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생산·소비·분해' 선순환 깨져..정치과잉·단기 정책이 위기 키워

전정홍,문지웅,김규식,이승윤,나현준 입력 2017.10.22. 18:16 수정 2017.10.2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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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어재단 '한국경제 생태계 보고서'의 경고

◆ 외환위기 20년, 경제생태계를 살리자 ① ◆

"진화하지 못하는 생태계는 소멸한다." 자연 생태계에서는 다양한 생물군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생산·소비·분해'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선순환 구조를 유지한다. 동시에 생태계 외부에서 충격이 왔을 때 균형 상태로 복원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어야 건강한 생태계다.

국가와 사회를 유지시키는 경제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기업(생산), 가계(소비), 정부·금융권(분해)으로 연계된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경제의 순환 메커니즘을 담당한다. 산업과 금융, 인구, 복지는 경제 생태계의 하위 생태계로서 이들 경제주체의 순환 활동을 촉진한다.

1997년 외환위기라는 거대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동안 한국 경제는 이 같은 생태계 메커니즘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니어재단 '한국 경제 생태계 보고서'의 지적이다.

'생태계 위기'를 방치했던 결과는 혹독했다. 환란 당시인 1997년에도 5.9%였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8%로 절반 아래까지 추락했다. 반면 청년실업률은 20년 만에 5.8%에서 9.8%로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지난 20년간 진보·보수가 10년씩 집권하며 진단과 해결책을 내놨지만 단기 처방에만 급급하다보니 어느 쪽도 생태계 복원에는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 한국 경제의 생태계 구성 요소들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생태계의 생산자 역할을 맡은 기업 경쟁력과 고용 창출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환란 직전 80.4%(1996년)에 달했던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지난해 72.6%까지 급전직하했고, 2014년 이후에는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의 고용 창출력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24위에 불과하다.

가계는 14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에 짓눌려 민간 소비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2%대 초반에 머물고 있다. 분해자 역할을 해야 할 금융권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영업이익으로 은행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한계기업 비중은 2015년 기준 15%까지 치솟았다. 복지·연금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가 구조적 침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사회안전망 공급자로서 최종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제 생태계 내부의 하위 생태계들도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에 따른 체질 개선 효과를 잃은 채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당장 산업을 뒷받침해야 할 금융 생태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가가치 규모가 지난해 기준 4.9%까지 떨어졌다. 인적 자본과 기술력으로 성장동력을 끌어올려야 할 교육·과학기술 생태계는 안으론 국내 산업, 밖으로는 글로벌 생태계와 동떨어져 급격히 '갈라파고스화'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합계출산율은 지난해 1.17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경신하며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복지비용 증가에 따른 이중 부담을 주고 있다.

니어재단은 22일 발표한 '한국 경제 생태계 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 생태계 복원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기득권 장벽에 갇힌 거대 담합구조와 단기주의를 꼽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60년 잠재성장률이 1% 선까지 추락할 것이란 암담한 전망도 나와 있다. 여기에 더해 정규직 노조의 폐쇄성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수혜자가 기득권 집단이 돼 버린 경직적인 복지 시스템 등도 경제에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동원 고려대 초빙교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 과학계 등 모든 분야가 거대 담합구조에 갇혀 있다"며 "활력을 잃고 '현상 유지 증후군'에 빠진 한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선 각 생태계 내부의 기득권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태계 차원의 해법이 모색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정책 단기주의와 정치 과잉 현상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5년 단임 정권들이 장기간 구조적 대책이 필요한 생태계 해법보다 짧은 기간에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수요 진작책에만 쏠렸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정부의 부채 주도 성장론이었던 '초이노믹스'와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론' 모두 생태계 차원의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결국 구조 개혁을 위해선 '행동 없이 말뿐(no action, talk only)'인 현 정책 결정 과정을 혁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결국 해답은 긴 안목에서의 생태계 복원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각 분야에서 부담과 보상 체계를 개편해 담합구조를 깨고, 새로운 진입자의 경제활동을 촉진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노사 모두 기득권 세력의 양보가 필수"라고 지적했다. 또한 "저출산과 같은 문제들은 '구조'와 '생태계' 차원에서 각 분야들이연결된 융합된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출산·교육·노동정책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인구정책 △신산업을 촉진하는 개방형 기업문화 △동일노동·동일임금에 기초해 유연성과 안정성을 함께 갖춘 노동시장 △미래 세대를 고려한 복지·연금 체제 구조조정과 단순화 △금융 분야 규제 완화 등을 해법으로 꼽았다.

이와 관련해 한국경제학회는 24일 니어재단과 함께 생태계 위기 해법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서울 여의도 금융투자협회(23층 대회의실)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구정모 한국경제학회장은 "결국 한국이 먼저 바뀌지 않는다면 또다시 변화를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며 "대증요법보다는 경제의 다양성과 역동성, 상호 연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 전문가들도 한국 경제구조 개혁을 강하게 주문했다.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20년 전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근본적인 경제구조는 바뀌지 않았다"며 "신기술에 기초한 혁신 성장, 그리고 이를 위한 규제 개혁과 인적 자본 등 펀더멘털 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외환위기 당시 한국 정부에 강도 높은 개혁 정책을 주문했던 휴버트 나이스 당시 IMF 아태국장은 한국 구조개혁을 위해 "교육과 연구개발 시스템 개혁, 중소기업 육성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이민·여성 인력 공급을 통한 노동력 확충, 기업 구조조정, 사회안전망·연금 제도 정비를 통한 불평등 완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제안했다.

[기획취재팀 = 전정홍 기자 / 문지웅 기자 / 김규식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