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환의 꿈꾸는 나무](6)낙락장송 수백년 늘푸름 뒤엔 '곰팡이와 공생' 있다

신준환 | 동양대학교 초빙교수 2017. 10. 23. 20:5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인류 진화와 함께한 식물

자연생태계에서 생물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큰 소나무도 아주 작은 곰팡이와의 공생을 통해 수백년 동안 성장한다.

대나무는 풀인가 나무인가? 대나무는 볏과 식물로 나무처럼 보이지만, 해마다 자라게 하는 형성층이 없다는 이유로 풀로 분류된다. 대다수의 식물 전문가들이 이렇게 판정했고, 상당수 일반인들도 그렇게 수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대나무는 여전히 나무로 쓰인다. 가볍고 단단하기에 신속하고 간편한 건축물을 조성하는 데에는 최상의 재료다. 열대지방에서는 건축재뿐 아니라 일상생활용품의 재료로도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 고정된 지식체계의 함정

학술적으로 정의를 엄정하게 하는 것은 학문 발전의 기초를 다진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학문 발전을 위해 정의를 놓고 갑론을박 따지고만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 생물 진화도 종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너무 종에 집착하다 보니 종을 고정 불변의 대상으로 보는 문제도 발생한다. 이러한 오류를 늘 경계한다고는 하지만 지식체계를 고정시켜 안정을 취하려는 인간의 습성은 생각보다 깊다. 필자 역시 같은 잘못을 범했다.

과거 한동안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인류가 숲에서 진화했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숲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주장을 곧잘 펼쳤다. 한 세미나에서 한 발표자도 같은 요지의 주제발표를 했다.

인류 진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필자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어 발표자에게 물었다. “인류의 진화는 숲에서 벗어나서 직립보행을 한 것에서 출발점을 찾고 있는데, 어떻게 인류가 숲에서 진화를 했다는 말입니까?” 우물쭈물 답변을 하던 그분은 그날 저녁자리에서 “솔직히 그때 머리를 한방 맞은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분은 “말로는 당신이 맞지만, 나는 지금도 나무를 안으면 고향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 이후 여러 공부를 하면서 필자 역시 인류란 종의 진화에 불변성을 덮어씌우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류 역시 미생물 시대부터 파충류, 포유류 시대를 거쳐 온 진화의 역사를 품고 있다. 특히 포유류 진화의 초기에는 나무에 의지해 덩치가 크고 사나운 공룡으로부터 피난처를 구했을 것이다. 나무에서 내려와 인류 진화의 첫발을 뗐더라도 매우 오랜 기간을 여전히 나무에 의존해 살았을 것이다. 인류가 나무에 친근성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합당해 보인다. 인류의 두뇌는 파충류 시대의 뇌와 포유류 시대의 뇌를 기반으로 형성됐다고 하지 않는가. 필자는 그런 시간적 규모를 고려하지 못하고 인류 진화에 대한 지식만 전개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지식이 모여야 새로운 지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고뇌나 성찰이 매개돼야 새로운 지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또한 ‘내가 맞아’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경직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 식물 진화과정의 다양성

생물 진화를 종 단위로 설명하지만 사실 진화에는 종 차원 이상의 과정이 관계하고 있다.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것도 아프리카 대륙의 광대한 숲이 초원으로 바뀌는 환경 변화 가운데 나무에서 내려와 초원에 살 결단을 내린 유인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이야기한다. 특히 초기 인류의 생존에는 볏과 식물이 중요한 디딤돌이 된 것으로 보인다. 숲에서 나무 열매를 먹고살던 인류의 조상이 초원에 내려왔다고 바로 큰 동물을 잡아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볏과 식물의 열매는 무척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물론 볏과 식물의 진화는 초식동물의 섭식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촉진됐다.

그 전에 식물은 생장점을 위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무는 뜯어먹혀도 다시 생장시키는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엄청나게 많은 새눈을 발달시킨다. 그런데 아예 생존 전략을 바꿔 생장점을 밑에 갖는 볏과 식물이 진화했다. 생장점이 밑에 있으면 뜯어먹혀도 늘 새로 생장시킬 수 있다.

문제는 생장점이 위에 있으면 가지를 칠 수 있으나, 생장점이 밑에 있으면 가지를 치는 데 공간적인 한계가 생긴다는 점이다. 결국 볏과 식물은 분얼(줄기 밑동에 있는 마디에서 곁눈이 발육해 줄기와 잎을 계속 생장시키는 과정)전략을 택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런 식물들이 지질 시대로는 비교적 늦은 때인 약 6000만년 전 신생대에 등장하면서 드넓은 초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다.

따라서 높은 곳에 생장점을 가진 나무의 잎을 뜯어먹는 기린 같은 초식동물도 있었지만, 많은 동물은 볏과 식물을 뜯어먹도록 다시 진화했다. 높은 생장점의 풀을 먹는 동물과 낮은 생장점의 풀을 먹는 동물로도 분화됐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의 생장과정을 살펴보면 생물의 신비로운 진화과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 진화, 경쟁이 아니라 의존

크게 보면 식물과 동물의 진화는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 적응하는 진화의 경로, 즉 공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물론 인류도 이렇게 진화된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점점 더 뇌가 커지고 슬기로워졌다. 결국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생물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류는 식물이 기반이 된 다양한 관계의 생태계가 발전되었기에 진화가 가능했다.

