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의 디스토피아 공식, 왜 아시아일까

정원식 기자 2017. 10. 2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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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블레이드 러너 2049’ 전편 도시 그대로…‘매트릭스’ 무술 대련
ㆍ1980년대 일본서 첨단 기술 부상…두려움 반영된 ‘사이버펑크’

기술문명이 가져올 미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사이버펑크 SF 영화에서 아시아적 코드는 기술문명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영화 <더 문> <블레이드 러너 2049> <블레이드 러너>(위부터)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35년 만에 속편이 개봉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는 장대한 시각적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하는 영화다. 전편 <블레이드 러너>(1982)와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사이에는 북미 개봉 시점을 기준으로 35년의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지만, 시각 디자인의 기본 콘셉트는 동일하다. 공통 코드는 ‘아시아’다.

■ 서구 SF 영화 속의 아시아

<블레이드 러너>에는 주인공이 탄 비행차량이 거대 도시의 밤하늘을 비행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어둡고 음울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서 있는 초고층 건물들 사이로 거대한 게이샤 얼굴이 등장하는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주인공이 복제인간을 추적하기 위해 배회하는 도시의 거리는 영어, 한자, 일본 가나 문자가 뒤섞인 간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또한 LA 차이나타운이나 일본의 어느 도시를 옮겨놓은 듯 대부분 동양인이다. 주인공 데커드는 동양인이 운영하는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는다.

전편의 도시 설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도 게이샤가 등장하는 네온사인, 영어와 아시아 문화권 문자가 뒤섞인 간판들, 동양인으로 가득한 거리가 나온다. 영화 속 LA 경찰국의 DNA 보관소 파일은 영어와 힌두어로 적혀 있고, 주인공 K가 데커드를 만나러 들어가는 건물에는 ‘행운’이라고 적힌 한글 간판이 걸려 있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할리우드 SF 영화 <매트릭스>에도 ‘아시아’ 코드가 등장한다. 주인공 네오와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모피어스가 수련을 하는 장면에서다. 두 사람은 도복을 입은 채 쿵후와 가라테를 섞은 듯한 무술 대련을 벌인다. 실제로 <매트릭스>의 무술감독은 <황비홍>, <와호장룡> 등에서 무술 연출을 맡은 홍콩의 옌우핑이다. 데이비드 보위의 아들로 유명한 영국 출신 덩컨 존스 감독의 2009년 SF 영화 <더 문>에 등장하는 달 기지의 이름은 ‘SARANG-사랑’이다.

■ 디스토피아적 상상력과 사이버펑크

<블레이드 러너> 이후 SF 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1980년대에 출현한 대중문화의 사이버펑크 감성과 연관돼 있다. 1984년 출간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를 원조로 하는 사이버펑크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반발과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깁슨이 <뉴로맨서>를 완성하기 전에 개봉한 영화지만 이러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편 영화에서의 사이버펑크적 이미지를 선구적으로 제시한 영화로 꼽힌다.

사이버펑크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1980년대 일본 경제의 부상이다. 당시 일본은 엔저를 기반으로 한 초호황기로 미국의 경제적 지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동시에 소니의 휴대형 카세트플레이어 워크맨, 닌텐도 게임 등으로 새로운 기술문명의 첨단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블레이드 러너>가 제작되던 당시 서구인들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경제적 성장에 당혹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으로는 앞선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며 “<블레이드 러너 2049>에 ‘행운’이라는 한글이 등장한 것도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존스 감독은 <더 문>에서 달 기지의 이름을 ‘사랑’으로 정한 것에 대해 “그때 사귀던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서 “한국은 세계에서 로보틱스 기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이기도 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시아와 첨단기술을 연관짓는 상상력은 <블레이드 러너> 이외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뉴로맨서>의 배경은 일본 지바시다. 앞서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의 배경도 당시 세기말적 첨단도시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홍콩이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에서 아시아는 ‘첨단’의 상징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낙후’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이 반영돼 있다는 비판도 있다. 박상준 SF아카이브 대표는 “영화에서 아시아계가 많이 보이는 것은 LA에 아시아계 이주민들이 많이 밀려들었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면서 “영화에서 소득 수준이 높은 중산층은 ‘오프월드’로 떠나고 지구에는 아시아계로 보이는 중하층 서민들만 남아 있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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