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뱉고 도망간 그 남자.. 여자의 일상은 '악몽'이다

김지현 입력 2017. 10. 21. 20:50 수정 2017. 10. 2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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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 여성이 경험하는 젠더 폭력.. 악몽과 현실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오마이뉴스 글:김지현, 편집:김예지]

 여기 눈발이 휘날리고 얼어붙은 고속도로에서 남자들이 모는 트럭을 피해 눈썰매를 타고 달리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 어떤 용기 있는 한 여자가 추위를 견디다 못해 몸을 던져 트럭에 올라타려고 시도한다.
ⓒ pixabay
여기 눈발이 휘날리고 얼어붙은 고속도로에서 남자들이 모는 트럭을 피해 눈썰매를 타고 달리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 어떤 용기 있는 한 여자가 추위를 견디다 못해 몸을 던져 트럭에 올라타려고 시도한다. 그 여자는 불행하게도 트럭에 실려있던 기계에 머리가 끼여 끔찍하게 죽고 만다. 차마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아버린다.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두개골이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 여자가 용기 있게 몸을 날리던 순간, 나는 도로 위의 눈빛들을 보았다. 그 용기를 조롱하는 듯한 비웃음, 시도해봤자 성공할 수 없을 것을 확신하는 듯한 무력한 표정들... 그 표정들을 비출 땐 왠지 슬로우모션 처리를 한 것 같았다. 매우 천천히, 그리고 꼼꼼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 무력감과 고통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것은 나의 어젯밤 꿈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분석에서 영감을 받아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꿈을 꾸다가 깨면 순간 그 내용을 잊지 않으려 메모를 하거나 녹음을 했다가 아침에 일어나 다시 글로 정리한다. 어젯밤, 나의 무의식을 분석해 본다면 이렇지 않을까.

'눈 내리는 고속도로라는 배경에서 세상은 우리에게 썰매라는 옵션을, 그들에겐 트럭이라는 옵션을 주었다. 우리는 시작부터 다른 옵션을 받고 맨몸으로 추위를 뚫고 나간다. 느린 속력으로 이겨보려고 용감하게 트럭에 올라타기도 하지만 무리한 시도로 종종 머리가 끼어 죽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에게 옵션은 둘 뿐이다. 느린 속도와 맨몸으로 장애물들을 헤치며 살아남거나, 속도를 늦춰준 트럭에 올라타거나. 하지만 속도를 늦춘 트럭엔 엄청난 살인 기계가 실려 있을 수 있다. 그런 트럭에 올라탈 것인가는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운은 복불복이다.

트럭을 성공적으로 빼앗아 탈 순 없냐고? 노력하면 그런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왜 우리는 빼앗고 투쟁해야만 안전하고 편안한 트럭을 가질 수 있게 된 걸까.'

어제 이런 꿈을 꾼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낮에 후배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젯밤 문단속을 더 꼼꼼히 했고, 집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에도 몸을 움츠리다가 잠들었다.

그 후배가 경찰을 찾아가지 못했던 이유

 어제 이런 꿈을 꾼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낮에 후배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 pixabay
악몽을 유발한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얼마 전 판교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간 후배는 한밤도 아닌 저녁 6시쯤 편한 옷을 입고 걸어서 몇 분 안되는 집 앞 마트로 향한다.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에서 한 남자를 마주친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별일 있겠냐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엄습해오는 공포는 현실이 되고 만다. 그는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입안의 더러운 침을 잔뜩 내뱉고 유유히 걷던 길을 갔다.

그 순간 그녀는 입이 얼어붙어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지나가고 나서야 소리를 지르며 집 쪽으로 달려가 침 범벅이 된 자신의 몸을 씻어내고 오들오들 떨며 침대에 누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범죄알림e'라는 사이트에서 찾아본 결과, 그가 자신의 동네에 거주하는 성범죄 전과자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밤 내내 칼을 들고 자신을 위협하며 쫓아오는 덩치 큰 남자의 악몽을 꾸었다고 했다.

CCTV를 돌려보니 그 남자는 도망치지도 않고 유유히 가던 길을 걸어갔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가 그날 저녁에 맞은 건 침이었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칼이 될 수 있다는 극한의 공포를 체험한 것이다. 여성 혐오 범죄는 이처럼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녀가 회사에 와서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주변에서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퇴근길을 걱정하는 사람 또한 단 한 명도 없었단다.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이렇게 무감하게 된 걸까. 꼭 자신이 직접 당해봐야만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는 걸까. 아픈 일을 당한 그녀에게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이 정도 사건이 왜 심각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걸까. 이 여성혐오 사건에 숨겨진 범죄의 발전 가능성과 심각성은 왜 들여다보지 못하는 걸까. 꼭 누가 죽어 나가야만 자극적인 기사거리가 되고, 클릭을 유발할 수 있는 걸까. 여성혐오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덮거나 방치하는 것은 여성혐오 범죄를 부추기는 나비효과를 낳는다.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그녀를 설득하던 와중에 알게 된 자명한 사실이 있다. 그녀는 CCTV를 아빠에게 보여주려고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입은 짧은 반바지를 보고 "왜 이렇게 입고 나갔냐"며 책임을 물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쩌다 여자들은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무조건 자신의 탓부터 하게 된 걸까? 남자들이 수모를 당하거나, 맞거나, 죽임 당했을 때 "네가 애초에 옷을 그렇게 입었네. 그럴 빌미를 줬네. 그럴 만하네"라고 말한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옷을 그렇게 입었다고 혼내는 대신 그녀가 그 순간 느꼈을 극한의 공포와 무력감, 침이 칼로 변하는 악몽의 고통, 그런 것들에 공감해주는 살 만한 세상은 언제쯤 오는 걸까.

 어떤 여성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눈보라 치는 겨울이다.
ⓒ pixabay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늘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남성들의 의식도 변해야겠지만, 여성 스스로도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대에 나서야 한다. 안전한 트럭에 타고 있다고 해서, 여전히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모른 척해선 안 된다. 지금의 평온함은 단지 내가 '운이 좋아서' 유지되는 것일 뿐이다.

여전히 어떤 여자들에겐 이 세상이 눈보라 치는 겨울이다. 그 속을 헤쳐나가며 한 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다. 심지어 운이 좋은 여자도 "모든 남자를 잠재적 여성혐오자로 보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냐", "혐오라는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여자도 군대 가야하는 거 아니냐", "너는 남혐하는 거 아니냐"란 질문을 수없이 받고 살아야 한다. 

한 가지 의문점이 든다. 꿈속에서 나는 그 순간 어디에 있었을까? 어느 위치에서 이 장면들을 모두 목격한 걸까? 트럭 위였을까, 아니면 외로운 썰매였을까. 

눈썰매와 트럭이 싸우는 적대적인 세상이 아니라, 함께 트럭을 타고 거친 눈길을 헤쳐가는 따뜻한 풍경을 상상하며 회의주의로 기울었던 나의 마음에 다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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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창비·오마이뉴스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공모 기사입니다. (공모 관련 링크 : https://goo.gl/9xo4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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