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이후]사회갈등 조정하고 타협하는 시민의 힘 '숙의민주주의 가능성' 보여준 공론조사

이준웅 | 서울대 교수 2017. 10. 2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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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기고 | 공론화 과정 참여한 이준웅 서울대 교수

공사 재개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최근 정부에 ‘건설 재개’를 권고한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5·6호기 건설 현장. 전망대 내 홍보관 유리창에 현재 공정률이 표시돼 있다. 연합뉴스

공론조사가 끝났다. 공론조사에 참여한 471명의 시민참여단은 2박3일간 숙의 끝에 절묘한 타협점을 찾아냈다. 멈췄던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은 계속하되, 원자력 발전은 축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5·6호기 건설을 재개하더라도 안전기준을 강화하고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누가 보더라도 현명한 판단이다. 시민참여단은 결국 환경과 경제성 요인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에너지 안정성과 함께 안전도 고려했다. 시민들은 이번 공론조사를 통해서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누구보다 현명하게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낼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집합적 결정을 애써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질투하듯 폄하하는 자들도 있다. 공론조사의 작은 방법론적 흠결을 찾아 공론화 과정 전체를 문제 삼기도 한다. 심지어는 공론조사를 정략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획물이라고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숙의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라 하겠다.

첫째, 애초에 정부가 결단해서 밀어붙이면 되는 일을 쓸데없이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용을 낭비하고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니 선거공약대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반영하며, 따라서 위험하다.

민주주의란 정기적으로 공직자를 선출해서 권력을 위임하고 나면 그만인 제도가 아니다. 민주정이란 선거에서만 민주주의를 하자는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정에서 선출된 권력은 정치 환경의 변화를 탐지하고 여론을 살펴 권력의 위탁자, 즉 국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지난 20일 정부에 전달한 권고안.

특히 에너지 정책과 같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는 자들이 많고 이해관계 대립이 극심한 경우에 정부는 여론을 살펴야 할 책무가 있다. 이런 정책 사업은 공론화를 거치지 않고 정파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극심한 사회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갈등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공론에 부쳐 정책을 추진하는 비용보다 클 수 있다. 예컨대 과거 정부가 추진했던 4대강사업이나 미디어법 개정의 후과를 생각해 보자. 당시 공론조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면 사태가 달라질 수 있었다.

둘째,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대표성을 문제 삼는 질문이 있다. 471명 시민참여단이 어떻게 국민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겠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이런 항의는 공론조사를 국민투표의 대체물로 오해하는 가운데 나온다. 당연하지만 공론조사는 국민투표를 대체하지 않으며, 시민참여단도 유권자를 대신하지 않는다. 시민참여단은 선출된 자들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권한도 위임받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판결의 기속력을 갖춘 배심원제도에 따라 구성한 시민배심원과도 성격이 다르다.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의견의 담지자일 뿐이다. 이들은 공론조사 절차에 따라 특정 사안에 대한 학습기회를 부여받고 전문가 토론을 본 뒤 전문가에게 문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해당 사안에 대해 배우고 의견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 받는 사람들일 뿐이다. 정부는 시민참여단이 숙의를 거친 후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의견을 변경하는지 관찰해서, 그 결과를 정책과정에 반영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정부가 정책의 최종 결정자인 것이다.

결국 시민참여단은 학습과 토의를 거쳐 의견을 형성할 수 있는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갖기만 하면 된다. 지역이나 연령으로 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구성상의 다양성을 갖추면 된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나라 만 19세 이상 시민을 주민등록인구수를 기준으로 성, 연령, 지역을 층으로 삼아 비례배분한 후 각 층별로 무작위표집을 했다.

셋째, 정치인이나 전문가도 헤아리기 어려운 사안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일반 시민들에게 맡기냐는 비판이 있다. 일반 시민의 능력과 덕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문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사전에 무슨 특별한 전문 지식을 갖추거나 대단한 지적 능력을 따로 갖출 필요가 없다. 원전과 에너지 정책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배운 내용이 자신, 공동체, 국가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판단할 능력’만 갖추면 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원자력과 에너지 정책에 대해 빠르고 광범위하게 배워 나갔다. 이번 숙의과정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설문지에 답한 지식문항 정답률이 증가했던 것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민들이 원자력 및 에너지 전문가들에게 던졌던 질문들이 차수에 따라 충실하게 변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과정에서 믿기 어려운 쪽은 시민이라기보다 일부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에너지와 환경에 대해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때로 편협하고 당파적으로 보였다. 에너지 기술, 안전성, 경제성, 환경 관련성 등을 고려한 종합적 견해를 제시하기보다 특정 분야만 파고들었다. 기초 사실에 대해 상반된 자료를 제시하는 두 전문가를 보면서, 둘 중 하나는 잘 모르거나 아니면 의도적인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숙의 자체를 못 믿겠다는 주장이 있다. 2박3일에 걸친 주제 발표, 분임 토의, 전문가 문답이 뭐 그리 대단한 효과를 낼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가 실현한 숙의과정을 직접 관찰했다면 이렇게까지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고 믿는다.

지금이라도 누구든지 공론화위원회 홈페이지에서 공론조사에 사용한 자료집과 토론 및 전문가 문답 동영상을 다운받아 볼 수 있다. 자료집과 동영상을 보면서, 피시킨 교수가 제시한 다음 5가지 숙의 조건이 이루어졌는지 검토해 보기를 바란다. (1)정보의 충실성, (2)주장의 균형성, (3)참여자 다양성, (4)토론의 평등성, 그리고 (5)주장의 설득력이다. 요컨대, 시민들에게 얼마나 충실하게 정보를 제공했는지, 얼마나 균형 있게 찬반 주장을 제시했는지, 숙의에 참여한 시민들의 입장은 얼마나 다양한지, 연령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얼마나 평등하게 토론했는지, 그리고 시민들이 전문가 주장을 얼마나 충실하게 검토했는지에 따라 숙의 품질이 달라진다.

이번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는 의견 변화의 규모로 보나 학습수준으로 보나 성공적인 시민적 숙의가 이루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예상한 의견 변화와 학습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시민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나는 시민이 숙의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한 찬반 측 전문가와 공론조사 관리자가 먼저 반성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공론조사란 전문가의 설득력과 관리능력으로 시민의 능력과 덕성을 북돋우는 숙의민주주의 실험인 것이다. 이번 공론조사를 성공으로 이끈 찬반 양측 전문가들과 공론화위원회에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이준웅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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