직원들이 해야 하니 업무 강도는 더 세질 것"이라고 말했다.

◇"뿌리 산업, 근로시간 단축은 치명타"

경기도 안산 시화단지의 K기계. 최저임금 인상 뉴스가 나온 지 두 달도 안 돼 근로시간(최대 주 68시간→52시간)까지 줄인다고 하니 회사 임원들은 거의 패닉 상태다. 간부들이 매일같이 모여 회의를 해보지만 뾰족한 답이 없다. 회사 관계자는 "대통령 공약이 모두 현실화되면 우리 같은 공장은 문 닫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주문이 없을 때는 직원들이 일을 거의 하지 않다가 일감이 생기면 야근은 물론 토·일요일까지 일해 납기일을 맞추는 방식으로 일한다. 근로시간이 줄면 야근이나 휴일수당이 늘어나고,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도 어려워 납기를 제대로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내년엔 인건비가 60~70% 올라 곧바로 적자가 날 판"이라며 "직원 줄이고, 생산 품목도 줄이는 게 그나마 대안이다"고 말했다. 박순황 한국금형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근로시간 단축은 금형·주조·용접과 같은 뿌리산업 업체에는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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