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경쟁력 날개없는 추락..정부 전방위 개입이 禍 불러

전정홍 2017. 10. 2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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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 간섭 심할수록 금융기업 자율성 떨어지고 신사업·기술 큰그림 못그려
일자리 창출효과도 뒷걸음

◆ 외환위기 20년, 경제생태계를 살리자 ② ◆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의 2013년 이후 2년간 분식회계 규모는 1조5342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시와 제재도 받지 않았다. 이 같은 황당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결국 관치금융 때문이다. 윗선의 압력을 받고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에 내주는 대출의 적정성 여부에 눈을 감은 금융당국, 자사 출신을 재무·감사 담당 임원으로 내려보낸 산업은행. 그들은 결국 거수기 역할만 했다. 기업·금융권·당국 사이에 맺어진 부패의 고리가 금융권의 직무유기와 함께 수조 원대의 혈세를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정작 분식회계로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회계법인과 대우조선 담당자뿐이었다. 산업은행과 금융당국 누구도 대우조선 회계 부정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이 흐른 2017년, 한국 금융은 여전히 '관치'와 '규제'의 트라우마에 빠져 있다. 1999년 대우그룹이 천문학적 분식회계로 해체한 뒤로도 잊을 만하면 한국 경제에는 최악의 분식회계 사태가 터져 나왔다. 또한 2000년대 초반의 벤처 버블, 2011년 터져 나온 저축은행 부실 사태 등이 잇따르며 금융은 제조업과는 달리 규제와 관리의 영역에서 성장이 멈춰버렸다.

그렇다보니 국내총생산(GDP)과 고용에서 금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전직하하고 있다. 또한 선진국과 달리 금융산업이 발전하지 못하면서 넘치는 유동성을 금융권에서 소화하지 못하고 부동산으로 넘겨 경제의 버블과 가계부채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왜곡된 금융을 정상화시키고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전문가들은 금융기관에 자율과 책임을 함께 줘 산업구조 자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교수(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는 "한국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낙하산이 집중 투하되고, 규제가 심하다 보니 도덕적 해이에 빠져 산업 발전에 대한 의욕이 없다"며 "은행에도 오너십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수은행 5개, 시중은행 6개, 지방은행 6개 등 모두 17개 은행 가운데 대부분이 관치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그나마 정부 지분이 없어 관치와 규제에서 자유로운 은행은 외국계인 씨티·SC은행과 지주사를 외국계가 보유한 대구은행 등 3곳뿐이다.

실제로 금융기관은 개별적 경영 판단조차도 정부 정책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다. 최근 문재인정부가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금융의 역할을 강화하고 나서자 금융권에선 앞다퉈 총대부터 멨다. 지난 16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금융위원회가 은행 등 10개 업종, 415곳을 대상으로 올 하반기 채용계획을 보고받은 사실이 논란이 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금융이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는 마중물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특히 금융기관이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미래산업에 투자하려고 해도 금융당국이 담보부터 사업성까지 촘촘히 규제해 사실상 대출을 내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감독원은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할 때부터 개입해 협의를 거치도록 한다"면서 "창구에서 기업 대출을 하려고 해도 담보와 사업성 평가를 구체적인 행정지침으로 정해놨기 때문에 신기술 투자는 꿈도 꿀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 금융당국이 금융기관의 인사와 임금 시스템까지 개입하다 보니, 금융기관이 신산업에 투자하려고 해도 해당 기업과 산업을 파악할 전문가를 키우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임형석 금융연구원 은행·보험연구실장은 "금융기관은 업무 특성상 개인 비리가 발생할 수 있어 직원 사이에 교차로 업무를 점검하게 한다"면서도 "외국은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순환보직을 하지 않고 장기간 휴가를 쓰게 한 뒤 다른 직원이 점검하는 방식을 택한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금융권 전체에 산업 전문가가 육성되지 않게 되면서 벤처캐피털 같은 기술금융사도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금융기관의 여신·리스크 담당자는 성장성 높은 기업에 투자해도 금융당국 규제로 과도하게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도록 한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 금융사의 성과·보상 및 인사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결국 금융기관 스스로 신산업에 투자할 필요를 느낄 수 없도록 하면서 한국 전체 금융시장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특히 금융당국의 규제는 행정지도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상 규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행정지도는 법령 등에서 정하지 않은 비명시적 금융규제로 대개 '모범 규준'을 통해 추진된다. 하지만 금융기관은 행정지도를 어길 경우 불이익을 우려해 사실상 규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지난 9월 기준으로 금융위는 12개, 금감원은 38개 행정지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금융산업 경쟁력은 갈수록 뒤처지고 있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당국 규제와 관치금융이 심해지면서 경쟁력 하락은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올해 한국 금융시장 성숙도는 전체 137개국 가운데 74위에 그쳤다. 이는 2007년 27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급락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일자리 창출도 뒤처지고 있는데, 2007년 전체 취업자 대비 금융·보험업 종사자는 3.4%였지만 지난해에는 3.0%까지 떨어졌다. GDP 대비 금융·보험업의 부가가치 비중은 2007년 5.9%였는데 지난해 4.9%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금융산업 규제를 사전 규제에서 탈피해 사후 규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른바 네거티브 규제 시스템을 금융산업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당장 은산분리 규정에 묶여 있는 핀테크와 같은 첨단 금융산업을 육성하고, 대형 증권사의 초대형 투자은행(IB) 출범 등을 통해 금융산업 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도 금융 산업화를 위한 파격적인 규제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우진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은행은 더 이상 단순히 예금을 받아서 대출해 주는 기관이 아니다"며 "자본시장에 적극 참여해 기관투자가 역할을 하려면 은행과 자본시장을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중간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정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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