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에 칩 심으면 머리 속에 악보 떠오르는 세상 온다"

김호정 2017. 10. 24.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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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명가 '헨레' 대표 자이페르트
전체 3분의 1인 1000여 종 전자화
손가락으로 누르면 페이지 넘어가
한국 소비자, 디지털 콘텐트에 인색
프린트 버전도 중단 않고 계속 펴내
1948년 설립된 독일 헨레 출판사의 볼프 디터 자이페르트 대표가 전자악보를 가리키고 있다. 1990년대까지 수작업으로 악보를 제작하던 이 회사는 지난해 전자 악보 사업을 시작했다. [최정동 기자]
‘헨레 블루’, 즉 헨레의 푸른색은 클래식 연주자들에게 하나의 코드다. 헨레(Henle)는 1948년 설립된 독일의 악보사. 69년 동안 연한 푸른색 표지로 악보를 출판해왔다. 작곡가가 쓴 ‘원전 악보(Urtext)’를 원칙으로 시작해 지금은 연주자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악보사로 자리잡았다. 헨레는 1990년대까지 금속판에 각인을 하는 수공업으로 악보를 제작했다. 전통의 방향은 이제 바뀌고 있다. 헨레는 전자 악보 어플리케이션인 ‘헨레 라이브러리’를 지난해 2월 내놨다. 최근 무대에서는 책 대신 태블릿PC를 보면서 연주하는 음악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2000년부터 헨레의 대표를 맡고 있는 볼프 디터 자이페르트(58)가 한국을 찾았다. 18일 그를 서울 삼성동에서 만났다.

Q : 전자 악보는 어디까지 진화했나.

A : “한 손가락으로 누르면 한 장이 넘어가고, 두 손가락으로 탭하면 도돌이표를 찾아서 앞으로 넘어간다. 발로 밟으면 악보가 넘어가는 장치도 있다. 악보를 확대해 메모를 할 수 있고, 연습 과정을 녹음해 전송도 가능하다. 작곡가 벨라 바르토크, 카미유 생상스가 남겨 놓은 손가락 번호를 악보에 띄우는 기능도 있다. 지금 1000여 종의 악보를 전자화했다. 헨레 전체 악보의 3분의 1 수준이다.”

Q : 다른 분야에 비해 악보의 디지털화는 뒤늦게 시작됐다.

A : “2000년부터 디지털화를 고민했다. 2010년쯤 테스트 버전을 내놨지만 실패했다. 헨레의 전통 있는 악보들을 그냥 스캔해서 제공한다는 생각은 성공할 수 없다. 악보를 스캔해 제공하는 업체는 이미 많았다. 단순한 디지털 전환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음악을 잘 아는 영국의 작은 회사를 선정해 긴밀히 작업했고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껏 140만 파운드(약 20억원)가 들어간 프로젝트다.”

Q : 연주자들이 전자 악보를 많이 쓰나.

A : “나라별로 디지털에 대한 반응이 눈에 띄게 다르다. 미국이 특히 호의적이어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많다. 2위 시장은 중국인데 악보 조회수나 관심도에 비해 구매율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프린트 버전의 헨레 악보를 기준으로는 세계 5대 시장에 들어간다. 미국·독일·일본·영국과 함께다. 그런데 전자 악보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특히 안드로이드 이용자들의 전자 악보 구매율이 낮은데 한국에선 제로(0)에 가깝다. 그래서 헨레는 애플 스토어에만 어플리케이션을 남기고 안드로이드 버전은 없애려고 한다.”

Q : 한국 소비자가 왜 구매율이 낮을까.

A : “독특한 문화가 있는 것 같다. 디지털 콘텐트에 돈을 쓰는 데 거부감이 상당하다. 또 선생님이 쓰는 악보를 그대로 써야 하는 문화도 있는 듯하다. 전자 악보에 대한 호응은 세대별로 뚜렷하다. 젊은 연주자들의 관심이 높은데 선생님과 일대일 레슨을 하는 문화에서는 전자 악보 사용이 일반화하기 쉽지 않다.”

Q : 앞으로는 전자 악보가 일반화할까.

A : “솔직히 금방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연주자들은 ‘이미 헨레 악보가 있는데 왜 또 전자 악보를 사야 하나?’ 또는 ‘이미 악보가 있으니 전자판은 무료로 받을 수 있나?’라고 문의를 해온다. 종이로 된 악보가 불러오는 음악에 대한 기억 같은 것은 디지털이 대체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헨레는 앞으로 수년 동안을 투자 기간으로 잡고 있다. 지금 전자 악보는 수익을 거의 내지 못하고, 프린트 악보의 어린 동생 같은 위치지만 진보를 거듭하면 먼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가진 상품이 될 것이다.”

Q : 수익 없는 투자가 가능한가.

A : “헨레는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시작했다. 철강 산업으로 막대한 자산을 쌓은 사업가 귄터 헨레가 문화 투자, 인류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지금도 헨레 악보사는 따로 재단으로 만들어져 있고 헨레가(家)는 수익을 가져가지 않는다. 직원 25명뿐인 작은 회사고 특별한 철학이 있다.”

Q : 악보의 디지털화는 어디까지 진화할까.

A : “예측하기 힘들다. 언젠가는 연주자들이 안경을 끼면 거기에 악보가 펼쳐질 수도 있다. 팔에 칩을 심으면 머릿 속에 악보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실제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아이디어들이다. 다른 분야보다 클래식 연주자들은 보수적이기 때문에 변화가 느릴 수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먼 미래의 악보는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도 피아니스트 유자 왕, 김선욱 같은 젊고 영향력 있는 연주자들이 디지털 악보를 쓰고 있다.”

Q : 헨레의 종이 악보 출판도 중단될까.

A : “내가 회사에 있는 한은 절대 아닐 것이다. 초창기 헨레에는 금속판에 악보를 각인하는 장인이 13명 정도 있었다. 2000년엔 두 명으로 줄었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 페이지 정도를 각인할 수 있어서 느리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마디의 길이, 음 사이의 간격 같은 것들에는 이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연주자들은 장인이 만든 악보를 보면 희한하게 연주가 편하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프린트 버전의 중단은 없을 것이다.”

■ ◆볼프 디터 자이페르트

「 프랑크푸르트 태생의 음악학자. 대학에서 음악학, 독일 현대 문학, 철학을 전공했으며 모차르트 현악4중주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헨레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주로 모차르트의 악보 출판을 담당했고 2000년 대표로 선임됐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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