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창조 위해 꼭 필요한 요소

이은주 2017. 10. 23.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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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29세 역사학자 브레흐만
생산성 높이려면 자유시간 더 줘야
기본소득, 근로시간 재분배 중요
비전·상상력이 인류 진보 이끌어
브레흐만은 ’21세기에는 ‘근로 시간의 재분배’가 중요한 과제“라며 ’기본소득과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적극적인 실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상선 기자]
“때가 무르익었다.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 UBI)의 시대가 오고 있다. 노동 유무와 상관없이 국민에게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호의가 아니라 권리여야 한다.” “지금 전체 노동인구의 3분 1 이상은 일하면서도 스스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여 있지 않나. 이제 일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의할 때다.” “정치인들은 근로시간 단축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표지
네덜란드의 젊은 역사학자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29)이 그의 책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김영사·사진)에서 한 주장이다. ‘기본소득’과 ‘근로시간 단축’을 핵심 메시지로 내세운 이 책은 네덜란드에서 먼저 출간되고 지난 2월 영미권에서 번역돼 나오자마자 ‘돌풍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티븐 핑거, 지그문트 바우만 등 세계 석학들이 격찬했고, 출간된 지 6개월 만에 25개국에 판권이 팔려나갔다. 최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브레흐만을 서울 가회동 김영사 사옥에서 만났다.

Q : 책이 크게 주목 받고 있다.

A : “나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 계속 생각 중이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변했고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구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기존의 보수·진보의 사상은 현 사회 문제에 어떤 해결책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다른 세상을 꿈꿀 때가 된 것이다.”

Q : ‘기본 소득’과 ‘근로시간 단축’의 재원 마련에 대한 우려 등 심리적인 저항이 크다.

A : “그동안 삶을 지배했던 극도의 빈곤은 사라지고 있고, 기술과 세계화 덕분에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은 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경제 발전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진보란 무엇인가. 소득재분배를 위해서도 기본 소득제도가 보수·진보 진영 모두에게 좋은 타협안이 될 수 있다.”

Q : 문제는 현실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을 하느냐다.

A : “작은 규모로 실험하며 추진해 나가자는 뜻이다. 곳곳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핀란드가 국가 주도로 올해 그 실험을 시작했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기본소득이 가져올 수 있는 경제적 효과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 미 스탠퍼드대는 ‘기본소득실험실’(UBI lab)을 만들었고. 스코틀랜드와 캐나다 온타리오주도 이 대열에 참여하고 있다.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다.”

Q : 한국은 연간 평균 근로시간이 2057시간(2013년 기준)으로, OECD 국가 평균(1706시간)보다도 훨씬 많은데.

A : “한국이야말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을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 오래 일한다고 생산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근무 시간을 줄여야 한다. 자유시간 없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있나. ‘권태’는 창조활동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진정한 여가는 사치도 악덕도 아니다. 근로시간을 줄이면 가족, 공동체 생활 등 자신에게 중요한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생긴다. 내가 한국의 대통령이라면, 근로시간 단축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을 것이다.”

Q : 근로 시간 단축으로 뭘 해결할 수 있나.

A :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근로시간을 줄이지 않고 어떻게 21세기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지구 온난화·실업·성 평등·스트레스 등등. 20세기에 ‘부의 분배’가 중요한 과제였다면,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신할 미래엔 ‘근로시간의 재분배’가 큰 과제다. 근로 시간이 긴 나라는 성 평등 순위에서도 하위인 나라가 많다.”

Q : 기본소득과 근로시간 단축 시행에 가장 큰 걸림돌은.

A : “진짜 걸림돌은 우리의 ‘생각’이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이미 준비가 됐고, 과학적인 증거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적응해야만 추진할 수 있는 일이다.” 브레흐만은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과 상상력이 인류의 진보를 이끈다”고 거듭 강조했다. 민주주의, 노예제도 폐지, 여성 참정권 등도 과거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었다며.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를 졸업하고 미국 UCLA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2013년부터 온라인 저널리즘 플랫폼 ‘드 코레스판던트’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회사에서는 내게 월급을 주며 완벽한 자유도 줬다. 대신 책의 인세는 회사가 절반을 가져간다”며 “나야말로 일종의 ‘기본소득’의 수혜자이며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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