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에서 아브라모비치.. '몸'으로 역사 쓴 이단자들

김윤덕 기자 2017. 10. 2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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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행위예술 다룬 '역사를 몸으로 쓰다'展]
자신의 몸을 예술 도구로 활용.. 역사·시대에 던진 저항적 메시지
'행위예술=미친짓' 편견 깨뜨려

1962년 8월 독일 비스바덴 시립미술관. 한 청년이 잉크와 토마토 주스를 섞은 용기에 머리를 담갔다 꺼내더니 바닥에 깐 종이 위를 기어가며 '글씨'를 써내려갔다. 붓이 아닌 머리로 '일필휘지'를 시연하며 전통 파괴의 몸짓을 보여준 이 남자의 이름은 백남준. 훗날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된 그는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머리를 위한 선' 퍼포먼스로 먼저 유럽에 이름을 알렸다.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컷 피스’를 실연하고 있는 일본 작가 오노 요코. /국립현대미술관

1965년 3월 미국 뉴욕 카네기 리사이틀홀. 검은색 투피스를 입은 여인이 무대에 앉아 있다. 관람객은 '자르라(Cut!)'는 지시에 따라 가위로 여자의 옷을 자른 뒤 그 조각(piece)을 가져간다. '컷 피스(Cut piece)'란 제목의 이 행위예술은 여성에 대한 폭력, 전쟁의 공포를 연상케 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 무대 위 여성은 '존 레넌의 여인'으로 유명한 오노 요코로 여자의 브래지어 끈이 잘리는 순간 퍼포먼스는 끝이 난다.

◇전쟁, 죽음, 상실… 몸은 기억한다

'미친 짓' 혹은 '궤변'으로 곧잘 폄하되는 행위예술, 일명 퍼포먼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1월 21일까지 이어지는 전시의 제목은 '역사를 몸으로 쓰다'. 종이나 물감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예술의 도구로 활용, 시대와 역사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 작가들의 '불온하고도 저항적인 몸짓' 70여점을 영상과 사진으로 선보인다.

오스트리아 안무가인 빌리 도르너가 무용수들과 함께 뉴욕, 브뤼셀, 잘츠부르크 등 세계 각 도시를 돌며 시도한 행위 예술‘도시 공간 속 신체들’. 건물 틈새에 끼거나 거꾸로 매달리는 등, 눈이 아닌 몸으로 공간을 체험하는 흥미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날의 백남준과 오노 요코를 포함해 중국 반체제 작가 아이 웨이웨이, 극단의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등 현대미술사에 남을 작가들을 망라한다. 아이 웨이웨이는 기원전 20년 한나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떨어뜨리는 퍼포먼스(1995년)로 중국의 문화혁명을 정조준한다. '오래된 것을 파괴해야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며 전통을 파괴한 마오쩌둥을 겨냥한 비판의 몸짓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 작가인 아브라모비치의 '발칸 연애 서사시'(2005년)는 청소년은 볼 수 없는 19금(禁) 작품이다. 전쟁으로 얼룩진 발칸반도에서 '성(sexuality)'을 이용한 제의와 민속 의식이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벌거벗은 남성들이 땅에 엎드려 성행위를 하는 듯한 몸짓이 당혹스럽지만, "대지를 풍요롭게 하고 우주의 힘을 받아 민족을 존속하고 치유하려 했던 인류학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배명지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언어가 기입하지 못한 역사를 몸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화두로 삼고 작업해온 박찬경의 신작 '소년병'도 인상 깊다. 숲속을 걷고 꽃을 보고 음악을 듣는 미소년 인민군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집단 기억과 정치적 이미지에 균열을 가한다.

프랑시스 알리스는 자본과 노동의 역설을 풍자해온 작가다. '실천의 모순'(1997년)은 멕시코시티 거리에서 9시간 동안 얼음덩이를 굴리는 퍼포먼스. 쉼 없이 일했지만 물로 녹아 사라져버린 노동의 가치를 빗댄 작품이다. 일본 아방가르드의 상징인 하이레드센터의 '청소 이벤트'(1964년)도 재미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앞둔 정부가 패전 국가의 잔재를 씻으려 도쿄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대한 은유. 걸레, 빗자루, 수세미를 든 작가들이 흰 가운을 입고 도쿄 거리를 구석구석 청소하는 퍼포먼스로 누가 진짜 공무원이고 작가인지 경찰도 헷갈렸다는 후문이다.

산티아고 시에라의 '10명의 노동자 등에 뿌려진 폴리우레탄'(2004년)은 충격이다. 런던에 사는 이라크 노동자 10명에게 방호복을 입힌 뒤 화학 폴리우레탄을 뿌리는 퍼포먼스. 사회적 소수자의 고통스러운 몸짓을 날것으로 고발해 논란을 낳은 문제작이다.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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