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나는 노다지인 줄 알고 '가상화폐'에 이렇게 속았다"

김준희 2017. 10. 2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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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딸·아들 둔 전주 30대 가장의 격정 토로
주부·자영업자 등 40여 명 "15억원 날렸다"며
전주지검에 위탁채굴업체 사업자 사기죄 고소
7월부터 이더리움 환전 안되면서 사건 불거져
일부 사업자 "회사 측이 투자금 횡령했다" 주장
회사 "한국 측 운영위원들이 채굴량 조작" 반박
[중앙포토]
전북 전주시에서 장난감 유통업을 하는 조모(36)씨는 지난 2월 지인인 황모(44)씨의 소개로 가상화폐의 일종인 '이더리움(Ethereum)'을 알게 됐다. 조씨는 동갑내기 아내와의 사이에 딸(4)과 아들(2)을 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이자 가장이다.

가상화폐는 각국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일반 화폐와 달리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는 전자화폐의 일종이다. 실물 없이 인터넷상으로만 거래되는 비트코인(bitcoin)이 대표적인 가상화폐다.

이더리움은 주식시장처럼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돈을 주고 직접 사거나 비트코인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암호를 풀면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가상화폐를 만드는 과정을 광산업에 빗대 '캔다'(채굴·mining)고 하고, 이더리움과 같은 가상화폐를 생성하는 장치를 채굴기라 부른다.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이 지난달 2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서울 이더리움 밋 업(Seoul Ethereum Meetup)'에서 이더리움 확장성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씨는 "황씨가 '채굴기라 불리는 컴퓨터(연산장치) 1대만 구입해도 광산에서 금을 캐듯 이더리움을 캐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해 귀가 솔깃했다"고 말했다. 채굴기를 통해 얻은 이더리움은 투자자와 미국에 본사를 둔 가상화폐 위탁 채굴 업체인 M사가 각각 6대 4로 수익을 나누는 구조다.

당시 이더리움 1개의 시가는 2만원, 채굴량은 한 달에 코인 11개였다. 황씨는 이를 근거로 조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조씨는 "미심쩍었지만 '2년 안에 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투자금을 날리면 물어주겠다'는 황씨 말을 믿고 지난 3월 채굴기 1대 값인 284만원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 여의도에 문을 연 코인원블록스. 세계 최초의 오프라인 가상화폐 거래소로 ATM을 통해 비트코인을 직접 사고팔 수 있다. [중앙포토]
조씨는 이때부터 매주 전주시내 커피숍 등에서 열린 가상화폐 투자설명회에 격주간 참석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처럼 뭔가 일확천금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는 "투자설명회 때마다 8~10명이 모였고, 매번 절반 이상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강사는 M사 한국지사의 사업자인 이모(40대·여)씨였다. 조씨에 따르면 채굴기를 산 투자자를 1명 이상 끌어모은 사람은 속칭 '사업자'로 불린다. 황씨도 이씨의 투자설명회를 듣고 조씨에게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사업자는 본인이 거느린 투자자 수에 따라 군대 장성 계급처럼 파이브스타(5성 장군)·포스타(4성 장군) 등으로 나뉜다. 포스타는 자기 밑으로 채굴기를 1000대 이상 확보한 사업자를 말하는데 사업자 이씨는 포스타였다고 한다. 이씨는 투자설명회 때마다 "채굴기만 산다고 수익이 나는 게 아니라 다른 투자자를 추천하면 채굴기 1대당 보너스 200달러 등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영락없는 피라미드(다단계) 사기 수법이었지만, 조씨는 이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자료 : NH투자증권
조씨는 이씨 말을 믿고 5월에 960만원을 투자해 채굴기 3대를 더 샀다. 이때는 채굴기 값이 1대당 320만원이었다. 6월에는 채굴기 값이 380만원으로 더 뛰었지만 조씨는 채굴기 22대를 추가로 사들였다. 앞서 5월 본인이 산 채굴기가 캐낸 이더리움 3개를 현금 80만원으로 바꾸고 나서다. 당시 이더리움의 시세는 1개당 28만원으로 폭등하던 때였다.

조씨는 가족에게 빌린 9000만원을 포함해 모두 1억원을 투자해 채굴기 26대를 샀다. 그는 "이씨 얘기를 듣고, 80만원 정도지만 실제 수익이 나는 것을 보니 '가상화폐가 돈이 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에스트레뉴 빌딩에 문을 연 가상화폐 오프라인 거래소 코인원블록스에서 대형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7월부터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투자자들이 M사 측에 이더리움을 현금으로 바꾸려고 출금 신청을 해도 환전이 안 됐다. 수상한 건 채굴기 구매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조씨 등에 따르면 처음에는 M사에서 만든 개인 계좌로 투자자가 채굴기를 샀는데 5월에는 추천인에게 현금을 보내 그 돈으로 이더리움을 구매해 채굴기 값을 결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6월에는 아예 채굴기 구매금을 사업자 이씨가 알려준 G사 간부 이모씨 계좌로만 입금해야 했다.

채굴기가 실제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조씨는 "이씨가 '서울 목동 KT IDC센터에 채굴기가 1500대 정도 들어 있다'고 주장했는데 지난 8월 센터 측에 직접 확인해 보니 사실이 아니었다"고 했다.

