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빌라 옥상에서 발견한 우리의 '민낯'

최보윤 기자 2017. 10. 23.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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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옥상 밭 고추는 왜
명콤비 장우재·김광보 창작극.. 재개발·실업 등 사회 갈등 다뤄

어떤 사람에게는 '그까짓 것'으로 보이는 게 다른 이에겐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다. 서로의 가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들, 보이지 않는 폭압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소시민…. 고추를 둘러싸고 작은 빌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옥상 밭 고추는 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민낯을 보여준다. 연극 '환도열차' '햇빛샤워' 등으로 유명한 극작가 장우재와 세련된 연출 감각으로 팬층이 두터운 김광보 서울시극단장(예술감독)이 내놓은 창작 신작. 11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공력을 느낄 수 있다.

낡은 빌라 옥상에서 고추를 키우는 마음 좋은 304호 터줏대감 광자. 201호 아줌마 현자는 그 고추를 몽땅 따가고는 광자에게 몹쓸 말을 퍼붓는다. 빌라에 비료 냄새가 진동한다는 게 이유지만 속내는 재건축 동의를 해주지 않는 광자에 대한 분풀이다. 가난을 딛고 억척스러운 삶을 살다 이제야 겨우 빛을 볼 것 같은 현자에게 광자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장우재 작가가 실제 겪은 사건을 바탕으로 쓴 ‘옥상밭 고추는 왜’. 개인적 분노를 사회로 확대시키지만 결국은 지질해지는 듯한 우리네 모습이 녹아있다. /서울시극단

광자는 결국 현자의 모진 말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301호에 사는 배우 지망생 현태와 아내에게 눌려 사는 303호의 고학력 실업자 동교는 현자의 사과를 받겠다며 친구들을 대동해 시위를 벌인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소외된 자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해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극은 빠르게 전개된다.

작품에서 약자와 강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왜 나서냐?"는 현자의 지적에 현태는 "사람의 뿌리를 흔드는 것도 살인"이라며 '정의롭게' 맞서지만, 현자의 신상명세까지 인터넷에 까발리며 공격한다. 궁지에 몰린 현자는 "별것도 아닌 것들이 별것도 아닌 일로 나서서 진짜 고생하며 노력한 사람들한테 기대어 살려고 한다"며 자신을 항변한다. 시끌벅적한 소동에도 눈감고 귀찮아하거나 자신의 일만 돌보는 이들은 극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현자 역의 고수희, 현태를 맡은 이창훈과 동교로 분한 유성주 등의 호연이 설득력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장우재 작가는 "독일 사회운동가인 페트라 켈리가 말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란 말을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촘촘하게 쓰여진 극본은 현실을 따끔하게 꼬집는 거울 같다. 하지만 행위에 정당성을 얻으려는 일부 장황한 대사 장면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오는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02)39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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