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메이드인 재팬' 아성이 흔들린다..고베제강에 무슨 일이

김혜경 입력 2017.10.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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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혜경 기자 = 꼼꼼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믿고 쓸 수 있다고 여겨지던 일본산 제품, 이른바 ‘메이드인 재팬’의 아성이 흔들리고 있다. 일본 3위의 철강업체 고베(神戸)제강이 지난 8일 알루미늄과 구리 제품의 품질데이터를 조작했다고 발표한 이래 파문이 연일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베제강은 일본 내 4곳의 공장에서 지난해 9월~올 8월까지 약 1년간 알루미늄과 구리 제품 2만여t의 강도 등 품질데이터를 조작했다고 시인했다. 제품의 강도 및 크기 등에 있어서 거래처 계약과 달리, 품질이 충족되지 않은 제품을 출하한 것이다.

문제가 된 제품을 갖다 쓴 납품사는 일본의 도요타자동차 및 닛산자동차, 미쓰비시중공업 등 국내외 200개사로, 해외 업체로는 유럽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 미국 보잉사, 제네럴모터스(GM), 포드 모터, 테슬라 등이 있다.

자동차 보닛부터 신칸센(新幹線) 부품,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잇는 에어컨과 녹화용 블루레이 디스크, 알루미늄캔에 이르기까지 고베제강의 품질조작 제품이 사용됐다. 최근 발사된 GPS 위성로켓과, 일본이 자랑하는 국산여객기 MRJ, 자위대의 항공기 및 미사일 등 방위 장비품에도 문제의 제품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품질조작 파문의 시작에 불과했다. 8일 품질조작 파문이 시작된 이래 고베제강 측은 연일 기자회견과 사죄를 반복했고, 그 때마다 문제가 된 제품과 납품사가 추가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 확산했다.

11일에는 자동차 부품 등의 재료가 되는 철분(鉄粉·철가루)과 DVD등의 재료가 되는 금속 제품의 품질조작 정황이 추가로 드러났다. 그리고 12일 가와사키 히로야(川崎博也) 고베제강 회장 겸 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날 경제산업성을 방문해 이번 사태에 대해 사죄했고, 경제산업성은 2주 내로 제품 안전성의 검사결과를 공개하고 1개월 내로 원인 분석과 대책을 내놓을 것을 고베제강에 요청했다.

【도쿄=교도·AP/뉴시스】가와사키 히로야(川崎博也) 고베제강 회장 겸 사장(오른쪽)이 12일 오전 도쿄에 위치한 경제산업성을 방문해 알루미늄·구리 등 품질데이터 조작 파문과 관련해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있다.2017.10.12.

가와사키 회장의 사죄 이후에도 파문은 더 확산됐다. 13일에는 일본뿐 아니라 태국, 중국, 말레이시아 등에 위치한 고베제강의 9개 그룹사가 제조해온 구리 및 알루미늄, 특수강에서도 품질조직 정황이 드러났다. 품질조작 제품의 납품처는 국내외 200여개 업체에서 500개사로 확대했다.

고베제강 측은 기자회견에서 "거래처와 약속한 납기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에서 품질데이터 조작을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납기기한 핑계를 댔다. 또 품질조작은 약 10년전부터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고베제강의 품질조작은 수십 년 전부터 조직적으로 계속돼 왔다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 비리의 뿌리가 더 깊다는 것이다.

1970년대 고베제강 알루미늄 제조 공장에서 근무했던 전 직원은 마이니치신문에 품질조작은 40년 이전부터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적어도 40년 전, 제조현장에서는 ‘특별채용’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새삼스런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거래처의 요구 기준에서 벗어난 제품을 ‘특별채용’이라고 부르며, 데이터를 조작해 출하했다는 것이다.

1990년대 고베제강의 제조 공장에 근무했던 전 직원도 “공장장과 공장의 품질보증 책임자도 품질조작을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며 “비리는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라고 말했다. 고베제강에서 오랜 동안 근무한 한 베테랑 사원도 "철강제품에서는 30년 이상 전부터 품질데이터의 조작이 계속돼 왔다”면서 부적합품으로 판명된 제품도 출하됐다라고 증언했다.

고베제강의 품질조작 사태 여파는 향후 더 확산될 전망이다. 미국 법무부는 고베제강 현지 자회사에 알루미늄·구리 제품의 품질 조작 문제와 관련된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법무부는 우선 고베제강의 관련 자료를 넘겨받은 뒤 추가 조사에 나설 방침으로, 조사 과정에서 품질 조작이 소비자 안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될 경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

【서울=뉴시스】가와사키 히로야(川崎博也) 고베제강 회장 겸 사장(오른쪽)이 12일 오전 경제산업성을 방문해 알루미늄·구리 등 품질데이터 조작 파문과 관련해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있다.(사진출처: NHK캡쳐) 2017.10.12.

사태는 유럽으로도 번졌다. 유럽 내 항공 안전규칙 및 항공기이 보수 방법 승인 및 부품 인증 등을 담당하는 유럽항공안전기관(EASA)는 17일 고베제강의 알루미늄 제품 품질데이터 조작과 관련해 유럽에서 운항하는 항공사 및 정비관련 기업에 주의를 당부했다. EASA는 고베제강의 제품을 철저히 체크하고 가능하면 안전성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고베제강 제품 사용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사태는 고베제강의 경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향후 고베제강과 거래를 끊겠다는 거래처가 나올 가능성이 있으며, 자동차 리콜 사태 등으로 번지면 손해배상을 해야 할 전망이다.

가와사키 고베제강 회장은 이번 사태로 인해 발생할 손해배상 등의 비용에 대해 “부담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전액 출자 자회사인 신코(神鋼)부동산의 주식 등 자산 매각도 추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고베제강 이외 일본의 여러 기업도 '메이드인 재팬'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닛산자동차가 완성차 안전성 등을 검사하는 공정 일부를 무자격 사원이 실시한 정황이 탄로나면서 판매 직전이었던 자동차 6만 대가 출하정지 됐다. 앞서 지난 6월에는 일본 자동차부품회사 타카타가 에어백 대규모 리콜 사태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파산 신청을 했으며, 2016년에는 스즈키와 미쓰비시 자동차 연비 비리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chkim@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