생물 진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앞에서 봤듯 피로 얼룩진 경쟁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로 연결된 의존성이다. 대부분의 생물은 다른 종과의 관계없이 진화할 수 없을뿐더러 다른 생물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생태계에서는 너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기에 나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서도 남이 없다면 나의 존재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우리는 의·식·주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과 내용조차 남에게 받은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다.

우리는 높은 산 벼랑 위의 낙락장송을 보며 위인을 생각하지만 그 소나무도 미생물의 도움을 받아 저렇게 클 수 있었다. 소나무는 곰팡이와 공생을 하며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아주 가느다란 팡이실로 토양 구석구석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여 건조한 조건에서도 낙락장송으로 성장한다. 나무는 건조한 능선뿐 아니라 비교적 환경이 좋은 숲속에서도 곰팡이와 공생하지 않으면 대부분 제대로 자랄 수 없다. 우리 인간도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농경문화도 토양을 기반으로 발달했는데, 이 토양은 식물이 만든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토양이 먼저 형성된 것 같지만 사실 토양은 지구 탄생 한참 후인 5억년 전쯤 육상에 올라온 이끼 같은 식물들이 지구 표면의 바위를 부식시켜 흙 알갱이를 만들고 여기에 식물 사체인 유기물이 섞여 생성되기 시작했다(후지이 가즈미치의 <흙의 시간>). 그 후 많은 식물들이 자신들의 사체를 섞어 기름진 토양을 형성했고, 후속 식물들은 더 빨리 성장하며 토양 생태계의 발달을 촉진했다.

그런데 이끼가 어떤 물질을 분비했기에 바위를 부식시킬 수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이끼가 분비하는 물질은 사과산과 구연산이라고 한다. 사과산이나 구연산 같은 물질은 과일을 먹을 때 맛있게 느껴지는 신맛의 유기산이다. 건강을 챙기고 기분을 전환하는 과일 주스의 맛으로 식물은 바위를 녹인 것이다. 먼 관계인 듯한 이끼마저 이렇게 우리와 깊숙이 연결된다. 나아가 우리 몸의 형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호메오박스(homeobox) 유전자는 쥐는 물론 초파리까지 공유하며 진화의 깊은 연계성을 보여준다. 생물 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연결로 우리 모두 지구에 나타난 생명의 기원을 공유한다는 것은 유전자의 본체(DNA)가 동일하다는 점이 증명해준다.

이렇게 동일한 유전자 본체를 가지고 진화를 해 오는 과정에서 지구의 많은 생물들은 생태학적으로도 서로 연결돼 진화 과정을 전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바다에서 태어난 생물이 황량한 육상을 가꾸기 시작했고, 석탄기를 지나 식물이 꽃을 피워내기 시작하며 숲은 화려해지고 다양한 곤충의 번성을 촉진했다. 드넓은 초원의 등장과 인류의 탄생, 또한 오늘의 문명까지 모두 식물과 동물, 미생물과 인류가 깊은 그물로 이어져 있다. 이런 ‘깊은 연결’은 거대한 나무처럼 울림이 장대하다.

■ 인공지능(AI)과 인류의 진화

생물 간 유연관계와 진화 과정을 나무 줄기와 가지의 관계로 나타낸 것을 계통수라 한다. 일부 학자는 계통수가 진화 과정의 역동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진화 초기의 생물이 후기 생물보다 하등한 것처럼 오해를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진화 초기나 후기의 생물이 모두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그 나름대로 최고로 진화한 것이지 하등이나 고등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히 인류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계통수라는 나무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 나무에 대한 또 하나의 오해가 있다.

나무는 정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생장하고 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마다 새로운 세계를 펼쳐낸다. 우리는 나무줄기에 집착하기에 고정시켜 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무의 핵심이 줄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나무의 중심은 새 가지와 잎, 즉 지엽(枝葉)에 있다. 나무의 핵심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지엽이 모두 각자 나름대로 핵심이고 중심이다.

줄기에 집착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업신여기고 우수한 민족의 정체성을 찬양하거나 왕권의 정통성을 기리던 역사의 잔영일 수 있다. 국민들이 모여야 왕권이 존재하듯, 줄기란 그저 지엽의 생장을 위한 통로 역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지엽이 죽으면 통로가 막히고 줄기는 썩는다. 이 지엽이 햇빛과 수분을 연결해 에너지를 생성함으로써 풍요로운 숲을 일궈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나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해마다 새로운 세계를 새로 펼쳐내는 나무를 볼 때 생물의 진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엽말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창의성을 기르는 데는 중심적인 생각과 지엽적인 생각이 따로 없다. 지구상의 갖가지 생물도 이 지엽처럼 서로의 세계를 연결해주고 의존함으로써 아름다운 생물다양성을 일궈내고 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생물의 진화나 나무의 생장에 비춰볼 때 인간에 대한 개념은 새로워지게 되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저서 <말과 사물>에서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인간은 최근의 시대에 발견된 형상”이라며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고 적었다. 아마 인간이란 개념은 바뀌게 될 것이다. 아니 인류의 탄생은 많은 종이 절멸해서 가능해진 사건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인류 역시 사라지게 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의 생물 진화 과정을 성찰하고 인공지능과의 관계를 발전시킨다면 인류 진화의 미래에도 희망이 싹틀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신준환
전통 생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산림생태, 생물다양성 보전 등을 연구하고 있다. <다시, 나무를 보다>, 어린이 그림책 <나무는 언제나 좋아> 등을 출간했다. 국립수목원장을 지냈다. 동양대학교 초빙교수다.

<신준환 | 동양대학교 초빙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