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개혁대상"..직접민주주의에 열광하는 이유

박은하 기자 입력 2017. 10. 21. 16:15 수정 2017. 10. 2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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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내외신 기자회견 도중 취재진의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청와대 사진공동취재단

“국민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20일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거론하자 정치권에는 파장이 일었다. 야당들은 문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론’이 대의제 정치를 외면한다거나 여론에 휘둘리는 무책임 정치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당정치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보고대회 이후 진행된 과정을 보면 우려는 절반만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탈원전 정책 및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은 기존 여론정치와는 다른 진화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민들 간의 의사소통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이견을 좁혀나가며 결정을 내리고 정부가 이를 수용하는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가능성이다. ‘토론을 거쳐 깊이 생각하다’는 뜻의 영어단어 deliberative는 심의, 숙의, 토의 등으로 번역된다. 단순히 투표권만 행사하고 선거가 끝나면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청중 민주주의나 파시즘 등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더불어민주당 정당발전위원회의 직접민주주의를 내건 혁신안은 당원의 권리 및 풀뿌리 조직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민주주의의 교과서’와 가깝다. ‘시민참여’ 혹은 ‘정당의 조직력 강화’라고 쓰고 직접민주주의라고 읽는 셈이다. ‘직접민주주의’는 일종의 포장지인 셈이다. 민주주의의 교과서적 내용을 실천하면서 포장지는 왜 필요한 것일까.

■정당 의사 결정 때 ‘투표전 토론’ 명문화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말하는 ‘직접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좀 더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9월 20일 민주당 정당발전위원회는 1차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당원들의 ‘4대 권리’를 제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원들의 기존 권리인 당직자 투표권 외에 선출된 당직자들에 대한 소환권·발안권(공식 안건을 낼 권리)·토론권이다. 당의 기본조직인 253개 지역위원회를 유지하면서 전국에 5000개의 당원자치회(발표 당시 이름은 기초협의회)를 두기로 했다. ‘토론’은 이 혁신안의 핵심이다. 여선웅 민주당 정당발전위원회 위원(서울 강남구 구의원)은 “정당의 주요 의사를 결정할 때 당원들이 투표를 하기는 하지만 충분한 토론 없이 지도부가 바로 투표에 부친다는 문제제기가 전부터 있었다.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나 여론정치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토론을 거쳐 투표해야 한다는 것을 명문화하기로 했다”며 당원자치회는 일종의 동아리 개념으로 ‘토론공동체’로서 기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과 올해 대선 전후에 크게 증가한 온라인 당원들을 지역조직과 결합시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당원 교육의 차원으로 토론학교를 개최하고 상시적으로 토론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민주당의 내부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했던 오현철 전북대 교수(정치학 전공)는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제라고 볼 수 있지만 직접민주주의라기보다 토의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숙의나 심의보다는 토의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은 이견이 존재했던 사안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총선과 탄핵, 대선 승리까지 이어지며 고무된 시민들의 정치 효능감과 참여욕구를 정제된 형태로 만들어내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참여정부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 때문이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참여정부 때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넷을 매개로 일반대중을 통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포퓰리즘 논란을 부르기도 했지만 정권이 불안정했던 원인이 됐다. 조직되지 않은 대중의 지지는 언제나 가변적이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노무현 정부의 실험>, 한울 아카데미) 조직되지 않은 지지율은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문제로도 쉽게 출렁일 수 있다. 당과 대통령과 지지자를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묶어내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문자폭탄’과 같은 행태가 더 이상 지지기반 확대와 안정적 국정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데 매력적인 요소다. 투표만 하는 당원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권력을 창출하고, 제안하고, 직접 무언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비상식적 방법이 아닌 토론을 통해 제도화된 방법으로 진행하라는 메시지도 담긴 셈이다.

■국회 불신이 직접민주주의 관심 증폭시켜 ‘직접민주주의’라는 포장지가 당원이나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단어로 기능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회에 대한 불신이다. 탄핵을 거치면서 극적으로 변한 정당별 지지도와 실제 정당별 국회 의석의 비율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즉 국회가 시민의 실제 정치지형대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이 큰 이유다. 한국당은 각종 여론조사의 지지율에서 10%에 불과하지만 의석은 107석이다. 지난 2월 상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본회의 상정이 좌초됐다. 다중대표소송제과 전자투표제 도입, 사외이사 독립성 강화 등의 내용을 다룬 법안으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으로 불리는 법안이다. 16대 국회부터 발의됐지만 매 회기마다 폐기됐다. 김진태 한국당 의원의 격렬한 반대로 계속 상정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캠프에 관여했던 여당의 한 인사는 “현재 정부의 개혁법안이 의회를 우회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국회 구성상 실제로 통과되는 경제민주화 입법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는 참여정부의 4대 개혁입법 때처럼 실패한다”며 “행정부 중심으로 일단 할 수 있는 개혁은 최선을 다해 보고 그 여론을 바탕으로 국회를 압박하거나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 출범부터 사실상 정해진 경로인 셈이다. 행정부 중심의 개혁이 민주주의의 외관을 띠려면 더욱 ‘직접민주주의’라고 강조하게 된다.

행정부 권한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그러나 국회에 대한 불신이 훨씬 큰 상황이다. 오는 28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촛불집회 1주년 기념 집회에서도 청와대로의 행진이 예정돼 있다. 박진 퇴진행동 기록기념위원회 촛불백서팀장은 CBS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아직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의 과제가 남아있는데, 특히 국회가 탁 멈춰서 아무것도 진행이 안 되고 있다. 국회가 문제를 너무 못 푼다”며 “상징적으로 청와대 방향으로 가서 메시지를 던지기로 했다”고 밝혔다. 오현철 교수는 “선거법 개혁 때 국회는 스스로 개혁하는 데 실패했다. 지금은 입법부가 개혁 대상”이라며 “평소와 달리 개헌이나 입법부 개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직접민주주의 제안은 여당의 행정부 권력 강화와 민주적 절차성의 정당화에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의 지지기반은 강화해도 실질적 문제 해결은 이뤄내기 어렵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의 부결로 정부와 여당은 야당과의 협력이 없으면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기독교계의 반동성애 운동을 대표적으로 한 보수야당과 시민들의 결합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여선웅 민주당 정발위 위원도 “처음에는 당원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직접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요즘은 직접민주주의보다는 심의 민주주의 등의 표현을 쓰려고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참여와 제도정치를 활용하는 방식이 참여정부 때보다는 한 단계 진화했지만 ‘그들만의 민주주의’가 되지 않기 위한 묘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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