[사진 이더리움재단]
결국 9월 14일 투자자들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졌다. 제주도 K호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였다. 투자자 60여 명이 모인 이날 'M사 피해자 대책 감사위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박모씨가 "회사 측이 투자금을 빼돌려 이더리움 채굴이 안 되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업자 이씨는 같은 달 20일 박씨가 작성한 '채굴기 발주 현황'이라는 제목의 실사 보고서를 조씨 등 투자자 120여 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보고서에는 "채굴기를 확인한 결과 충남 천안과 경기도 파주에 2만 대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또 채굴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그래픽카드 사양도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M사는 HP(휴렛팩커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고급 그래픽카드를 수입한다"는 당초 이씨 설명과 달리 자료에 나오는 그래픽카드는 엉뚱한 저가 제품이었다고 조씨는 전했다.

차현진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이 지난달 1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진행된 J포럼에서 비트코인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조씨는 해당 단톡방에서 "발주란 새로운 물건을 구매한다는 의미인데 채굴기가 실제로 있다면 제목에 '발주 현황'이라는 말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채굴기는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이씨는 답이 없었다고 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조씨는 그동안 이씨와 카톡에서 나눈 대화 내용을 캡처해 공개하며 이씨의 사기 행각을 폭로했다. 이후 이씨는 9월 말부터 투자자 대부분과 연락이 끊겼다.

조씨 등 M사 투자자 40여 명은 "지난 19일 M사 사업자 이씨와 이씨가 채굴기 구매금 입금 창구로 소개한 G사 간부 이씨 등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사기 등의 혐의로 전주지검에 고소했다"고 23일 밝혔다. 고소 대상에는 이들을 투자에 끌어들인 추천인들도 포함됐다.

이들 투자자가 구매한 채굴기 값을 바탕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 금액만 15억원이다. 조씨 등은 피해 진술서와 투자금이 오고간 거래 내역 증명서 등을 검찰에 제출한 상태다. 조씨 등은 "형사고소와 별도로 손해배상청구 소송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전업주부부터 자동차 딜러, 체크카드기 사업자, 직업 군인 등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조씨는 "대부분 몰래 모은 비상금이나 가족이나 지인에게 돈을 빌려 투자한 사람들"이라며 "나에게 가상화폐를 소개한 황씨 등 추천인 상당수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2017 가상화페 포럼'이 중앙일보 주최로 지난달 14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거래소에서 열렸다. 이정아 비티씨코리아닷컴 부사장이 '가상화폐 시장 개괄'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조씨 등에 따르면 사업자 이씨는 본인을 소개할 때 과거에 국회의원 보좌관과 대기업 연구원 등을 지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씨 등은 이씨를 '가족 사기단'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이씨 남편과 이씨의 친언니·오빠·시동생 등도 끼어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씨의 시동생 김모(45)씨가 일하는 전주의 한 자동차매매상 동료 9명은 "가상화폐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김씨 말을 믿고 채굴기 구매에 모두 2억원을 투자했다가 날릴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김씨는 "형수(이씨)를 10여 년을 봐왔는데 사기 칠 사람이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조씨는 "현재 국내에 있는 이더리움 채굴기는 5만대로 추산되는데 1대당 380만원으로 계산하면 1900억원 규모"라며 "이씨 같은 포스타급 사업자가 전국에만 수십 명인데 이들도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른바 '딥 웹'(Deep Web)으로 불리는 숨겨진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으로 마약을 매매한 혐의로 정모씨 등 4명을 구속기소 했다고 지난달 11일 밝혔다.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박재억 부장검사가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M사 측은 지난 20일 회사 홈페이지에 해명성 글을 올렸다. 이 업체는 "현재 회사에서 가진 채굴기는 6000대밖에 없다. 지난 8월 이후 홈페이지에 뜬 이더리움 채굴량은 한국에 있는 운영위원들이 조작했다. 이들을 한국 검찰에 고소했다"는 내용의 공지를 띄웠다. M사 미국 본사와 한국 측 운영위원들 사이에 진실 및 법적 공방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이 때문에 지난 21일 대전광역시 KT 인재개발원에서 'M사 피해자 대책 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에는 M사 투자자 1000여 명이 모여 투자금 회수 대책 등을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실제 피해자는 수만 명까지 늘어나고, 피해 규모도 수천억원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씨는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이게 사기인지 모르는 투자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씨가 구금돼야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번 사건은 전형적인 폰지사기"라고 덧붙였다. '폰지(Ponzi)사기'란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에게 이자나 배당금을 지급하는 방식의 다단계 금융사기를 말한다.
가상화폐 투자 사기범들이 개발한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 이들에게 속은 투자자들은 이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자신이 투자해 확보한 '코알코인'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실제 가치가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하준호 기자
이와 관련해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수익모델이 없는데도 높은 수익과 원금을 보장한다며 투자를 권유하는 경우에는 유사수신일 가능성이 크다"며 "유사수신 피해가 의심되면 경찰에 신고하거나 금감원 불법 사금융피해신고센터(1332)에 제보해 달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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